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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위(张曼玉)의 근황은?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장만위는 8살 때, 부모님과 온 가족을 따라 영국으로 이민갔습니다. 17세 때, 그녀는 친척을 방문하러 귀국했다가 홍콩에서 캐스팅 발굴이 되었고, 이듬 해 미스 홍콩 대회에 뛰어들어 미스 홍콩 준우승과 포토제닉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이로인해 그녀는 연예계에 입문하게 되었는데요, 한 때 그녀는 대중 매체에서 꽃병(花瓶)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녀가 연기하는 대다수의 역할들은 천진스럽고도 약간 미련한 여자 캐릭터였는데요, 시끌벅적하고 내실이 없어서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그저 스크린을 왔다갔다 하는 예쁜 꽃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라고 평가받았었습니다.
감독 관진펑(关锦鹏)은 "장만위는 좋은 배우가 될 수 없다."고 직언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그러한 조롱들은 그녀라는 사람에게 현실의 냉정함을 깨닫게 해주었지요.
25세에 그녀는 금마장 최우수 여우주연상(金马奖影后)을 받았고, 26세에도 금마장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녀는 유럽 영화제에서 2개의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고, 홍콩 금상에서 5개의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며, 대만 금마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4개를 획득하였습니다.
그녀는 중화권 브라운관을 주름잡게 되었으며, "공황(巩皇)"이라고 불리는 공리와도 견줄만 합니다.
그녀를 조롱하던 매체들은 잇따라 노선을 바꾸어 그녀를 "아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영화 스타"라고 칭송하였습니다.
2004년, 그녀는 영화 <청결(清洁)>로 아시아 최초로 칸 최우수 여우주연상에 오른 뒤로, 주연배우를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은 배우라는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말했습니다.
"촬영장을 떠난 지 십여 년 후, 나는 다시는 배우라는 직함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내가 배우였다는 것을 누가 일깨워주지 않으면 나는 늘 배우였다는 것을 잊기 십상이다."
그녀는 휘황찬란한 영예를 누렸고,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지만, 또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담담하게 볼 수도 있습니다.
56세의 그녀는 대중 앞에 다시 나타났지만, "비주얼 붕괴다, 밀랍인형 같다."는 조롱을 당했습니다.
네티즌들은 그녀의 사진을 두고 그녀의 외모에 대해 악플을 달기도 했습니다.
옛 여신이 왜 이렇게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하고 빠르게 노쇠해졌는지에 대해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는데요, 그녀는 오히려 이렇게 담담하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늙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이 스스로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매일을 의미있게 보내기만 한다면 20살이든 40살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늙는데, 왜 굳이 젊어야 하고, 주름살이 없어야 아름다움인 걸까요? 사람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어야 하고, 일하며 하는 행동들에 재미를 느껴야 합니다. 나는 아름다움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기복을 장만위는 이미 간파한 것입니다. 얼굴도, 명예도 모두 연기처럼 흩어져버리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사랑하는 것이 비로소 인생의 가장 좋은 상태인 것이지요.
01
1964년 9월 20일은 바로 그 해의 중추절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모이는 바로 이 날에, 여자 아기 한 명이 중국의 홍콩에서 태어났습니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는 홍콩의 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부모는 "장만위(张曼玉)"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부모는 모두 상하이 사람이었고, 집안에는 이미 언니 한 명이 있었습니다.
장만위가 8살 되던 해, 그녀의 부모님은 온 가족을 데리고 영국으로 이민을 갔고, 그 덕분에 장만위는 어린 시절을 영국에서 보냈습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전통방식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고, 나중에 부모님은 성격상의 이유로 이혼하게 되어, 장만위는 어머니를 따라가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아버지의 사랑이 결핍된 가정에서의 생활은 그녀의 훗날 감정 생활에도 영향을 드리우게 되었습니다.
1982년, 장만위는 어머니를 따라 홍콩에 사는 친척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본의 아니게 광고회사의 눈에 들어 홍콩에 남아 모델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18세 때 그녀는 "미스 홍콩 선발대회(香港小姐选美大赛)"에 참여하여 2위가 되는 것은 물론, "포토제닉상"도 받았습니다. 당시 그녀에게 상을 수여했던 쾅메이윈(邝美云)이 실수로 왕관을 잘못 씌워주었는데, 그녀는 곧바로 낄낄거리며 웃으면서 손으로 바로잡았다고 합니다.
이 장면은 촬영되어 장만위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같은 해, 홍콩을 대표해 영국으로 건너가 "미스 월드 미인대회"에 참가한 장만위는 15위 안에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장만위라는 여성이 예쁘게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홍콩 연예계에서 순조롭게 지명도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홍콩 지상파와 계약을 맺으며 본격적으로 연기 인생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몇 달 전, 미인대회 무대에서 사회자가 노래, 춤, 연기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요, 그녀는 그래도 망설이지 않고 노래를 선택했습니다.
뜻밖에도 그녀는 결국 배우가 되었지만, 그녀의 말 탓인지, 아니면 상황이 그렇게 만들게 된 것인지는 모른다고 합니다.
6년 후, 장만위는 인터뷰 프로그램 <금야불성방(今夜不设放)>에서 자신의 이 당시 커리어에 대해 "허영심 때문에 연예계에 입문한 것이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몇 년 후, 그녀는 절정기에 영화계를 떠났는데, 한가한 시기에 가방을 메고 노점상을 찾아가는 등, 이러한 말이 농담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도 하였습니다.
02
1983년, 장만위가 미인대회 준우승에 선정되자, 한 심사위원은 직접 반대표를 던지며 이렇게 못생긴 여자애가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혹평을 했다고 합니다.
몇 년 후, 영화 촬영으로 유명해진 장만위가 다시 한 번 이 심사위원을 만나게 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당시 청룽(成龙)의 매지너 천쯔창(陈自强)과 장쉐요우(张学友)는 잘 아는 사이였는데, 두 사람은 각자 지인들에게 소개팅을 주선하기 위해 장만위와 얼동셩(尔冬升)의 만남을 주선했습니다.
다시 만나게 된 얼동셩은 감히 그녀에게 못생겼다고 말했던 일을 꺼내지 못했고, 장만위 역시 그 일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짧은 소개팅에서 두 사람은 누구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고, 이후 반 년 동안 연락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 사이에는 결국 인연이 있다.
나중에 장만위와 얼동셩은 다시 한 번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귀신에 홀린 듯 장만위는 얼동셩을 향해 한번 웃어주었고, 장만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얼동셩은 영문도 모른 채 앞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모임에서 전화번호를 교환하게 되었고, 일을 하면서 여유 시간이 생기면 서로 전화하여 안부를 묻곤 했습니다.
미혼의 선남선녀 두 사람이 서로 전화를 하는 시간은 점점 더 길어지게 되었고, 그 횟수도 점점 더 빈번해져가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친구에서 연인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감정이 깊어지면서, 얼동셩은 자신의 세 번째 영화 <재견왕로오(再见王老五)>에 장만위를 캐스팅하기도 하였습니다.
영화계에서 얼동셩은 독설가로 유명하다고 하는데요, 그는 두 사람의 연인 관계를 거리낌 없이 드러냈습니다. 만약 장만위의 연기가 요구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봐주지 않고 꾸짖었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처음이자 유일한 합작은 기분 나쁘게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1990년, 장만위와 얼동셩의 3년간의 사랑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습니다.
세간에는 두 사람의 결별 원인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장만위는 그것을 오히려 한 편의 문예 영화처럼 여겼습니다.
03
장만위는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할 만한 연애담이 없다는 것은, 정말 고민이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할 정도로 연애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얼동셩과 결별 후, 그녀는 고민 없이 바로 다음 연인과의 사랑에 접어들었습니다.
1992년, 그녀는 영화 <완령옥(阮玲玉)>을 촬영하던 시기였는데, 미국 국적의 전 남자친구 행크 씨가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녀가 썼던 수십 통의 오탈자가 담긴 "러브레터"를 언론에 공개해버렸습니다.
그러자 삽시간에 대중이 들끓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장만위는 비행기에서 "청년 준걸(青年才俊)" 쑹쉐치(宋学祺)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사랑에 빠졌고, 쑹쉐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영화 스케줄을 펑크냈을 뿐만 아니라, 1000만 위안을 주고 사업을 도와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내 언론에서 상대방이 부잣집 딸과 양다리인 것을 폭로하였고, 장만위와 결별하게 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1996년에 장만위와 리밍(黎明) 주연의 <첨밀밀(甜蜜蜜)>이 개봉되었는데, 이 영화는 지금까지도 중국어권에서 최고의 멜로 영화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프랑스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첨밀밀>을 보자마자 장만위를 찾아가 자신의 영화 <미리겁(迷离劫)>에 캐스팅을 요청했습니다.
줄곧 프랑스를 동경하던 장만위는 캐스팅 요청을 받자, 무작정 이 영화에 출연제의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주요 촬영지는 파리에 있었는데, 장만위는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게 때문에 일을 하는 중은 물론이고 생활에도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감독 아사야스가 그녀의 밀착 통역관으로 직접 나섰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정이 들어 연인으로 발전하다.
1998년 말, 두 사람은 1년의 열애 끝에 35세의 장만위와 아사야스는 프랑스 파리에서 정식으로 혼인 신고를 했습니다.
결혼 후 2년째에 장만위는 영화 <화양연화>에서 "수리젼(苏丽珍)" 역할에 캐스팅 되었습니다.
15개월 간의 촬영 기간 중, 3개월 동안은 배우는 장만위와 량차오웨이(梁朝伟) 뿐이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장만위는 량차오웨이와 함께 몰래 야시장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스캔들이 도처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량차오웨이는 공개석상에서 리우쟈링(刘嘉玲)과 장만위와 함께 손을 잡고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량차오웨이는 결국 리우쟈링의 손을 잡고 여생을 보내게 되었지요.
장만위는 2002년 아사야스와 협의이혼 하였고, 오늘날까지 아직 싱글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량차오웨이는 그녀의 마음 속에 가장 잘 맞는 영화 파트너가 되었다고 하네요.
04
2004년 이후, 연기를 하지 않고 있는 장만위에게 연기를 그만 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녀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단지 연기하는 것을 좋아할 뿐, 스타가 되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연기는 연기 밖의 수많은 것을 직면해야 하는데, 결국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나는 남에게 아첨과 보호를 받는 데 익숙해져서 일반인 친구가 없었는데, 이제야 사람 됨됨이를 배우게 되어서 인생은 때로는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장만위가 누구인지 나도 모르게 되어버렸습니다."
영화계를 떠난 후, 그녀는 자신의 꿈을 되찾고 록 음악 공부를 시작해서 음반까지 내게 되었습니다.
일각에서는 장만위가 정상에서 은퇴하면서 인터넷 상에 노출되는 것을 피한 것은 오히려 잘한 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시대가 갈수록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해가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오히려 "장만위"가 더 많이 필요한 것 같다며 기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장만위의 인터뷰에서 인생에 대해 여러가지 배울만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참고기사>
女神张曼玉,现在过得怎么样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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