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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아이링(张爱玲) 소설 <소수(少帅)>의 남주인공은 실존 인물?! 장쉐량(张学良)의 인생스토리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의 소설가 장아이링(张爱玲)은 군벌 혼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소수와 쓰샤오졔(四小姐)의 환상같고 희망이 없는 빛바랜 사랑 이야기를 그린 <소수(少帅)>라는 소설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비록 주인공의 실제 본명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눈치 빠른 분들이라면 이 소설의 '소수(少帅)'는 바로 장쉐량(张学良)이라는 것을 눈치채셨을 것입니다.
장쉐량의 일생은 한 편의 드라마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군벌의 큰 권력을 거머쥔 것부터 시작해서 나중엔 감금된 것까지, 그리고 말년에는 미국에서 노년을 보낸 그의 일생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많았지만, 그는 말년에 미국에서 100세 때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하며 단순하고 온화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본토행이 막히고, 미국에 정착할 것을 강요당하다
"9.18 사태"가 터진 후, 중국과 일본은 갈등 상태에 빠져 물과 불처럼 반목하던 상황이었고, 일본군이 맹위를 떨치던 30년대에 장쉐량은 장제스(蒋介石)에 의해 "토벌단"의 총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매번 "토벌"을 하러 떠날 때마다 장쉐량은 장제스가 홍군의 손을 빌려 동베이군(东北军)을 제거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중공 지도자들과의 접촉에서 장쉐량은 "외세에 맞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라"는 인식을 심화시키게 되었으나, 장제스는 다시 한번 공산당과 함께 항일에 실패할 것을 거듭 권유하였습니다. 그 후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과 양후청(杨虎城)은 함께그 유명한 '시안 사건(西安事变)'을 일으켜 장제스를 몰아붙였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항일 전쟁에 큰 도움이 되었고, 그의 일생에도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시안 사건 이후, 장쉐량은 장제스의 고향인 펑화 시커우(奉化溪口)에서 10여 년 동안 '통제'를 당하며 여러 곳을 전전했지만,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장쉐량이 자유를 얻지 못하고 가택연금 되어있는 기간 내내 홍안지기(红颜知己)인 쟈오쓰샤오졔(赵四小姐)의 곁에서 함께 지내며 기거했습니다.
1946년, 대만으로 끌려간 장쉐량은 죽을 때까지 조국을 다시 밟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장쉐량은 본토로 돌아가려 했지만, 항상 누군가가 방해를 했고, 결국 대만에도 본토에도 그의 몸을 둘 곳이 없어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살게 되었습니다.
대만에 가서도 그는 여전히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는데, 1988년 장징궈(蒋经国)가 사망한 후, 장쉐량도 신체의 자유를 되찾고 중국행을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1991년 춘제(春节)를 앞두고, 장쉐량은 옛 친구인 왕지(王冀)에게 전화를 걸어 살아 생전에 본토로 돌아가보고 싶다고 말하자, 중국의 지도자들이 그를 반겨줄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심하라고 하였습니다. 1956년 전국정협에서 열린 시안 사건 20주년 기념일 때 장쉐량을 중화민족의 '천고공신(千古功臣)'으로 부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친구의 위로에 마음을 다잡고, 장쉐량은 조국으로 돌아가는 일에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장쉐량이 자유를 되찾은 것은 리덩후이(李登辉)가 정권을 잡은 것 덕분이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 속에는 리덩후이에 대한 고마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장쉐량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자신의 자유를 되찾게 해 준 은인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귀국행을 가로막은 것이었습니다.
장쉐량의 부탁을 받은 왕지는 친분을 바탕으로 중국의 대만 담당 부서와 빠르게 연락을 취했고, 중국 측에서는 장쉐량을 환영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장쉐량은 마침내 자신의 귀국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했다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리덩후이가 그에게 한 통의 전화를 걸어 그가 "총통부(总统府)"임을 듣게 했습니다. 리덩후이는 본토에서 보내는 초청장을 들고는 장쉐량에게 "내가 당신을 얼마나 신임했는데, 당신이 어떻게 뒤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시안 사건이나 타이베이 사건을 더 하겠다는 것인가?"라며 반문했습니다.
리덩후이가 장쉐량의 귀환을 반대한 것은, 시안 사건의 위력이 워낙 컸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장쉐량이 더 이상 중국 공산당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의 방해로 장쉐량은 귀국할 유일한 기회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대만 당국에서의 장쉐량에 대한 태도도 점차 묘해지면서 장쉐량은 대만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쟈오쓰샤오제와 함께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장쉐량이 왜 나중에라도 미국에서 중국 본토로 돌아오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추측하고 있는데요, 그가 고령으로 인해 장시간 여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부인 쟈오 씨의 병 때문에 함께 가지 못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빼고는 장쉐량은 미국에서 부인 쟈오 씨와 함께 마지막까지 안온한 인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장쉐량의 안온한 미국 생활
1964년, 장쉐량과 원래 부인 위펑즈(于凤至)는 이혼하였고, 그는 '쟈오쓰샤오제'인 쟈오이디(赵一荻)와의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1940년, 유방암 치료를 위해 위펑즈가 아이를 데리고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병이 나은 뒤 월가 주식 시장에서 목숨을 걸고 큰 부를 쌓았지만, 장쉐량은 미국으로 건너간 뒤 위펑즈와 아이들과 함께 살지 않고, 쟈오이디와 함께 하와이에 정착했습니다.
장쉐량과 쟈오이디는 하와이 와후섬의 한적한 곳에서 살았습니다. 이웃과 관리인들은 그를 '장선생'이라고 물렀는데, 관리자들의 말에 의하면 '장선생이 오기 전에 누군가 와서 말한 적이 있는데, 그는 특별한 인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함부로 그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하와이에서의 장쉐량의 생활은 매우 단순해서, 그곳의 누구도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신변상에도 그렇게 많은 족쇄가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휠체어를 타고 해변에 나가 햇볕과 맑은 공기를 만끽하고, 평소에도 카드 놀이를 즐겼으며 기독교인이라 교회에 가서 예배도 했습니다.
그러나 멀리 미국에서도 장쉐량은 여전히 사랑하는 경극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가 95세 생일을 맞았을 때, 그의 부하 옌바오항(阎宝航)의 딸 옌밍광(闫明光)과 장쉐선(张学森)의 장녀 장뤼헝(张闾蘅)은 관련 기관의 협조를 얻어 베이징 경극원의 유명한 경극배우 위쿠이즈(于魁智) 부부를 하와이로 초청하여 그의 생일 축하공연을 했습니다.
생일 잔치에서 위쿠이즈는 전통 경극 <상천대(上天台)>를 불렀고, 무대 아래에서는 이따금 갈채와 환호를 받았습니다. 서피산판(西皮散板)의 소리와 함께 장쉐량도 예전에 동베이에서 연극을 볼 때 의기양양했던 그 느낌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무대 아래에 앉아 있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음악에 맞춰 장단을 치더니, 흥에 겨워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 없이 <실가정>, <참마속> 그리고 <주렴채> (《失街亭》《斩马谡》和《珠帘寨》)의 대목을 불렀습니다.
장쉐량은 젊은 시절부터 경극을 좋아하긴 했으나, 경극은 그에게 있어서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안 사건 이후 기나긴 54년 동안 구금되어 있던 그의 생애 동안 경극은 장쉐량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몇 번이고 좋아하는 레퍼토리를 반복해서 듣고 다듬다가, 다시 한 번 읊조린 뒤 극중 사람들과 하나가 된 듯 희로애락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경극이 장쉐량에게 주는 것은 흥미 뿐만 아니라 오래된 친구와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하와이에 있을 때는 현지의 유명한 아마추어 중국 전통극 배우인 통위졔(仝玉洁)와 왕원쥐안(王文娟)이 장쉐량에게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는데, 이 자리에는 난징, 베이징에서 온 몇몇 배우들과 하와이 경극 애호가들을 초대해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처음에 장쉐량은 소파에 앉아서 조용히 좋은 차를 마시며 모두의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잠시 후 갑자기 일어서자 모두들 장쉐량이 화장실에 가려고 하는 줄 알고 와서 그를 부축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손사래를 치며 자신도 두 단락을 불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공성계>, <전태평>(《空城计》、《战太平》) 두 단락을 불른 뒤, <실공참(失空斩)>까지 전부 부르면서 극의 몰입도를 높였습니다. 조카의 말에 의하면, "우리 큰할아버지는 목청이 좋으시고, 노래 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노래를 잘 부르시지는 못하지만 가사는 모두 정확히 외우고 계셔서, 경극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고령으로 인해 장쉐량은 규칙적인 생활을 했는데요, 아침에 일어난 후 쟈오이디의 방에 가면, 부인이 그를 위해 성경 한 구절을 읽어주고, 그 후엔 아침 식사를 해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생우유를 마시고, 어떤 때는 귤 주스를 마시고, 달걀을 먹었는데, 자신의 비서가 그를 위해 읽어주는 중국과 외국의 신문을 들으며 국제 사건들을 이해했습니다.
가택에 연금된 수십 년 동안 장쉐량은 음식과 거주 문제는 모두 쟈오이디가 직접 손으로 마련한 것으로 해결했고, 평생 동안 옷은 손을 내밀어 입고, 밥이 오면 입을 벌리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하와이에 온 후에는 필리핀 가정부를 두어 쉽고 편한 나날을 지속했습니다.
장쉐량의 다섯째 동생 가족들은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으며, 비록 친자녀와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동생과 조카들이 곁을 지켰으니 말년에 그의 서운함을 풀어준 셈이라고 하였습니다.
뉴스를 다 듣고난 후, 조카가 그를 부축해서 건물 15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시멘트 길을 따라 해변까지 산책을 한 뒤에는 집으로 돌아와 지인들과 북적거리며 평온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장뤼헝(张闾蘅)은 "우리 큰할아버지는 평생 3가지를 좋아하셨는데, 첫번째는 마작이고, 두번째는 농담 하는 것이고, 세번째는 옛날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는데, 바로 경극 노래였다. 그분은 놀기만 하면, 피곤하지 않다고 하셨었다."
경극을 부르는 것 외에도 친구들과 어울려 카드놀이를 즐겼지만, 장쉐량은 말년이 되자 눈이 좋지 않아 카드의 글씨는 가까이 다가가야 볼 수 있었고, 조금 먼 것,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이 테이블 위에 놓은 카드는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쉐량은 촉감만으로 패를 쳤고, 그와 카드놀이를 할 때, 매번 한 장 한 장씩 그에게 패를 들려준 후에 했어야 했는데, 다행히도 장쉐량의 기억력이 아주 좋아서 비록 패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사람들이 한 번 불러주고 난 후에는 기억하였습니다. 하지만, 한 번에 자신을 포함해 네 명의 플레이어의 패를 기억하기엔 버거웠습니다.
비록 카드놀이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장쉐량은 이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였고,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이 한 세트를 버리고 열한 장의 카드만 치게 하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였습니다. 다른 규칙들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이렇게 카드를 기억하면 좀 더 간단했던 것이지요.
장쉐량이 카드놀이를 하면 십중팔구 이겼는데, 이 때문에 그는 젊었을 때 "본업에 종사하지 않았다"며 농담으로 스스로를 디스했다고 합니다. 장쉐량은 일찍이 카드놀이가 유익한 소일거리라고 말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카드놀이로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고 두뇌를 단련할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것을 항상 더욱 소중히 여기는 법이지요. 반 세기 이상 세상과 단절된 후 장쉐량은 생활에 더욱 애착을 가지고 매일 활기찬 일상을 살아가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하와이에 있을 때, 그는 자신이 90여 세의 노인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밝은 햇빛과 백사장이 있고, 항상 많은 사람들이 해변에서 활동하는데, 그는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했고, 작은 동물, 특히 작은 새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산업 소음과 오염이 없는 하와이에서는 아이들이 모래사장에서 마음껏 뛰어놀았는데,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청춘 시절로 되돌아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특히 젊은이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였는데, 한번은 조카딸이 자매들과 가라오케에 놀러가려고 하자, 장쉐량이 어린아이처럼 이곳에 관심을 가져서 조카딸이 그의 휠체어를 밀고 그를 데리고 갔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라오케의 노래 음악 소리가 너무 크고 시끄러웠기 때문에 쟈오이디가 장쉐량의 심장을 걱정하여 간신히 그만두게 하였다고 합니다.
병이나서 병원에 입원했어도, 장쉐량은 세계에 대한 탐색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간호사에게 부탁하여 그의 휠체어를 밀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는데, 마치 영원히 돌아다니며 보아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처럼 굴었고, 마침내 정말로 더이상 가볼 곳이 없게 되자, 사람들은 그를 밀어서 화장실에 가보게 하였다고 합니다.
조카뻘 되는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고 귀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대체 왜 그곳에 가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장쉐량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나는 화장실이 깨끗하지 않은지,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지 보러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쟈오이디는 옆에서 매번 이런 대화를 볼 때마다 함박웃음을 지었다고 합니다.
쟈오이디는 장쉐량에게 끝까지 마음을 쏟았고, 그녀도 마침내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2000년 6월 1일, 쟈오이디는 장쉐량과 함께 그의 마지막 생일을 보냈는데, 그것은 그의 100세 생일이기도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에게 있어서 백 살은 크게 축하할 만한 좋은 날이었지만, 반평생 구금되어 있던 장쉐량이 더욱 동경하는 것은 평온하고 따뜻한 생활로, 그는 잔치를 크게 차리는 것을 거절하고, 집에서 친지들만 초대했습니다.
백주년 생일 파티에서 장쉐량은 보통의 노인처럼 웃음을 머금고 자손들을 보며 모처럼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만년의 장쉐량은 그날 많은 사진을 남겼는데, 100세가 되어도 그의 강인함과 삶에 대한 애착은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평범한 행복
누군가 행복이 뭐냐고 묻는다면,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물 만난 물고기처럼 정치판을 누비며 공명을 떨치고 청사에 이름을 남기고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장쉐량에게 이 문제를 묻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평범함이야 말로 행복이다. 수십 년의 관리 사회의 부침을 겪고, 정치의 소용돌이에 사로잡혀 반 평생을 자유롭지 못한 생활을 했었지만, 보통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귀 권력도 그는 이미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하와이에서 지내는 것이야말로 장쉐량에게 가장 따뜻하고 평온하며 구속받지 않는 나날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건 다 필요 없이 그저 평범한 노인이 되어 꽃구경을 하고 천수를 누리는 일만 필요했었습니다.
그런 자유는 쉽게 오지 않고, 그런 행복역시도 쉽기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소수(少帅)"는 그저 과거일 뿐, 삶의 마지막 날 장쉐량은 비로소 그가 원하는대로 자유를 얻었습니다.
<참고기사>
张学良晚年:在美国过着简单而温馨的生活,时年100岁拍照!
张爱玲曾经创作过一部名叫《少帅》的小说,讲述了在军阀混战的大时代里,少帅和四小姐似真如幻、无望而亘古如斯的爱情。文中虽没有提及主角正名,但明眼人都能看出,此少帅就是张学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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