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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자연인 왕청송(王青松) 부부의 인생 스토리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의 전원파 시인 도연명(陶渊明)은 <도화원기(桃花源记)>에서 무릉도원 속의 자유로운 삶을 그려 자유롭고 행복한 것에 대한 동경을 전하였습니다. 1,600년 이후 이자칠(李子柒)의 등장은 도연명이 동경하던 삶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속세를 멀리하고 자연 속에서 인간의 근면함과 지혜로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움을 이룬 이자칠은 중국에서 각종 생활 기예 프로그램에도 나오고 중국 CCTV 등의 주류 언론에서 극찬을 받으며 중국의 옛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으로 불립니다.
이자칠은 결코 전원으로 들어간 첫 번째 주자는 아니고, 다만 특정한 시대적인 배경 하에서 그렇게 전원으로 들어간 것이 그녀를 온라인 상에서 핫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녀 이전에는 27년간 깊은 산 속에서 은둔했던 북경대 출신 부부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당시에는 사람들이 별로 좋게 보지 않았고, 자신들만이 그 선택이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알았다고 하네요. 그들은 바로 왕청송(王青松) 부부라고 합니다.
왕청송 인생의 빛나는 시기
하남 낙양 신안현(河南洛阳新安县) 출신인 왕청송은 1960~70년대에 훌륭한 학생이었습니다. 어쩌면 학습에 타고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그의 좋은 성적은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습니다.
당시 왕청송은 신양지위 기요국(信阳地委机要局)에 들어가 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의 경험은 그의 인생을 빛나는 탄탄대로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문장에 마침표 하나 없는 순수 고문(古文)은 그 내용과 문장에 나오는 한자를 끝까지 이해하고 숙지해야 하는데요, 이러한 작업을 위해 왕청송은 500여 개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일치시키는 연습을 했습니다.
매일 이런 훈련으로 기억력이 좋아진 왕청송은 기요국 간부 중의 한 사람이 되어, 북경대학에 지원하였고, 기요국에서의 훈련 덕분에 그는 어떤 시험도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습니다.
동료들은 그가 전공을 선택할 때 검찰에서 우리에게 이 일을 보고하러 오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들에게 보고하러 가는지를 살펴보고 결정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왕청송은 국정(国政)학과와 법률학과 사이에서 국정학과를 선택하였고, 그는 북경대 79학번 국정학과 학생이 되었습니다.
북경대에 들어갈 당시, 왕청송은 22세였는데요, 기요국 간부의 신분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는 당연하게도 단지서(团支书,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지부 서기의 준말)로 추대되었습니다.
깔끔한 머리와 양복차림, 가죽 구두에 진중한 걸음걸이에 이르기까지 왕청송은 학우들 사이에서 존경의 대상이었고, 간부 이미지에 그의 야무진 기질까지 더하여 마치 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스타처럼 여겨졌습니다.
북경대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뒤, 그는 83학번으로 법대에 들어갔는데요, 왕청송은 법대를 전공하면 취업이 더욱 쉽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무예를 익힌 왕청송은 고향이 하남 백마사(河南白马寺)와 가까웠기 때문에 그곳에서 편하게 무예를 익힐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북경대에서 공부하는 기간 동안 장자(庄子) 관련 저서를 즐겨 읽었고, 85년 양생(养生) 붐이 일자 아예 북경대에서 양생을 가르쳤으며, 학과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왕청송은 양생 수업에서 북경외국어대학을 갓 졸업한 장매(张梅)를 만났습니다.
장매는 왕청송의 기질에 이끌려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했습니다. 왕청송은 북경대 졸업 후 무난하게 교편을 잡았고, 장매도 북경대에 남아 외국어를 가르쳤는데, 이 부부는 미명호반(未名湖畔)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았습니다.
왕청송은 당시 강좌로 명예와 이익을 모두 거머쥐었고, 사랑도 쟁취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는 그의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빛나는 시기 이후 은거
하지만 삶의 기복은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법칙인 것 같습니다. 왕청송 역시도 이러한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었는데요, 1990년이 되자, 왕청송은 인생에서 더욱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려던 중 갑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발목을 잡히는 기분이었습니다.
왕청송은 북경대 탕일개(汤一介) 교수의 박사과정 시험에서 총점 1위로 합격했지만, 학교에는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법률학과로 전과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아내 역시도 5년 동안 교육을 하고도 강사로 뽑히지 못했고, 그들의 인생은 마치 발전이 정지된 것만 같았습니다.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장소에서의 탁한 기운에 양생대사(养生大师)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고, 언제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지는 마치 과욕을 부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들은 도시의 번잡한 곳에서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고, 1994년에는 하북과 북경 접경 지역의 산간 지역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당시는 1994년이었는데, 집에서 북경대까지 한번 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차로 5시간이 걸렸고, 1998년에 아내가 먼저 북경대의 일을 그만뒀습니다.
전원 생활로 돌아온 왕청송은 2년 뒤 북경대를 더났고, 그들은 20만 위안을 들여 2500묘(亩)의 황폐한 산을 50년간 임차하였습니다. 이것은 왕청송이 보기에는 매우 계획적이었고, 그때부터 그들은 철저히 전원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그야말로 무릉도원이었다고 합니다. 고요하고 한가하고, 온통 산 밖에 없는 이곳에서 왕청송 가족만이 살고 있었죠. 이것은 그들이 원하던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전기도 없고, 인터넷도 없는 환경에서 현대인은 하루도 버티기 힘든데, 그들은 십여 년을 살았습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기르는 이러한 전원 생활은 그들의 일상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곳은 그야말로 그들이 만든 세계였습니다. 순록색을 오염시키지 않고, 공기는 모두 지극히 깨끗하며, 유일한 오염은 지나가는 비행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열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물자를 운반하였으나, 이곳에서는 밤을 지낼 수 없었고, 쓰레기도 반드시 가지고 나와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이곳의 청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멀리 떨어진 강호(江湖)에 있는 평온
멀리 떨어진 강호에 있으면서도 왕청송 부부는 아이의 교육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아이 왕소우(王小宇) 역시 그들이 은둔하게 된 한 가지 원인이었습니다.
부부는 오랫동안 속세와 떨어져 살며 외적으로는 예전의 북경대 교사였던 모습을 떠올리기가 어렵게 변했는데요, 그의 아내도 오랫동안 화장품을 만져본 적이 없어서 농사꾼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겉모습에 숨겨진 엄청난 정신적 부의 최대 수혜자가 바로 그들의 아이였습니다.
왕소우는 북경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두 부모를 두었던 덕분에 도시 아이들 못지 않은 가정교육으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취미를 키워왔으며, 국학경전(国学经典)은 왕소우의 생활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과외 시간에 그는 양을 치며 생활 기법을 배우거나, 2500묘의 세계를 누립니다. 그는 각각의 양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한 사람이 백여 마리의 전체의 양떼를 관리하는 모습은 매우 노련해 보입니다.
또한, 모바일 게임을 접해본 적이 없는 그는 어떤 아이보다도 건강하고 안정감 있는 걸음걸이와 에너지를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점이 왕청송의 마음에 쏙 들었다고 합니다.
2011년, 왕소우는 이미 7살이 되었는데, 왕청송 역시 이미 27년 째 은둔하는 중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는 아이의 교육을 걱정하기 시작했는데요, 왜냐하면 아이가 산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고, 바깥 세상을 접하는 것은 라디오가 전부였기 때문에 어쩌다 외부인을 볼 때마다 매우 들뜬 모습을 보며 왕청송은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아이에게 사회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도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왕청송은 산에 들어가면서 소와 양, 생필품을 구매하는데 약 350만 위안을 썼고, 이는 그들이 모은 돈을 거의 탕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10명의 노동자를 고용해도 매년 30만 위안 안팎이 들어가는데, 수년 간 지출만 있고 수입이 없으니 경제적인 압박도 산을 나가게 되는 요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왕청송의 북경대 부자 동창은 그를 만나자, 이 사실을 알고 펑펑 울면서 그에게 돈을 주겠다고 하며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러나 왕청송의 눈에는 동창생이 높은 자리에 있다는 것이 압박감으로 느껴졌을 수 있지만, 외부인들이 보기엔 그의 내면적 부유함을 알아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찌되었든,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당사증(唐师曾)의 집은 왕청송이 도시로 복귀할 수 있는 창구가 되어주었고, 그는 인터넷을 통해 20여년 지기의 동창생들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인터넷이 신기하다는 감탄과 함께, 그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사회로 빨리 녹아들 수 있다는 결심을 했고, 3년이면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게다가 이번에 도시로 복귀하는 것은 앞으로 더 나은 은둔 생활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사회를 벗어나서 정말 잘 살수 있을까요? 왕청송은 비록 자유롭게 마음껏 살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가 추구하는 정신 세계를 물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합니다.
왕청송의 인생 스토리를 보며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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