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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영화계의 대부였던 등광영(邓光荣)이 영화계를 떠나게 된 이유?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1989년, 장국영(张国荣)은 가요계를 은퇴하고, 스크린 연기에 전념하였습니다.
장국영의 가요계 은퇴에 따라, 장학우, 유덕화, 여명, 곽부성(张学友、刘德华、黎明、郭富城) 등 네 사람이 활동하기 시작하였는데요, 이들 네 사람은 홍콩 음악계의 차세대 맹주로 떠오르며 '4대 천왕(四大天王)'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고 90년대 초까지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90년대 초의 홍콩 영화시장은 왕성한 황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영화 흥행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던 '4대 천왕' 역시 영화계의 러브콜을 받으며, 스크린에서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천왕'과 '천왕'의 만남 또한, 90년대 홍콩 영화의 흥행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1992년, 여명과 유덕화 이 두 '천왕'은 '영화계의 대부(影坛大佬)'로 불리는 등광영(邓光荣)의 요청으로 영화 <용등사해(龙腾四海)>에 함께 출연하였습니다.
<용등사해>는 여명, 유덕화의 진정한 의미의 첫 스크린 합작이었는데요(영화 <호문야연(豪门夜宴)>에서의 카메오 출연은 제외), 그러나 이 작품은 제작자 등광영의 사업 난국을 타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박스 오피스에서 이연걸의 역작에 의해 크게 밀리게 되었습니다.
01
1989년, 장국영의 가요계 은퇴는 '4대 천왕'이 우뚝 서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1990년, 장국영과 왕가위(王家卫)가 함께 호흡을 맞춘 <아비정전(阿飞正传)>은 이 <용등사해>의 탄생을 뒷받침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80년대 중반, 홍콩 영화시장이 활성화 되면서 영화계의 대부인 등광영은 스스로 '영지걸제작유한공사(影之杰制作有限公司)'를 설립하고, 왕가위, 류진위(刘镇伟) 등 영화인들을 자신의 회사로 끌어들였습니다.
1988년, 작가 생활을 하던 왕가위는, 등광영의 지원을 받아 감독으로 변신하게 되었고, 데뷔작인 <왕각가문(旺角卡门)>을 찍었습니다.
<왕각가문>은 개봉 후 좋은 평가를 받으며, '금상장 최우수 영화(金像奖·最佳电影)' 후보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이 영화 이후 왕가위는 등광영을 설득해서, 두 번째 영화 <아비정전>을 촬영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비정전>은 장국영, 유덕화, 장학우, 장만옥, 유가령, 양조위(张国荣、刘德华、张学友、张曼玉、刘嘉玲、梁朝伟) 등 많은 인기 스타들이 모여, 큰 제작비용을 들였지만, 개봉 후 흥행은 참담했습니다.
<아비정전>의 시장에서의 참패는 등광영의 '영지걸제작유한공사'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습니다.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1992년 당시 등광영은 유덕화, 여명을 불러들여 <용등사해>를 찍으며 회생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장 환경의 영향 아래, 이 <용등사해>의 흥행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으며, 등광영은 이 영화 때문에 사업상의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용등사해>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이 영화가 시장에서 냉랭한 평가를 받게 된 이유를 한번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02
이 <용등사해>의 이야기는 결코 복잡하지 않습니다.
'조폭의 대부' 용일부(龙日夫, 전풍(田丰) 역)에게는 용일(有龙一, 등광영(邓光荣) 역), 용이(龙二, 임달화(任达华) 역), 용삼(龙三, 임보이(林保怡) 역)이라는 세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소림(小林, 여명 역)'이라고 부르는 한 남자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용일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50만 위안을 빌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용일은 소림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5만 위안을 주고는 떠나게 합니다. 용일이 떠난 후, 용이는 50만 위안을 소림에게 주며 소림을 자신의 휘하에 둡니다.
용일(龙一)은 용일부(龙日夫)의 양자인데, 이 양자는 모든 방면에서 친아들인 용이나 용삼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용일부는 자신의 파벌의 일을 용일에게 맡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의 이러한 생각을 알게 된 용삼이 화를 내게 되었지요.
어느날, 용삼은 용일부를 밖으로 불러내 킬러를 시켜 암살을 시도합니다.
용일부는 비록 이 암살 시도에 죽지는 않았지만, 용삼은 용일의 심한 문책을 받게 되고, 두 형제간의 갈등은 더욱 격화되게 됩니다.
갈등이 격화됨에 따라, 용삼은 마침내 행동을 취하였고, 사람을 보내 용일을 습격한 뒤, 경찰에 단서를 제공하며 용일과 여러 사건의 관계를 확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용일은 이 사건으로 인해 체포되었습니다.
용일이 체포된 이후, 파벌 내에선 내부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용일부는 인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직 내부 규율에 따라 용삼을 처형하고, 용일을 보석으로 석방시켰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용일부는 강호를 떠나고, 용일과 용이 두 사람에게 조직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용일은 집단의 우두머리 위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간호사인 아설(阿雪, 진법용(陈法蓉) 역)을 만나 조직 생활에서 손을 씻고 아설과 결혼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결혼식날, 용이는 킬러를 보내 연회석을 습격했습니다.
용이와 용삼은 똑같이 용일이라는 양자에게 불만이 있었던 것입니다. 꾹꾹 참아왔던 용이에게 이것은 바로 용일의 세력을 뿌리째 뽑아낼 수 있는 기다리던 기회였던 것이죠.
03
결혼식에서 치열한 총격전 끝에 용일은 도망가고, 그의 부하들은 용삼이 모조리 죽여버렸습니다.
사지에서 탈출한 용일은 이름을 숨기고 적주(赤柱)에서 화물차 운전사로 일했습니다. 이날, 용일은 술집으로 향하며, 배달을 하다가 뜻하지 않게 '대비(大飞, 유덕화 역)'를 알게 됩니다.
대비의 누나인 아리(阿丽, 오가려(吴家丽) 역)는 술집 마담이었습니다. 아리는 용일을 흠모했고, 대비는 누나를 위해 용일을 살뜰히 챙겨주게 되었습니다.
용일은 이 일로, '대B(大B, 정동(程东) 역)'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었습니다. 대B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용일을 혼내주러 왔지만, 다행히도 대비(大飞)가 달려와 사람들을 물리치고 용일을 풀어주었습니다.
대B가 굴복한 이후, 그는 자신의 큰 형님인 '취계(醉鸡, 진혜민(陈惠敏) 역)'를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대B의 복수를 위해 취계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찾아와 아리의 술집을 때려부쉈고, 대비(大飞)를 두들겨 패서 다치게 만들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용일은 권법을 써서 대활약을 하였고, 이들을 도와 사람들을 물리쳤습니다. 취계는 용일을 보고는 그가 사실은 숨어있는 '강호의 인물'임을 알아챘습니다.
용일이 도망간 후, 용이는 소림을 내세워 방방곡곡을 찾게 했고, 힘을 추구하며 화근을 철저히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취계가 한 '이름없는 강호의 인물에게 혼쭐이 났다'는 소식은 곧 소림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소림은 취계를 찾아가 조사를 하려고 했지만, 이 두 사람은 서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결국 총격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혼전을 벌이던 중 취계는 소림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취계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대비(大飞)는 앙심을 품은 채 날뛰며, 그를 찾아가 복수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에도 취계와 소림의 총격전을 목격하게 되었지요.
취계를 사살한 후, 소림은 숨어있던 대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다급한 상황에서 대비는 총을 주워들고 소림과 대치하게 됩니다.
경찰이 현장을 포위하자, 소림은 혼란을 틈타 도주해버렸고, 현장에 있던 대비는 취계의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어 경찰에게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단서를 찾게 된 소림은 곧 용일의 거처를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용일에게 손을 대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소림이 가장 힘들던 시기에 용일이 그에게 5만 위안을 주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생각하여, 소림은 용일을 놓아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빨리 그에게 도망가라고 귀띔 해주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용일은 용이가 마음속으로 자신의 뿌리를 뽑아버리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설령 이번에 소림이 자신을 놓아주었더라도, 나중에 다시 또 누군가를 보내 자신을 암살할 수 있음을 알았던 것이죠. 그래서 용일은 용이를 찾아가 결말을 짓기로 결정합니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용일이 대비를 데려가, 용이와 소림과 함께 혼란의 총격전을 벌이게 됩니다. 용이는 결국 용일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용등사해>의 이야기를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지요.
04
1992년, 문예성이 있는 <아비정전>이 흥행에는 실패하자, 등광영은 상업성이 강한 강호 영웅 영화에 초점을 맞추며 <용등사해>가 시장의 곤란한 상황에서 '영지걸'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해주길 바랐습니다.
이 <용등사해>는 그 효과에 더해, 정의, 권력다툼, 일당백의 폭력적 총격전까지 '강호 영웅 영화'의 고전적인 흐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두기봉(杜琪峰)의 오랜 파트너 위가휘(韦家辉)와 함께 <용등사해>의 시나리오 작가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90년대 초반의 홍콩 영화 관객들은 이미 '강호 영웅 영화'에 싫증이 나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80년대 중반, <영웅본색(英雄本色)>이 탄생하면서, 일당백, 현란한 솜씨로 싸우는 이와 같은 강호 영웅 영화류는 흥행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첩혈가두(喋血街头)>의 흥행 부진과 함께, 강호 영웅 영화류의 흥행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1992년, 오우삼(吴宇森)은 이러한 강호 영웅 영화류를 포기하고, 주윤발, 양조위(周润发、梁朝伟)를 데리고 첩보물인 <날수신탐(辣手神探)>을 촬영했습니다. 이러한 대목에서 강호 영웅 영화류의 당시 시장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여명, 유덕화 두 명의 '천왕'이 힘을 보탰지만, 장르 선택이 적절치 않아 시장에서의 친화력이 부족했습니다.
이연걸의 역작과는 타이밍이 나쁘게 마주치게 되어 <용등사해>의 흥행은 더욱 부진하게 되어버렸습니다.
1992년 6월 개봉한 <용등사해>와 비슷하게 같은 해 6월에 개봉한 이연걸, 임청하가 호흡을 맞춘 <소오강호2: 동방불패(笑傲江湖2:东方不败)>는 강력한 인기몰이를 하며 홍콩 영화 시장에서 각광을 받았습니다.
<소오강호2:동방불패>의 부담속에 <용등사해>의 흥행 성적은 부진했고, 결국 1400여만 홍콩 달러밖에 안 되는 흥행수입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용등사해>이후, 등광영은 임청하, 양가휘, 임달화, 원화(林青霞、梁家辉、任达华、元华) 등을 불러들여 1993년, 액션 코미디 <흑표천하(黑豹天下)>를 선보였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흑표천하>는 개봉 이후 <용등사해>보다도 못미치는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갈수록 나빠지는 흥행 성적에 등광영은 결국 1994년에 영화계를 떠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영화계의 대부는 이 때를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걸어온 영화계의 길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고 합니다.
<참고기사>
事业受挫的邓光荣,找刘德华、黎明救场,结果却被李连杰重挫
1989年的张国荣,选择了退出歌坛,专注于银幕表演事业。 随着张国荣的退出歌坛,张学友、刘德华、黎明、郭富城四人,开始成为香港乐坛的新一代霸主,“四大天王”的名号也在90年代初不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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