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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라오의 막내 여종업원으로 시작하여 부사장의 자리에 오른 양리쥐안(杨丽娟)의 인생 스토리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한때 묵묵히 종업원 아르바이트를 하며 빚을 갚던 쓰촨성에서 온 막내가 하이디라오의 최고 운영관리자로 변신한 것은 거짓이 아니고, 과감하게 해낸 용기있는 실화라고 합니다.
하이디라오(海底捞)는 현재 중국에서 이미 하나의 인기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꼼꼼한 서비스와 다양한 종류의 요리를 제공하는 이곳은 창업자 장융(张勇)이 맨손으로 시작해서 일구어낸 체인 음식점입니다. 장융은 하이디라오로 중국 부자 순위 50위 안에 진입하였는데, 이 사실만으로도 하이디라오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이디라오가 성공한 데에는 장융을 따라다니며 최선을 다하는 유능한 직원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중국 최고의 종업원'으로 불리는 양리쥐안(杨丽娟)입니다. 그녀는 접시를 들고 나르고, 그릇을 씻던 시골출신 막내 종업원부터 시작하여, 나중에는 30억 위안의 몸값을 기록하는 COO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렇게 되기까지 장융이 그녀를 발탁한 것 외에도 그녀 스스로가 자신을 믿었던 것이 더욱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기사에서는 양리쥐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요,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귀인이 서로 돕다
쓰촨 사람들은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담하게 노력한다고 합니다. 그들의 성격은 마치 쓰촨의 특색있는 요리인 훠궈(火锅)처럼 열정적이지요. 하이디라오의 특제 요리는 바로 훠궈인데요, 첫번째 하이디라오 가게는 쓰촨의 젠양(简阳)에서 오픈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마침 양리쥐안은 쓰촨성 젠양에서 일하러 온 아르바이트생이었죠.
쓰촨 젠양의 작은 마을에서 온 양리쥐안은 그 나이대 아이들처럼 고향에 남아 농사를 짓고 싶어하지 않았고, 외지로 나가 세계를 개척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녀의 두 오빠는 이렇게 고향 밖으로 나가 장사를 했지만, 장사를 하는 것도 매우 위험이 큰 일이었습니다.
문화도 없고, 견식도 없는 상황에서는 성공할 수 있는 사람도 몇 명 없습니다. 그들 역시 결국엔 당연히 실패하고 많은 빚을 졌습니다. 빚쟁이들은 늘 찾아왔지만, 돈을 벌고 빚을 갚을 방법이 없었고, 17세의 양리쥐안도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중학교를 중퇴한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도시로 나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는데요, 다행히도 양리쥐안은 총명하고 영리해서 곧 작은 식당을 하나 찾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부지런하고 또 열심히 일하며, 반응 속도도 매우 빠른 종업원이었습니다.
종업원의 평균 월급이 한 달에 80위안이던 때, 그녀는 120위안을 받을 수 있었는데, 힘든 일도 견디고 열심히 노력한 것도 성공 요인으로 꼽힙니다.
당시 젠양에서 하이디라오를 개처한 장융은 주위의 음식점들을 다니며 시장조사를 하며 모두의 식당 경영과 시장 환경을 살피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양리쥐안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었는데, 그는 이 어린 아가씨가 손발이 부지런하고 일을 잘 하는 것을 발견하였고, 자신의 가게로 스카우트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녀의 월급 상황을 물어보니, 그녀의 월급이 평균 월급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장융은 이 아가씨가 인재라는 생각에 자신이 직접 한 달에 160위안을 줄 테니 자신의 가게로 와 달라고 말하고 연락처까지 남겼지만, 이때 양리쥐안은 완곡히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여러가지 일로 양리쥐안이 있던 식당이 철거되었고, 사장도 직원들을 내보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양리쥐안은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가게에 밥을 먹으러 왔던 장융이 생각이 나서 그녀는 장융의 가게로 찾아가 사람이 필요하냐고 물었고, 장융은 곧바로 오케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양리쥐안은 하이디라오의 첫번째 여종업원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환경으로 와 종업원으로 일하게 된 양리쥐안은 여전히 열심히 일하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장융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장융은 그녀의 인생의 귀인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장융이 양리쥐안에게 스스로 가게를 운영하게 시키자, 양리쥐안은 너무 힘들어서 혼자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하려고 했지만, 장융은 큰오빠처럼 그녀를 도와주고 성장시켜주었습니다.
꾸준히 공부하다
하이디라오가 일반 훠궈 집과 다른 것은 바로, 테이블 위로 올리고 내릴 수 있는 훠궈 외에도 하이디라오 직원들이 제공하는 최고의 서비스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하이디라오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려면 최상의 서비스 자세를 가져야 하고, 손님이 들어오기 전부터 서비스를 시작해야 하며,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가장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제공해야 합니다.
양리쥐안이 말하길, 당시 그들은 거의 모두 종종걸음으로 다녔고, 템포가 매우 빠르고, 조금이라도 느리면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장이 종업원들에게 손님에게 어떻게 관심을 가지고 만족하게 할 수 있는지 특별히 가르쳐주었는데, 당시 그녀가 가장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왜 종업원이 매일 하루의 좋고 나쁨을 반추하는 총결산 기록을 남기는지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양리쥐안이 이전에는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지요. 게다가 어떤 종업원들은 컴퓨터나 운전면허 등 식당에서 그다지 쓸모가 없어 보이는 스킬을 배우게 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양리쥐안은 사장이 이렇게 말한 이상, 반드시 그것에 나름대로의 이유와 좋은 점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직원들이 이런 규제에 시큰둥하고 무관심할 때 양리쥐안은 혼자서 열심히 따르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그녀가 두각을 나타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종 하나였습니다. 바로 열심히 공부를 한 것이었지요. 그녀는 시간이 있으면 신화서점(新华书店)에 가서 책을 읽었고, 또한 돈을 모아 컴퓨터를 사고, 타자 공부를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월급을 받으면 맛있는 것을 먹고 새 옷을 사며 스스로를 위했지만, 양리쥐안은 늘 고향 집으로 월급의 일부를 보낸 후 남은 돈으로는 자기계발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반년 만에 매우 빠르게 승진하게 된 그녀는 마침내 홀 매니저 자리를 꿰차게 되었습니다.
이후 장융은 시장을 개척하고 경영 규모를 키우겠다며, 하이디라오 제 2호점을 냈습니다. 그는 새 가게를 차릴 때, 마음놓고 양리쥐안에게 1호점을 맡겼습니다. 그 때의 양리쥐안은 19살에 불과했고,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일을 함에 있어서 늘 일사불란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업원들이 그녀가 가게를 맡게 되었을때 그녀를 신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가게를 관리하려면 어떻게 이윤을 남겨야 하는지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직원들을 단결시키고 그들에게 최고의 리더십을 보이는 방법을 알아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역시 양리쥐안이 하이디라오에서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배운 것이었죠.
일에 부딪혀 가로막히게 되다
하이디라오의 창업자인 장융은 하이디라오가 비록 쓰촨 스타일의 맛이긴 하지만, 항상 쓰촨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1999년, 하이디라오를 시안(西安)에 진출시켰습니다. 그리고 시안 분점의 점장을 양리쥐안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쓰촨성에서 한 번도 나와본 적이 없는 양리쥐안이 갑자기 낯선 곳에서 점장으로 일하게 된 것은 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장융은 그녀에게 마음 편히 대담하게 일하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양리쥐안은 그동안 먹고 자며 가게에만 머물렀고, 오직 이 가게를 잘 꾸려나가야 겠다고 마음먹으며 장융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가게가 오픈한 뒤 처음엔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몇 명 있었지만, 점점 사람들이 호기심을 잃으면서 찾는 사람이 많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급해진 양리쥐안은 직접 나서서 고객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먼저 직원들을 데리고 다니며 홍보하고 광고를 했지만, 얼마 안 돼 도시 단속반의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사업자등록증을 압수하려는 도시 관리(城管)측에 양리쥐안은 울며 겨자먹기로 그들에게 어려운 사정을 읍소했고, 도시 관리 측에선 그녀의 성실한 태도를 보며 구두로 교육만 한 끝에 결국 양리쥐안에게 사업자등록증을 돌려주었습니다. 양리쥐안 역시 비교적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데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도시 관리측으로부터 사업자등록증을 돌려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안점을 운영하면서 이런 곤란한 일을 겪은 적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술에 취한 남자 손님 몇 명이 가게에서 난동을 부리고, 가게의 여자 종업원들을 때렸습니다. 몇몇 남자 종업원들은 다른 종업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과 싸웠습니다.
일이 끝난 후, 이 남자 고객들은 건장한 체격의 사람들 60여 명의 손에 몽둥이를 들게하고 찾아왔는데요, "사람을 때렸으면 돈을 물어줘야지! 돈을 물어내지 못하면 가게를 때려부순다!" 라며 소리쳤다고 합니다. 이 광경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 만큼이나 공포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양리쥐안은 20대 초반의 아가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앞으로 나서서 모든 직원들을 불러들여 그들과 대치했습니다. 보통은 이렇게 억지를 부리며 횡포하는 사람들을 무서워하기 마련이지만, 이 사나이들은 오히려 상대방의 태도가 이렇게 강경해지자 잠시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도 양리쥐안은 제때에 경찰에 신고를 했고, 경찰도 빠르게 도착했습니다. 경찰이 이들에게 자세한 상황을 물었고, 양리쥐안에게 누가 책임자냐고 묻자, 양리쥐안은 두려움 없이 사장님은 쓰촨에 계시고, 시안점은 자신의 관할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돌진하는 이 힘은 정말 어린 아가씨답지 않았지만, 이러한 기세로 그녀는 하이디라오 시안점의 큰 깃발을 짊어지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 이후, 장융은 자신이 사람을 제대로 뽑았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양리쥐안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 더 중요한 자리를 맡겼고, 이후 30세의 양리쥐안은 하이디라오의 유일한 부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녀 역시 기대에 부응하며 하이디라오를 계속 키워나갔고, 나중에 모든 매장을 관리하며 운영하게 될 때는, 그녀는 이제 국외로 하이디라오를 내놓고 더 넓은 국제 시장을 누비게 되었습니다. 하이디라오가 상장된 후, 그녀는 최초 발행주식을 직접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가치가 30억 위안에 이르렀을 때 그녀의 나이는 40세가 되었습니다.
양리쥐안의 성공은 아마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비록 장융이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사실은 그녀 스스로가 끊임없이 노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기꺼이 발전할 생각과 행동을 배웠고, 무슨 일이 생겼을 때도 당황하지 않고 용감하게 덤벼들려는 열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탕이 되어 모두 그녀가 평범함을 벗어나 성공을 거두게 된 비결이 된 것이겠지요.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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