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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敦煌) 예술 연구자, 창슈홍(常书鸿)의 인생스토리

hanyuku 2021. 9. 10.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1945년 봄, 막 따뜻해지는 시기에, 간쑤성 둔황(甘肃敦煌)에서 분노한 한 남자가 말을 타고 다급하게 사막을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이 남자는 바로 국립둔황예술연구소 소장으로 이름을 날린 창슈홍(常书鸿)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달려가고 있었던 이유는 며칠 전 한 예쁜 여인이 차량 조수석에 앉아 위먼(玉门, 간쑤성의 도시 이름) 방향으로 갔다는 사실을 방금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흘 동안 연속해서 위먼을 향해 달려가던 창슈홍은 사막에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이번 일로, 그는 하마터면 죽을 뻔 했지만, 다행히도 사흘 만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지만 아내를 잃은 그는 마치 넋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젊은 시절의 창슈홍

 

 

 

깨어난 창슈홍은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아내를 찾았는데요, 그가 사랑하던 아내 천즈시우(陈芝秀)는 바로 며칠 전 란저우(兰州)에 병을 치료하러 갔었지만,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늘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고, 그가 애써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창슈홍은 란저우 신문에 5호자체(五号字体)로 실린 천즈시우가 창슈홍과의 결별을 선언한다는 성명을 보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천즈시우는 아이들도 내팽개치고 이렇게 도망친 것일까요?

 

 

 

창슈홍과 천즈시우

 

 

그는 19세때, 작은 고모가 시댁에서 한 예쁜 아가씨를 데려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아가씨는 작은 고모의 의붓딸이라고 하였고 이름이 천즈시우라고 하였는데,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렸고, 그녀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그때의 창슈홍은 혈기 왕성한 젊은 남자였는데, 천즈시우를 만난 후, 그는 헤어나올 수 없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미 약속되어있던 결혼도 깨고 기어코 천즈시우랑 결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죠.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으니 두 사람은 알콩달콩 깨를 볶으며 살았고, 마치 하늘이 맺어준 인연같았습니다.

 

 

결혼 후 3년동안, 회화를 좋아했던 창슈홍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서양 회화를 공부하였다가, 1년 후,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워하여 천즈시우도 프랑스로 데려왔습니다.

 

 

아내가 온 뒤로, 창슈홍의 생활에는 많은 색채를 더해주게 되었는데요, 그는 유화를 즐겨 그렸고, 천즈시우는 언제나 그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때 창슈홍은 늘 자기 가족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었고, 이렇게 행복한 사람이 기념으로 그림을 그려 남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창슈홍이 그린 천즈시우의 유화

 

 

 

봉황이 날아오르듯, 창슈홍은 프랑스에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고, 그 당시 천즈시우도 자신만의 취미를 찾았습니다. 그들 부부는 한 사람은 회화를 공부하고, 한 사람은 조형(雕塑)예술을 공부하여 프랑스 파리 유학생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한 쌍이었다고 합니다.

 

 

파리 16구의 거처는, 수많은 파리 유학생들의 살롱이 열리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천즈시우는 모든 것을 포근하게 꾸며 살롱의 여주인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냈습니다.

 

 

1931년, 그들은 첫 아이를 얻었는데, 귀여운 딸이었습니다. 창슈홍은 딸에게 샤나(沙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그가 센 강변을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센 강(塞纳河)을 의미하는 한자에서 비슷한 음으로 이름을 지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딸을 낳으면서 창슈홍의 모델이 하나 더 늘었는데, 그는 아내와 딸을 그리고 가족 사진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샤나가 세살 때 '가족'이라는 유화를 그린 창슈홍은 행복한 세 식구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지금도 저장성 박물관(浙江省博物馆)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창슈홍 작 '가족'

 

 

파리에서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나 아름다웠고, 어린 샤나는 파리에서 부모님과 다툰 적도 없었으며, 그들은 확실히 서로를 깍듯하게 존경하였고 금슬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늘이 좋은 인연을 질투하는 법이지요. 이를 후세 사람들은 비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935년 겨울, 비극의 씨앗이 심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늘 그렇듯 센 강변을 거닐며 산책을 하던 창슈홍은 헌책방에서 <돈황도록(敦煌图录)>이라는 그림책을 보았고, 그는 그것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습니다.

 

 

이 일은 그들의 사랑을 암담하게 만들었고, 창슈홍도 바꾸었으며, 이 결혼 생활도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파리 유학시절 창슈홍 부부와 친구들

 

 

 

둔황(敦煌)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본 창슈홍은 지금까지 낭만의 도시 파리로 건너와 예술의 근원을 추구하였지만, 자기 나라에 이런 보물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 이후 그는 늘 센 강변의 헌책방에 가서 이 그림책을 들춰보곤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조국의 문화에 대한 사랑과 미련이 짙어지자, 마침내 그는 조국으로 돌아가 둔황을 한번 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함께 귀국할 것을 권유했지만, 프랑스 생활에 적응한 천즈시우는 이곳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고 싶지 않았지만, 창슈홍의 가슴 속에 흐르는 뜨거운 열정의 피는 아내의 마음이 어떠한지 미처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이 부부는 처음으로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고,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지만, 나중에 천즈시우가 뜻을 굽히고 타협하여 남편과 함께 귀국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1936년 9월, 창슈홍은 귀국하여 국립북평예술전문학교(北平艺术专科学校) 교수로 재직하였고, 천즈시우는 학업이 1년 남았기 때문에 혼자 딸을 데리고 파리에 남았습니다.

 

 

귀국 후 창슈홍은 둔황 예술을 위해 평생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고, 파리에 아내가 남아있다는 사실도 잊고 몰두했습니다.

 

 

1년 뒤, 딸과 함께 돌아온 천즈시우는 귀국 후의 모든 것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몇 년 동안 그들은 전란 중에 이주하며 생활이 곤궁하여 떠돌아다녔습니다.

 

 

한번은 구이양(贵阳)을 지나던 중 창슈홍이 점심때 일이 있어서 외출하였는데, 천즈시우와 딸이 머무르던 여관에 폭탄이 하나가 떨어졌고, 천즈시우는 딸을 책상 밑으로 끌어내리며 본능적으로 샤나를 감쌌습니다.

 

 

그때, 천즈시우는 다행히도 딸과 함께 살아남았지만, 폭격이 끝난 뒤의 처참한 상황을 목격한 천즈시우는 공포에 질려버렸고 마음이 크게 상했습니다.

 

 

 

 

 

파리에서 하이힐을 신고 세련된 메이크업을 하고, 살롱의 아름다운 여주인으로서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어떠한가?

 

 

시체가 도처에 널려있는 참혹한 광경에, 도처에 피와 살점이 널려있고, 신체 부위들이 떨어져 나가있는 그런 끔찍한 아비규환의 광경을 보며 그녀는 전란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찼고, 이런 전란 속에서 유랑하는 생활에도 싫증이 나버렸습니다.

 

 

그때의 일본군은 계속 폭격을 하여 그들이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도록 만들었고, 오직 마음의 위안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천주교 성당 뿐이었습니다. 이 한 달 동안, 천즈시우는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되었고, 그녀가 나중에 창슈홍을 떠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당시, 천즈시우는 성당에서 마음을 기탁하여 안정을 찾았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일정 시간이 흐른 후, 창슈홍이 충칭으로 자리를 옮기자, 일가족은 잠시 생활고를 벗어나게 되었지만, 창슈홍은 여전히 그가 그리워하는 둔황을 놓지 못했습니다.

 

 

천즈시우는 그냥 이렇게 정착하여 더이상 그가 일을 어렵게 만들지 말기를 바랐지만, 창슈홍은 아내가 자신의 일을 지지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충칭에 온 뒤 이듬해, 국립둔황예술연구소가 설립되었고, 절친한 친구인 쉬페이훙(徐悲鸿)과 량쓰청(梁思成)의 강력한 추천으로 창슈홍이 연구소의 부소장이 되었습니다.

 

 

창슈홍은 아내가 동의하지 않을 것을 알고 처음엔 숨기려고 했지만, 충칭신문에서 이를 공개적으로 보도했고, 딸 샤나는 이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집안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천즈시우는 "샤나는 학교에 가야해요, 자링(嘉陵)도 막 태어났는데, 이제 막 안정되려나 하니까 또 일을 벌인다고요. 당신이나 가요, 난 안 갈거니까."

 

 

이때 창슈홍은 아내를 달래기보다는 오히려 퉁명스럽게 "당신이 안 가면 내가 먼저 가 있겠소." 라고 말했습니다.

 

 

 

 

 

1943년 음력 설이 막 지났을 때, 창슈홍은 다섯 명의 멤버들을 데리고 둔황으로 향했는데, 그는 아내의 실망감을 돌아볼 겨를도 없었습니다.

 

 

혹자가 말하길, 줄곧 둔황만 바라보던 그의 마음은 천즈시우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는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합니다.

 

 

둔황의 일이 그렇게 질서정연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자, 창슈홍은 처자식을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되었고, 한 통의 편지를 써서 충칭에 있는 집으로 보냈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그리움을 이야기하고, 막고굴(莫高窟)의 벽화 예술을 묘사하며, 그는 천즈시우도 분명 이곳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천주교 신자였다는 것을 그는 잊고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일까요?

 

 

남편을 위해 천즈시우는 다시 한번 타협을 하고, 아들 딸을 데리고 억울한 마음을 안고 왔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입에서 나오는 둔황을 보았고, 황사가 가득한 하늘을 보았으며, 곳곳이 먼지 투성이가 된 것을 보았습니다.

 

 

 

 

 

 

창슈홍은 가족을 중쓰(中寺)의 한 흙집에 거주하게 하였고, 천즈시우는 내키지 않았지만 방을 깨끗하게 치웠습니다.

 

 

처음 이곳에 온 천즈시우는 주위 환경과 어울리지 않게 면으로 된 치파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고집스럽게 프랑스의 생활 습관을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고향 친구들은 이렇게 눈썹을 그리고 립스틱을 바른 곱슬머리 여인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남편 창슈홍은 아내에게 "여기에선 여기에 맞게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말했고, 천즈시우는 "난 평생을 이렇게 살 거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치장을 결정할 수 있는 것 외에 그녀는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요?

그녀는 남편을 위해 줄곧 타협을 계속 해왔고, 치장하는 것은 그녀의 마지막 고집이었습니다.

 

 

창슈홍 서법

 

 

편지에서 말했던 것처럼, 창슈홍은 천즈시우를 데리고 막고굴 안으로 들어갔고, 조형물을 사랑하는 그녀 역시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격려에 따라 다시 조각칼을 들고 재기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잊고 있었던 것은, 천즈시우가 독실한 천주교인이라 둔황 예술과는 절대로 정을 쌓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남편에게 이곳을 떠나자고 권유하기도 하였지만, 창슈홍은 자기는 죽어도 이곳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세상은 창슈홍을 둔황의 수호신으로 치켜세웠지만, 그는 19세에 사랑에 빠졌던 아내 천즈시우를 잃었습니다.

 

 

 

둔황벽화

 

 

그는 죽어도 이곳에서 죽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천주교인으로서 천즈시우는 완전히 둔황 예술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파리 16구의 살롱 여주인으로서 그녀는 중국 시베이(西北)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습니다.

 

 

여름에는 읍내에 나가서 구입한 소고기, 양고기나 두부를 가축의 등에 싣고 집에 돌아가면 이미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겨울에 이곳에는 난로가 없었는데, 천즈시우는 온돌방에서 자는게 적응되지 않아 밤에는 찬 이불을 덮고 잤고, 아침에 일어나면 코에 온통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위생을 위해, 매끼 국수에 소금, 고추, 식초를 뿌리고, 절인 부추를 오랜 시간 먹어왔고, 심지어는 젓가락이 없을 때는 버들가지로 국수를 집어 먹었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생활 격차 때문에 천즈시우는 오랫동안 적응하지 못했지만, 창슈홍은 아내의 이런 꺼림과 내키지 않아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2년 뒤에도 아내가 자신을 버리고 떠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죠.

 

 

 

창샤나(常沙娜)

 

 

 

둔황에서는 예전보다 생활은 훨씬 안정되었지만, 생활에서 스트레스는 더욱 많이 쌓였습니다. 예전에는 천즈시우 혼자만의 불평이 많았지만, 지금은 두 사람 모두 불만이 많아지게 되었지요.

 

 

손에 쥐는 연구비가 부족하고, 스트레스는 창슈홍의 정서를 거칠고 급하게 만들었고, 그들 모두 생활에 시달리다 보니 더 이상 예전처럼 서로를 존경하고 함께하는 것이 없어지고, 대신 끝도 없이 계속된다고 말하며 말다툼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말다툼은 손찌검으로 발전하여 창슈홍은 늘 병을 들고 부숴버렸고, 천즈시우는 할 수 없이 그의 안경을 빼앗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창슈홍이 근시안이었기 때문에 맞지 않으려면 안경을 빼앗아버려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이로써 모범적인 부부는 완전히 화목하지 못한 부부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나 두 사람의 감정을 깨뜨렸고, 그들이 함께 했던 여정을 1945년까지로 못박게 되었습니다.

 

 

 

창슈홍과 아들 자링, 딸 샤나

 

 

 

1945년 초, 국립둔황예술연구소에 새로 총무주임이 부임해왔습니다.

 

 

고향 친구라서 천즈시우는 그와 가깝게 지냈고, 동시에 남편과는 점점 더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둔황의 일에 빠져 있어서 창슈홍은 아내의 감정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4월 어느날, 천즈시우는 부인병이 있어서 란저우에 가서 치료를 받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창슈홍은 바쁜 업무 때문에 아내와 함께 가줄 수가 없었고, 아내에게 "샤나보고 함께 가달라고 할까?"라며 물었습니다.

 

 

천즈시우는 "아뇨, 혼자 다녀올게요."라고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창슈홍은 아내가 돌아올 때쯤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학생 둥시원(董希文)이 중도에서 탈취한 편지를 가져와 내밀었고, 그제서야 그녀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샤나

 

 

만약 그때 창슈홍이 "내가 같이 가줄게."라고 했다면 천즈시우는 떠났을까요?

 

 

심지어 천즈시우가 도망간 지 며칠이 지난 후에야 창슈홍은 한 통의 편지를 보았고, 그제서야 아내가 쟈오중칭(赵忠清)과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창슈홍은 미칠듯이 쟈오중칭의 사냥용 말을 타고 밤새도록 질주하며 아내를 찾아다녔고, 모든 역이나 여관마다 사람들을 만나면 "혹시 예쁜 여자 한 명 못 봤어요?"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천즈시우는 창슈홍의 인생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이 둔황과 떨어질 수 없다고 말했으니, 그렇다면 내가 독하게 당신의 마음 속에서 떠나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말년에야 천즈시우는 "한번 큰 실수를 한 것이 천고의 한이 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1978년 6월 2일, 창슈홍이 막고굴 제103굴에서 벽화를 모사하는 중

 

 

 

창슈홍은 아내에 대한 원망을 안고 삶의 본 궤도에 오르려고 애썼고, 그동안 아들 자링은 매일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었으며, 14살 난 딸 샤나는 아빠와 동생을 돌보는 짐을 묵묵히 떠맡았습니다.

 

 

20년 동안 사랑을 키워왔던 부부가 남남이 된 후로, 그는 다시는 '천즈시우'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창슈홍은 자신의 학생이었던 리청셴(李承仙)과 결혼하여 다시 가정을 꾸리게 되었고, 리청셴은 창슈홍의 전처가 게재한 이혼 성명이 5호자체(五号字体)라는 것을 알고, 스스로 주장하여 4호자체(四号字体)로 결혼 소식을 신문에 발표하였습니다.

 

 

그들은 후세 사람들의 눈에 사심없이 헌신하는 둔황 부부가 되었으며, 그들의 생활과 일에도 둔황이 가득하였습니다.

 

 

샤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둔황에서 벽화를 모사하였기 때문에, 온 가족은 화기애애하게 지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인연이 닿아 천즈시우를 만나게 된 샤나는 아연실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창슈홍과 리청셴

 

 

그때는 1964년이었는데, 천즈시우가 가정을 버리고 떠난 지 꼭 19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유학을 다녀온 샤나는 학생들을 데리고 아버지의 고향인 항저우로 사생하러 갔는데, 큰아버지가 그녀에게 "너희 엄마좀 만나볼래?"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14살에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딸은 자신은 버렸던 엄마에 대해 감정이 늘 복잡했지만, 그래도 만나기로 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홀쭉한 노부인을 본 샤나는 멍해져서 눈앞에 있는 온갖 고생을 겪은 노인과 예전의 멋쟁이인데다 화장을 좋아했던 어머니와 연결시킬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둔황을 떠난 천즈시우는 잘 지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창슈홍과 딸 샤나

 

 

아들과 딸을 버리고 호강하러 간 줄 알았지만, 그녀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모녀가 만나고, 그동안의 애증을 풀었다고 하는데요, 천즈시우는 반복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고된 삶을 살았다, 하늘이 내 죄에 이미 벌을 주었다."

 

 

당시 쟈오중칭을 따라 항저우로 건너가 정착한 천즈시우는 얼마 후 신분 문제로 투옥되어 감옥 살이를 한 뒤, 다시 한 노동자에게 시집와 아들을 하나 낳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미술 교사로 일하다가 과거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교단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하인으로 일하고, 노점상을 하며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딸 샤나만 그녀를 계속해서 도와주었습니다.

 

 

그녀가 그리던 파리 생활은 그렇게 짧은 몇 년 뿐이었습니다.

 

 

1979년, 천즈시우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의 고난의 생애도 끝이 났습니다.

 

 

말년의 창슈홍

 

 

이 일을 돌이켜보면, 세상 사람들은 천즈시우가 몰인정하고, 천즈시우는 고난을 감내하지 못한다거나 혹은 창슈홍이 남편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내를 홀대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말년의 창슈홍은 전처 천즈시우를 언급하며 "원망하고 나니 내 가슴에 다시 와 닿는 자기 비판이 느껴졌다. 그렇다! 난 과거에 그녀의 마음이 어땠는지를 중요하기 생각하지 않았다."

 

 

가정과 일 앞에서 창슈홍은 더 이상 천즈시우를 찾지 않고 일을 택했습니다.

 

 

어쩌면 이 결혼에서 손을 놓았던 사람은 천즈시우 뿐만이 아닐지도 모르지요.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8965667857184759788%22%7D&n_type=-1&p_fro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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