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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배우 정샤오치우(郑少秋)의 아버지로서의 인생과 네 딸들의 각양각색 이야기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모든 세대에는 그들만의 남신이나 여신이 있었습니다.
정샤오치우(郑少秋)는 분명 많은 80~90년대 사람들 사이에서 남신으로 불렸고, 다수의 드라마에 출연하며 고전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전통 복장을 한 최고의 미남으로 불렸습니다.
<희설건륭(戏说乾隆)>에서 풍류를 즐기던 건륭 황제는 부채를 휘저으며 몸을 돌리면 그렇게나 멋있었다고 합니다.
<서검은구록(书剑恩仇录)>의 진가락(陈家洛), <의천도룡기(倚天屠龙记)>의 장무기(张无忌), <초류향(楚留香)>의 초류향, <대시대(大时代)>의 정해(丁蟹)까지 연기력으로 이미지 하나하나를 모두 제대로 소화해내며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정샤오치우의 감정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었는데요, 그는 3번 결혼하였고, 슬하에 4명의 딸이 있습니다.
다만, 네 딸이 모두 같은 아빠를 두었지만 모두 제각각의 삶을 살고있고 성격도 매우 다르다는 점이 놀랍다고 하네요.
1.
정샤오치우의 첫번째 결혼은 바람처럼 빨리 오고 빨리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의 첫번째 아내 루후이루(卢慧茹)는 일반인이었는데,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고 합니다.
비록 이 결혼은 한번 앉았다가 날아가는 잠자리처럼 짧았지만, 루후이루는 그의 딸을 낳았고, 이 사람은 바로 정샤오치우의 장녀 정안이(郑安仪)라고 합니다.
이혼 후, 정안이는 어머니를 따라 멀리 떠나 살며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정샤오치우는 큰딸과 유일하게 한 연락이 학비를 내주기 위한 것일 뿐 그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샤오치우는 일전에 큰딸 정안이에게 가장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하네요.
그의 딸에게 있어서 아버지란 돈을 좀 보내준다는 것 말고는 오랫동안 만난 적도 없는 생면부지의 남이었습니다.
아마도 처음으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정말로 아무런 경험도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아빠가 되었을 때는 "돈을 주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요.
이러한 것도 정샤오치우에게는 아쉬운 대목이라고 합니다. 그는 어쩌면 아버지와 딸이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어도 서로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라며 개탄했습니다.
2.
비록 첫 번재 결혼은 짧게 끝나버렸지만, 잘생긴 남신에게는 사랑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결혼은 바로 홍콩의 내로라하는 "뚱뚱 언니(肥姐)" 선덴샤(沈殿霞)였습니다.
당시 정샤오치우는 배우 선선(森森)과 열애중이였고, 선선은 선덴샤에게 부탁하여 정샤오치우에게 편지를 한 통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선덴샤는 그 편지가 연애 편지인 줄 알고 정샤오치우에게 밥을 사라고 놀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편지를 다 읽고난 정샤오치우는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울었는데요, 그 이유는 이 편지가 연애 편지가 아닌 이별 통보 편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선덴샤는 미안한 마음으로 농담을 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다정함 때문에 정샤오치우는 마음 속에 호감이 싹 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후, 그녀는 그를 돌봐준다는 명목으로 늘 그와 함께 있었으며, 오랫동안 함께 한 정으로 인해 두 사람은 천천히 함께 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이 감정은 남들이 보기엔 좋지 않아보였지만, 10년 동안 사랑을 키워 온 선덴샤는 의연히 정샤오치우와 결혼하였습니다.
다만, 결혼 후의 생활은 선덴샤가 생각했던 것 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습니다. 정샤오치우는 그녀에게 3년 안에 아이를 못 낳으면 이혼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선덴샤의 몸은 아이를 낳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정샤오치우를 붙잡기 위해 그녀는 40세가 되던 해, 목숨을 걸고 딸 정신이(郑欣宜)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결혼에서 둘째 딸 정신이가 태어난지 8개월 밖에 되지 않았을 때, 정샤오치우에게 다른 사랑이 생겨버려서 선덴샤는 결국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습니다.
비록 이혼했지만, 선덴샤는 지금까지 정신이의 면전에서 정샤오치우가 나쁘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정신이의 생일에 그를 초대하여 아이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2008년, 선덴샤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딸 정신이만 남게 되었습니다. 선덴샤는 딸 정신이에게 유산을 모두 주었는데, 단 딸이 35세가 되어야 비로소 모든 돈을 인출할 수 있으며, 그 전까지는 매달 2만 위안만 생활비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정신이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로부터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교육받았고, 독립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녀는 열심히 노력하였고, 먼저 연예계에 진출하여 여러 드라마에 출연하였습니다. 이후 가요계에 진출하여 <여신(女神)>이라는 곡으로 명성을 얻었고, 이 곡은 "올해의 여성 곡(年度女性之歌)"으로 선정되어 여러 시상식의 솔로 부문 상을 휩쓸었습니다.
다만, 궁핍할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정신이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는 주머니에 46위안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정샤오치우는 나중에야 딸의 경제 상황이 어려웠다는 말을 듣고 나서 "대체 왜 날 찾지 않았을까? 내 이 딸은 나에게 용돈을 달라고 하지 않을 정도로 고집이 세다."고 하였습니다.
중국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란 딸의 가장 따뜻한 항구이자, 가장 단단한 어깨이고, 자신을 지켜주는 영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선덴샤와 이혼한 뒤 곧바로 재혼한 정샤오치우는 딸에게 그런 안도감을 줄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심리학자인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보호와 사랑을 받는 것보다 청소년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한 적도 있는데요, 이러한 보호와 사랑이 정신이에게는 있을지 몰라도 아마 부족하였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안정감 부족은 아마 평생동안 치유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정신이는 정샤오치우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면서 부녀간의 상호 활동도 점차 많아졌다고 합니다. 정신이의 콘서트에 정샤오치우가 특별 참석하여 딸을 응원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하였습니다.
정샤오치우의 콘서트에는 둘째 딸 정신이를 초청하여 두 부녀가 함께 무대에 서서 뜨겁게 포옹하고 노래도 한 곡 불렀다고 합니다.
다만, 정신이에게 아버지란 하늘의 달과 같아서, 비록 바람 부는 어두운 밤을 밝혀줄 수는 있어도 끝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다가갈 수는 없는 존재였습니다.
정샤오치우도 최선을 다해 정신이를 사랑해주려고 노력하였지만, 정신이가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받은 상처는 일시적인 노력으로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3.
중국 네티즌 사이에서 "유에푸밍(岳父命)"으로 불리는 정샤오치우는 선덴샤와 이혼한 뒤 17세 연하의 관징화(官晶华)와 재혼하였습니다.
결혼 후, 관징화는 그의 셋째 딸인 정용은(郑咏恩)과 막내딸인 정용시(郑咏曦)를 낳았습니다.
앞의 두 언니와 비교하면 셋째 딸 정용은은 부모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생활 속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이 모두 있고, 금지옥엽처럼 자랐습니다.
세 번째로 아빠가 되면서 정샤오치우는 적당함을 모르고 셋째 딸 정용은을 지나치게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정샤오치우의 지나친 사랑이 오히려 딸을 제멋대로로 만들어 버렸는데요, 돈 씀씀이가 헤프고, 옷 장신구만 보면 시리즈로 다 사고, 친구들에게 밥을 사주는 것도 모두 고급 레스토랑에 들락날락하는 전형적인 날라리 재벌 2세인 셈이지요.
이밖에도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각종 파티를 여는 등 과감한 스타일과, 자주 바귀는 남자친구로 17세의 나이에 스캔들이 난무하여 홍콩의 각종 잡지의 8개 면을 차지하기도 하였습니다.
엄마 관징화는 딸아이가 점점 더 호방하고 거침없어지는 것을 보고 그녀를 영국으로 유학보내면서 환경이 바뀌고 친구들 사이에서 다시 잘 지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벌써부터 정용은의 소셜 플랫폼에는 영국에서도 쉴 새 없이 보기 좋지 않은 사진들을 올려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습니다.
홍콩 잡지에서는 내리 독설이 달리게 되었고, 실리는 사진에는 하한선이 없었습니다.
2015년, 정용은은 기혼남과 다정한 모습이 포착되었는데요, 남의 결혼 생활에 발을 들여놓은게 아닐까 의심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샤오치우는 딸의 잘못을 거듭 부인하였습니다.
게다가 딸에 대해 "이게 어때서요? 곧 스무 살이 다 된 여자 아이니까 그렇게 상관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이 예뻐야 하는 것이죠."
딸에 대한 이러한 무한한 포용심은 사람들의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입니다.
너무 아이를 귀여워만 하는 것은 아이에게 오히려 독이 되는 것입니다.
정샤오치우는 자신의 그릇된 편애로 인해 셋째 딸이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이기심을 이복언니인 정신이에게 발휘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설날이면 정샤오치우는 둘째 딸 정신이에게 홍바오를 주었는데, 셋째 딸은 그것에 노발대발했고, 집에서 아버지가 정신이의 이름을 말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심리학자의 말에 따르면, 아이가 열두 살이 되기 전까지는 아버지를 우상으로 여기고, 아버지를 지혜와 힘의 상징처럼 여긴다고 하며, 아버지의 행동을 의식적으로 따라한다고 합니다.
정샤오치우의 네 딸을 놓고 보면, 셋째 딸 정용인만이 감정을 대하는 방식이 아버지와 아주 판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4.
어떤 사람들은 둘째를 낳는 것은 첫째에게 잘 못해준 것을 연습 삼아 둘째에게 더 잘해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을 정샤오치우에 대입해 보면, 어느정도 맞는 것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딸은 완전히 생판 남남처럼 아버지 노릇을 전혀 하지 못했고, 둘째 딸에게는 점차 사랑을 주려고 노력하였고, 셋째 딸은 너무 지나치게 사랑하여 방만하게 키웠지요. 넷째 딸에게는 비로소 제대로 된 아버지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가 봅니다.
넷째 딸 정용시는 얌전하게 열심히 공부를 하였고, 대학에 합격하여 그녀가 좋아하는 생물학과를 다녔다고 합니다.
방학 때 학교를 가지 않아도 친구들과 어울리며 노는 대신에 엄마 관징화를 모시고 코즈웨이베이 광장에 가서 식사를 하고,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그녀는 엄마와 귀엣말을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라고 하네요.
그녀의 페이스북에 있는 사진들도 모두 친한 친구가 찍어준 것이지만, 평소의 차림새도 매우 얌전하고 단정하다고 합니다.
세 명의 언니들에 비해서 정용시는 온전하고 원만한 가정에 살면서 가족의 따뜻함과 부모님의 사랑을 즐겼고, 당연히 언니들에 비해 더 순둥이였습니다.
정샤오치우는 이전의 세 딸을 키우며 실패한 경험 덕분에 막내 딸에게 더 많은 정성을 쏟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교육 덕분에 맏언니의 냉담함은 물론, 둘째 언니의 환난도, 셋째 언니의 부실한 언행도 닮지 않고 오히려 얌전하고 겸손한 여자아이가 되었습니다.
정샤오치우의 네 딸과 그녀들의 인생이 다 제각각인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한 아버지의 밑에서 이렇게 다른 딸들이 나왔을까 신기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선 "아버지가 되려면 정샤오치우의 전반생을 따라하지 말고 후반생을 본받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는 그 이름 뿐만 아니라 무거운 책임도 담겨 있습니다.
저명한 심리학자 게르디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출현이란 일종의 특수한 존재로서, 아이를 키우는데 있어서 특별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교양 방식, 사상 관념,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아이들과의 커뮤니케이션, 의사소통 등이 앞으로 아이들의 인간 관계와 처신 등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어린 시절은 한 번 뿐이지만, 어린 시절의 경험은 평생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것이지요.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정샤오치우와 그의 네 딸 이야기가 많은 부모들, 특히 아버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되었으면 한다고 하며 마무리하였습니다.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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