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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민국 시기 3명의 재능있는 여성들의 공통점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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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민국 시기 3명의 재능있는 여성들의 공통점은?

hanyuku 2021. 8. 9.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한 사람의 진정한 의미의 성공은 평생을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며, 남녀를 막론하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명예와 이익을 쫓는 것보다 더욱 낫다는 것 역시 많은 장수자들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중화민국 시대에 학자들 뿐만 아니라, 재능있는 여성들은 새로운 사조가 중국에 유입되었을때, 전통적인 예법과 도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왔고, 그 사람들의 인생 태도는 오늘날에도 한물 갔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늘 살펴볼 기사에서 소개된 이 전설적인 3명의 민국여성은 100년의 세월을 보내며 장수했다는데요, 이들에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부귀화 황후이란(富贵花黄蕙兰)

 

 

황후이란은 진정한 부귀화라고 합니다. 1893년,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난 그녀는 화교 '설탕왕' 황중한(黄仲涵)의 딸로,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보배였습니다. 그녀가 3살도 안 되었을 때, 그녀의 부모님은 딸의 생일선물로 80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주었지만, 황후이란은 그것을 별로 가지고다니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늘 새것에 둘러싸여 자라던 그녀에게 다이아몬드란 쌀알처럼 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부귀영화속에서 자란 황후이란의 가장 큰 특징은 패션의 선두를 달렸다는 것입니다. 1920~40년대, 중국 패션의 최고 여성으로 인정받았던 것은 쑹메이링(宋美龄)이 아닌, 황후이란이었다고 하는데요, 그녀는 중국의 전통 복식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렸고, 그녀가 미국, 유럽 상류 사회에서 활약할 때, 유명한 모나코 왕비, 마리왕후, 트루먼 아내 등 유명 인사들이 그녀의 패션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201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된 1932년식 중국 치파오는 디올 등 서양 디자이너 작푸과 함께 화려함을 다투는 한 벌의 의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황후이란이 그해 박물관에 기증한 선물이라고 하네요.

 

 

 

 

 

 

부귀화 황후이란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부족했던 점은, 유명한 외교관이었던 구웨이쥔(顾维钧)과의 결혼이 남의 개입으로 인해 깨졌던 것뿐이라고 합니다. 1920년 두 사람이 결혼할 때, 이미 3번째 결혼인데다 자식까지 있었던 구웨이쥔은 황후이란을 아내로 맞이하며 자신의 외교 인생에 재력을 보태려고 했고, 황후이란의 집안 역시 구웨이쥔의 신분을 빌려 가족을 위해 길을 터주려고 했습니다.

 

 

이런 "강력한 연합" 목적의 결혼은 시간이 흐를수록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는데요, 구웨이쥔은 처가의 재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 내 지위를 보면, 당신이 차고 다니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보석들은 척 봐도 내가 준게 아닌걸 알 수 있다. 내가 당신에게 사준 장신구 말고는 당신이 아무것도 안 하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구웨이쥔은 당시 남성으로서 자존심이 상했던 것입니다. 황후이란은 전통적인 여성도 아닌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고, 남편인 구웨이쥔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였으며, 더군다나 그녀는 엄청난 돈을 들여 구웨이쥔의 외교 외관(外交门面)을 꾸몄습니다. 구웨이쥔은 그런 그녀를 통제할 수 없었죠.

 

 

 

 

 

 

구웨이쥔 말년에 그는 '마작 파트너'였던 옌요우윈(严幼韵)과 정분이 났고, 황후이란은 이를 돌이킬 방법이 없어 결국 36년간의 결혼 생활은 끝이 나버렸습니다. 그 후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 홀로 지내다 1993년에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랑의 꽃 옌요우윈(严幼韵)

 

 

옌요우윈은 황후이란과 "연적"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황후이란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꽤 아량을 베풀어 그녀의 이름을 거론하진 않고 욕을 했다고 합니다. 황후이란이 본래 대가족에서 자라나 기개가 있었기도 하였지만, 옌요우윈 자체도 남자에게 빌붙어 자신의 지위를 바꾸려는 속물도 아니었다고 하네요. 옌요우윈은 그 자체로도 명문가 규수였으며, 황후이란보다 12살이 어렸고, 그녀의 할아버지는 중국에서 근대 "영파상방(宁波商帮)"의 거두였다고 합니다.

 

 

옌요우윈 역시 부귀영화 속에서 자랐지만, 황후이란만큼 패션에 소질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어려움에도 태연하게 임하는 굳은 심경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옌요우윈은 푸단(复旦, 지금의 푸단대)에서 첫번째로 모집한 여학생들 중 하나로, 그 당시 감히 차를 몰고 학교에 등교하던 학생이었고, 남학생들에게 "사랑의 꽃(爱的花)"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녀의 첫번째 결혼도 외교관과의 결혼이라는 점이 흥미로운 점이라고 하네요.

 

 

 

 

 

1929년, 24세의 옌요우윈은 젊고 유능한 외교관인 양광셩(杨光泩)과 결혼하면서 전 상하이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13년 후, 양광셩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희생했고, 옌요우윈은 홀로 딸 셋을 키우느라 매우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부유하게 살던 대갓집 규수는 비누 만드는 일까지 배우기 시작했고, 40년대 옌요우윈은 유창했던 영어 실력 덕분에 유엔에서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남편과의 관계로 인해 옌요우윈과 구웨이쥔은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던 사이였는데, 미국에서 있을때, 구웨이쥔과 부인 황후이란 사이에선 감정에 문제가 생겼고, 옌요우윈과 구웨이쥔은 오히려 점점 더 감정이 생겨났습니다. 그 때문에 구웽쥔은 황후이란과 이혼한 지 3년 만에 옌요우윈과 결혼했는데, 옌요우윈은 전통 여성의 어질고 지혜로운 모습으로 구웨이쥔의 말년을 살뜰히 보살폈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구웨이쥔은 98세까지 장수했는데요, 그것은 모두 옌요우윈의 공로가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옌요우윈은 아름다움을 사랑했고, 그보다 더 삶을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100세가 되어서도 립스틱을 바르고 치파오를 입었으며, 하이힐을 신고 의사와 춤을 추기도 하였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장수의 비결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을 꼽았습니다. 그녀는 황후이란보다 더 오래 살았고 112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녀화 장총허(才女花张充和)

 

 

민국에는 재능있는 여인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린후이인(林徽因)인데, 그에 비해 장총허는 그리 유명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재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션총원(沈从文)의 처제였던 장총허의 중화민국 친구들에는 량스추, 후스즈, 장스쟈오, 장다첸, 션인모, 벤즈린, 진웨린, 천인커(梁实秋、胡适之、章士钊、张大千、沈尹默、卞之琳、金岳霖、陈寅恪) 등과 같은 적지 않은 유명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장총허는 민국 시기에 "허페이 4자매"의 여동생으로, 중국 역사상 유명한 재녀(才女)였던 차이원시(蔡文姬)와 리칭쟈오(李清照)와 비교되기도 합니다. 그녀의 증조할아버지는 청나라 말기 명신 장수성(张树声)이었는데, 1914년 장총허가 태어났을때, 장씨 집안은 이미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교육 위주로 전향했으며, 장총허는 이러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 고서를 두루 읽었고, 베이징대학 입시에서 국문 만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장총허는 서화에 능통하고, 곤곡 연출에도 조예가 높아 장다첸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시사가부, 문사예악(诗词歌赋、文史礼乐)은 그녀에게 모두 식은 죽 먹기였다고 합니다. 민국 시기에 교육부에 몸담았던 그녀는 황후이란과 옌요우윈에 비해 부귀에 물들지 않으면서도 가지 끝에 하얀 눈처럼 향기롭고 고상한 목련화같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외면보다는 내면을 더욱 개발하여 개인의 가치 실현과 인격의 독립을 추구하였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장총허는 이미 구순의 고령에도 여전히 생활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콩을 심고 꽃을 가꾸며, 개인전을 열고, 계속 곤곡을 불렀습니다. 중국 곤곡은 유네스코의 '인류 구두와 무형 유산 대표작'으로 지정되었는데, 그녀가 길러낸 제자들의 공헌이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그녀는 "민국의 마지막 재녀"로 불렸지만, 이러한 찬사에 대해 장총허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평생을 놀이였다고 했는데요, 94세에 암이 발견되었을 때도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려면 아무래도 무슨 병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합니다. 2015년 장총허는 미국에서 102세로 별세했습니다.

 

 

 

맺음말

 

 

각기 다른 경험을 가진 민국 시대의 이 세 여인의 공통점은 자유로운 마음과 삶에 대한 사랑, 그리고 유한한 삶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았던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 혹은 어딘가에 의존하기 보단 자신만의 삶의 멋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사랑이 유일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보며 그녀들의 이야기에서 더욱 많은 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100여년 전의 민국 시대 여성의 이야기지만, 현대 여성들에게도 본받을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8235155617160811115%22%7D&n_type=-1&p_fro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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