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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배우 공리(巩俐)의 인생 스토리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1990년대, 많은 서양인들이 중국에 대해 이야기 하면, 고궁, 만리장성, 공리(巩俐) 밖에 몰랐다고 합니다.
그 당시 서양인들이 중국에 대해 이해하는 경로는 오로지 중국 영화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공리는 이러한 중국 영화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1965년, 공리는 선양(沈阳)에서 집안의 다섯 아이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경제학 교수였던 덕분에, 가정 형편이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배부르게 먹을 수는 있었다고 합니다.
공리의 부모는 그녀가 자라면 선생님이 되어 괜찮은 집에 시집을 가서 여생을 편안하게 잘 보내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공리는 평범한 인생에 만족하지 않고 마음 속으로 배우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연예계의 여자 스타라면, 누구의 이름이 가장 알려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당연히 공리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영화계에서 "황(皇)"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사람은 별로 없지만, 공리에게는 남에게는 없는 "공황(巩皇)"이라는 그 이름이 있습니다. 전성기에 그녀가 세운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출세의 길은 험난했습니다.
80년대 말, 장이머우(张艺谋) 감독은 취재진들의 추적을 피해 16세 연하의 공리를 데리고 홍콩으로 영화 <고금대전진용정(古今大战秦俑情)> 촬영을 위해 떠났습니다.
그 당시 두 사람의 불륜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의 시사회장에서 29세의 리우더화(刘德华)는 공리를 처음 만났는데, 그녀는 명품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테이블에 앉아서 훈툰면(馄饨面)을 삼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리우더화는 눈앞의 장면을 보고는 놀라 얼이 빠져버렸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고 합니다.
"당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 있지?"
그 후 20년 동안, 리우더화는 마음 속에 공리와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되는 순간을 꿈꿔왔고, 2010년 영화 <아지여인심(我知女人心)>이 개봉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꿈을 이룬 그는 감개무량하였다고 합니다. "20년 후, 공리는 그 당시보다 더 예뻐서 나는 그 때보다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 같다." 고 하였습니다.
랑핑(郎平)의 "배구여황(排球女皇)"이라고 부르는 말에 반대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게 인연이 되었는지, 사람들은 그 때부터 "공황(巩皇)"이라는 애칭으로 그녀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랑(郎) 감독의 로비에, 공리는 결국 랑핑 역을 맡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사실, 처음에 "공황"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은, 공리가 가진 강대한 분위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레드카펫 사진이나, 프로페셔널한 메이크업을 한 공리는 마치 여제같이 압박감을 느끼게 하는데요, 그러한 그녀의 곁에 다가가면 마치 여황을 우러러보는 느낌이 들곤 한다고 합니다.
1993년, 칸 영화제에 참석한 공리와 장궈룽(张国荣)은 심플한 화이트&블랙 룩으로 30년 가까이 고전으로 남았습니다.
그녀의 첫 여성 주연작인 <홍고량(红高粱)>을 시작으로, 그녀의 스크린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미 3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였고, 그녀가 맡은 영화 배역들은 여러 시대를 뛰어넘었습니다.
매회 그녀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정성을 다해 갈고 닦아 캐릭터들에게 살아있는 듯한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30여 작품 중에서, 이 기사를 쓴 기자에게 가장 인상깊게 남았던 것은 <패왕별희(霸王别姬)>의 국선(菊仙)이나, <활착(活着)>의 가진(家珍)도 아닌, 바로 1992년 개봉된 <추국타관사(秋菊打官司)>의 추국(秋菊)이라고 합니다.
27년이 지났는데도, <추국타관사>는 여전히 중화권 영화사에서 길이 남는 고전이고, "한 가지를 설명하기 위해 사방을 분주히 뛰어다닌다"는 스토리가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업계에서는 공리가 배역을 하나 맡을 때마다 새로운 기술을 하나씩 배운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1987년에 그녀가 <홍고량>에 출연했을 때, 그녀는 수수를 고르고 농사짓는 것만 두달을 배웠고, 결국 어깨가 닳도록 제작진과 함께 산동성 고밀에 무성한 수수밭을 일구었다고 합니다.
<국두>에 출연하면서는, 그녀는 천을 염색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추국타관사>를 찍으면서 그녀는 본토인도 구별하기 어렵다는 산시 사투리(陕西话)를 배웠습니다.
<게이샤의 추억>을 찍는 5개월 동안, 그녀는 두 손으로 부채를 접고 펴는 기교를 익히고, 손을 던지는 순간까지도 손놀림이 완벽해지도록 기술을 매일 연습하였다고 합니다.
<탈관(夺冠)>만 해도, 네티즌의 극찬은 물론, 랑핑의 딸 바이랑(白浪)이 공리를 두고 정말로 자신의 엄마 같은 기질에 감탄했다고 하였는데요, 바이랑은 이번에 영화 <탈관>에서 젊은 랑핑 역을 맡아 공리와 호흡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공리는 "감각을 잡기 위해" 열흘 동안 여자 배구장에 머물며 매일 장내에서 구석구석을 살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녀가 연기한 랑핑이 뒷모습까지 닮은 이유는 바로 랑핑의 걸음걸이의 세부적인 특징까지도 분석해서 연기했기 때문이라는데요, 그녀가 다리에 상처가 나서 걸음이 느리고, 몸이 20번이나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가 절대 굽히지 않는 기질이 있고, 모두 자신의 패기와 침착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만남은 하나의 전설이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30여년의 공리의 연기 경력을 들춰보아도, 그녀는 "오늘날 여배우 기량의 천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녀가 받은 상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아서 가장 높은 상만 추려보아도 긴 목록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가 카메라 앞에 나타나기만 해도, 틀림없이 가장 눈부실 것입니다.
공리는 영화에서 프로페셔널한 여자 배구선수처럼 연기할 수 있도록 촬영 중간중간에 랑핑에게 공을 발로 차올리는 방법을 배웠고, 성실했던 공리는 랑핑 코치의 시범을 두 번 본 뒤 재빨리 자세를 잡아 빠른 속도로 공을 차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공핑은 랑핑이라는 역할에 가까이 다가갈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 자체가 랑핑 코치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강유병제, 자립자강(刚柔并济,自立自强)"이라는 랑핑의 신념을 그대로 자아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공리가 같은 역할을 하지 않고, 장이머우를 떠났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카이거와 합작한 <패왕별희>에서 그녀는 기생 국선 역을 맡아, 운명과 두 남자의 감정 사이에서 싸우는 역할을 살려냈습니다.
이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하고, 천카이거, 장궈룽, 공리가 동반으로 레드카펫에 섰을 대는 정말로 중국 영화의 하이라이트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풍월(风月)>에서 그녀는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병든 방(庞) 씨 가문의 아가씨를 맡아, 사랑에 빠져 목숨을 잃는 연기를 했습니다.
<헝가자진왕(荆轲刺秦王)>에서는 집안의 국정과 원한을 좌지우지하는 여인 조희(赵姬)였습니다.
저우싱츠(周星驰)와 함께 작업한 <당백호점추향(唐伯虎点秋香)>에서 공리는 추향을 연기하여 대범하고, 단아하며,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이 잊지 못할 영화로 만들어 그 해 홍콩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양란(杨澜)은 나중에 그녀에게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담담하게 장이머우가 한 말을 사용하여 대답했습니다. "결혼은 단지 종이 한장일 뿐 입니다. 두 사람의 감정이 유지된다면, 사실 그 종이는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보아하니 공리는 이미 여기에 마음을 두지 않고, 그 감정을 벌써 놓아주었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보입니다.
두 사람은 비록 부부는 아니지만, 장이머우와 공리는 친구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그들은 따뜻하게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2019년, 공리는 프랑스 남자 미셸과 결혼했습니다.
장이머우는 공리에게 문자메시지로 축복을 보냈습니다. 한 쌍의 연인이었던 두 사람은 각자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행복해졌습니다. 비록 지난 일들이 덧없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정이 쌓여 장이머우와 공리는 혈연없는 혈육처럼 되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면서 연기를 통해 인생을 연주하는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연극을 보았을때, 마치 사람이 6~70% 그대로 따라하는 것 같다면 나쁘지 않다고 느낍니다. 만약 8~90% 비슷하다면 그것은 아주 운이 좋은 경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100%라면 정말 더 바랄 수 없는 일이겠지요.
네티즌들의 국적 논란에도 공리의 표현은 한결같이 강했습니다.
2016년 양란과의 인터뷰때 응한 것 말고는 공리는 이 문제로 대응하는 일은 드물다고 합니다.
설령 그녀가 이 일로 물의를 빚었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당시 양란은 그녀에게 "여러 사람들의 입에 화제로 오르게 되었는데, 무섭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에 공리의 대답은 빨랐다고 합니다. "아니요, 전 상관없습니다."
변함없이 강건한 마음인 것 같습니다.
미셸과의 사랑은 공리의 깨지고 불안한 영혼을 치유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들은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대화할 때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받아주는 것 같습니다.
영혼이 잘 맞는 그들이 사랑에 빠지고, 공리는 이번에는 정말 정처없이 떠돌던 과거의 자신에게 작별을 고하고, 이제는 자신에 대해 잘 아는 한 사람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 공리와 미셸은 서로 손을 맞잡고 연회에 참석하는 등 보기 좋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가장 좋은 사랑이란 무릇 이런 것이겠지요. 바로 서로 손을 잡고, 함께 해로하는 것입니다.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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