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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모택동 주석의 경호원으로 일하고, 말년에는 고향의 건설에 힘쓴 이연경(李连庆)의 인생 스토리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낯익은 산촌 마을, 얼마 안 되는 마을 주민, 멀리 떠나갔다가 고향에 다시 돌아온 나그네 이연경(李连庆)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늙어서 돌아왔건만, 고향 사투리는 여전히 구수하다. 어린이들을 만나면 웃으며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다."
이러한 시는 이연경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을의 어린 아이들은 이 낯선 노인을 보고 그가 왜 울었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했습니다. 그때, 어떤 노인이 그를 발견하고는, "연경, 이연경아, 너 돌아왔구나!" 라며 놀라고 기뻐하며 반겨주었다고 합니다.
이연경 씨는 목이 메어 흐느끼며, "맞아, 나 이연경이야, 집에 돌아왔어." 라고 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그들이 고향의 곤경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이연경씨는 마음 속으로 온갖 감정이 뒤섞인 마음이었습니다.
이연경 씨는 15년간 모택동 주석의 경호를 맡았다가, 모택동 사후에는 또 엽검영(叶剑英) 원수의 경호를 10년간 맡아 일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가까이에서 주석을 위해 일하며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그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심사숙고한 끝에, 그는 베이징에서 부군급(副军级)으로 휴직하며 대우받는 것을 포기하고, 고향인 허루촌(荷路村)으로 돌아가 고향 마을을 위해 건설하고, 소 사육장을 열어서 마을 사람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게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연경 씨는 돌아가자마자 고향에 뿌리를 내리고, 존경받는 "연경공(连庆公)"에서 "우사령(牛司令)"으로 변신했습니다.
산촌 "권왕(拳王)" 에서 "화부(火夫)"로 변하다
1932년, 광둥성의 허루촌(广东荷路村)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태어난 이연경 씨는 집안의 외아들로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허루촌은 예로부터 무덕(武德)을 숭상하였고, 게다가 당시 국가가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집집마다 아이들이 모두 무술을 익혀 몸도 튼튼하게 하고, 집을 지킬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연경 씨도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과 함께 동네 권사(拳师)를 따라 무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과 근면한 노력 덕분에 금세 유명해졌습니다.
20살도 안 된 이연경은 현지인들로부터 "권왕"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날렵한 몸놀림과 폭발적인 기량 덕분에 "과수룡(过树龙)"이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공이 뛰어났던 이연경 씨는 외진 산골에 살면서도 큰 뜻을 품고, 조국에 보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랐습니다.
1951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측에서는 항미원조(抗美援朝) 부대가 허루촌에서도 징집되었고, 열혈 남아들이 전장으로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이연경 씨는 어릴 적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외아들로써 집안의 기둥이었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군대에 입대하지 않아도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위난을 생각하며 나라를 위해 결연히 고향 집을 등지고 종군하여 나라에 보탬이 되고자 하였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이연경 씨를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아들의 대의를 생각해서 그의 뜻을 지지해주었고, 출발 직전 "안심하고 입대해서 나라에 보국하거라, 난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으니까." 라고 해주었다고 합니다.
이연경 씨는 어머니가 챙겨준 간단한 배낭을 메고 소관 군사지역에 도착하였습니다. 본래는 자신의 무예를 이용하여 전선에 나가 용감히 적을 무찌를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지만, 뜻밖에도 그는 취사병으로 배정이 되었습니다.
하늘만 쳐다보던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릇을 나르고 솥과 씨름하면서 아궁이와 사투를 벌이는 "화부(火夫, 취사부)"가 되어버렸고, 젊은 시절의 그는 허탈해하면서 전선으로 가겠다고 여러 차례 신청하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지도자들의 인내심 있는 지도 덕분에, 이연경 씨는 모든 직책들이 국가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맡은 일을 착실하게 수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부지런한 취사병일 뿐만 아니라, 군인으로써도 적극적으로 훈련에 참가할 뿐만 아니라 요리 기술도 열심히 익혔습니다.
1957년, 초과 복무를 하던 병사인 이연경은 귀향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무렵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중앙에서 광둥성으로 나와 모택동 주석의 경호원을 선발하였던 것이지요. 이연경 씨는 주저하지 않고 귀향을 포기한 후 선발에 참가 신청을 하였습니다.
기회는 항상 준비된 자만이 잡을 수 있는 것이지요. 선발 과정에서 이연경 씨는 뛰어난 두각을 나타내며 무술 실력을 발휘하였고, 모택동 주석의 경호원으로 선발되었습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두 명의 지도자를 경호하다
이연경 씨는 모택동 주석의 경호원을 맡으며, 지도자의 안위를 지키는 것을 항상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고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더 나은 지도자의 측근이 되기 위해, 그는 격투술, 총법 등의 기술을 열심히 배울 뿐만 아니라, 문화 지식도 열심히 공부하였고, 종합적인 소양을 길러 자신을 향상하는데 힘썼습니다.
모 주석은 수영을 좋아하였고, 종종 물 속에서 생각에 잠겨 문제를 고민하였다고 합니다. 주석의 안전을 위해 어렸을 때부터 수영을 잘 했지만 이연경 씨는 게을리하지 않고 매일 수영을 연습했다고 합니다.
주석의 경호를 담당하는 경호원들은 엄격한 보안유지를 위해, 일기를 써서도 안 되며, 자신의 일을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쉽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이연경 씨는 15년간 모택동 곁에서 경호원으로 일하면서, 고향 조사 연구시 단 한 차례만 고향에 들렀다고 합니다. 그해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조차 그는 고향의 친척들에게 안장을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고향에 돌아왔을때도 고향 사람들이 그간 어떻게 지냈냐고 묻는 물음에 그는 이러한 영광을 말하지 않고, 그저 자신을 평범한 취사병이었다고 소개하였다고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근면성실하였으며, 자신의 맡은 바에 충성했던 그는 모 주석의 높은 신임을 얻었고, 평상시에도 모 주석이 늘 그를 "샤오광둥(小广东)"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주석은 이연경 씨에게 많은 업무와 지도 및 생활상의 관심을 기울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배움의 향상을 촉구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1976년, 모 주석이 세상을 떠난 후, 이연경 씨는 경호 일로 뛰어남을 드러낸 덕분에 또 다시 엽검영 원사(叶剑英元帅)의 신변 경호 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연경은 시종일관 자신에게 엄격하고, 책임있게 일하였고, 곧 사람들은 그를 신임하여 경호부장(卫士长)으로 위촉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연경공(连庆公)"이라 부르며 존경하기도 하였습니다.
15년간 모 주석을 지켜주었고, 엽검영 원사를 10년간 지켰는데요, 이연경은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직분을 다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연경은 엽검영 원사가 세상을 떠난 후, 총정치부 광저우 연락국(总政治部广州联络局)으로 발령이 났고, 1997년 퇴직할 때까지 부군급(副军级) 대우를 받으며 베이징에 거주하였습니다.
고향의 발전을 몹시 그리워하다
한평생 고생하고, 말년에는 원래 안락한 노후를 보내야 마땅한 이연경 씨는 우연히도 고향의 건설이 낙후되었다는 말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연경씨는 모 주석이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조사 연구를 하게 한 것을 통해, 사람들의 어려움에 주목하고 국민을 뒤해 봉사하는 것을 마음 속에 항상 염두해두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여러 해가 지났지만, 이 말들은 여전히 그의 마음 속에 확실히 남아 기억되고 있었지요.
이연경 씨는 고향의 실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 다시 고향을 찾았습니다.
시대는 진보하였지만, 고향은 아직도 가난하고 낙후되어 있어서 젊은이들은 모두 외지에 나가 일을 하고, 마을에는 늙은 노인들만 남아서 손주들을 돌보며 마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연경씨는 무너진 마을, 질퍽거리는 길, 드문드문 모여있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가슴아파했습니다. 베이징에 돌아간 후, 그는 가족들과 상의한 후 베이징의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의 발전을 돕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이 반발하였고, 아내는 그에게 "당신은 이미 나이를 먹었고, 평생 일하며 고생했으니, 집에서 편하게 즐기라."고 하였습니다.
자녀들도 우려를 표하며, "아버지가 이미 70대 중반인데, 형편이 어려운 마을로 돌아가서 어떻게 몸이 견디겠냐."며 걱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연경 씨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고향을 돕겠다. 고향은 나를 필요로 하고, 고향의 친척들도 나를 필요로 한다. 당원으로서 나는 의로운 일에 기꺼이 앞장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가족들은 이연경 씨의 건강을 걱정하면서도 인민을 위해 봉사하려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19세의 패기넘치는 나이에 나라의 부름에 응해 간단한 배낭을 메고 고향을 떠났던 이연경은 이제 양쪽 귀밑머리에 백발이 성성한 76세의 나이에 다시 배낭을 메고 여러 해를 살아왔던 베이징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든 항상 모 주석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그의 가르침을 끝까지 행하며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연경 씨는 자신이 오랫동안 저축해온 60만 위안을 기부하여, 마을의 길을 닦고, 작은 공원과 농구장, 도서관을 세웠습니다.
마을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관련 조체들을 제정하여 마을 사람들이 아무데나 오물을 배출하는 나쁜 습관을 규제하였습니다. 온 마을이 오물을 한데 모아 배출하고, 오물을 처리하는 구역을 설정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어떤 마을 사람들은 이연경 씨의 고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게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악담을 퍼붓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연경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마을의 실태를 개선하였고, 고향 사람들에게 위생 지식을 보급하였습니다.
점차 마을의 울퉁불퉁한 오솔길은 넓고 평탄한 대로로 바뀌게 되었고, 악취가 진동했던 하천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아졌으며, 집 앞 뒤의 오물 더미는 이제 녹음이 우거진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지저분하고 낙후되었던 마을은 칭찬받는 문명촌으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생활 환경이 많이 개선되어서, 모두들 이연경의 공헌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며 그를 연경공이라 부르며 존경하였습니다.
창업하여 소를 기르며 고향 경제를 이끌다
이연경 씨는 이러한 칭송에도 자화자찬하지 않고, 고향의 경제 건설에 매진하였습니다. 젊은 이들이 돈을 벌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노인과 아이들을 남겨두고 고향을 떠나 외지의 일터로 나선 것을 보았고, 늙어서 의지할 곳 없이 손주를 기르는 노인들을 보며 이연경 씨는 가슴 아파했습니다.
물고기를 주기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겠다는 생각으로 이연경 씨는 다시 한번 커다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소 사육장을 창업하여 고향 경제를 발전시키고, 젊은이들이 집을 떠나지 않고도 돈을 벌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소 사육장을 설립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업종은 주기가 길고 이익이 발생하기까지 느리기 때문에 자질구레한 일처리들과 대량의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위해 이런 일들을 해 주어서 고맙고 이미 그에게 매우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연경 씨에게 제발 그만하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연경 씨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모 주석께서 당원 간부들에게 인민을 위해 일하라고 하였다. 나는 모 주석의 곁에서 십여 년 간 일하며, 그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은 스스로의 일생의 추구 목표이다. 나는 오래된 당원으로서, 아직 기력이 있으니, 마땅히 인민에게 보답해야 한다. 어떻게든, 나는 계속 굽히지 않고 해 나갈 것이다."
집요한 이 노인은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카 외손자 하병천(何丙泉)과 함께 사방에 터를 잡고, 마침내 운부시 도양진 주천촌(云浮市都杨镇珠川村)의 넓은 유휴지를 세 내어 소 사육장을 만들었습니다.
소 사육장을 만드는데 매우 많은 돈이 필요하였고, 이연경 씨의 저축은 이미 고향 건설에 다 들어가서 소 사육장을 발전시키는 것을 지탱할 수 없었습니다.
긍지가 높았던 이연경 씨는 고향의 발전을 위해, 처음으로 사람들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전우들에게 300만 위안을 빌리는 등 소 사육업의 발전을 위해 계속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소 사육장의 많은 일을 직접 도맡아 하며, 취사병일 때 배운 요리 솜씨로 소 사육장의 노동자들에게 밥을 지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소 사육이 지체될까봐 군인 시절의 좋은 습관을 살려 아침마다 100개의 팔굽혀펴기를 하거나, 쌍절곤을 훈련하였다고 합니다.
소 사육장을 수시로 돌볼 수 있도록, 그는 소 농장 옆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았고, 10평방미터도 안 되는 집 안에는 침대 하나, 탁자 하나 뿐이었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고향에 내려와서 이연경 씨가 이렇게 초라한 살림에 살며 매일같이 힘든 노동을 하는 것을 보자, 모두 "베이징의 편안한 삶을 놔두고 왜 여기로 와서 이렇게 고생을 하시냐."며 눈물을 글썽이며 마음아파했다고 합니다.
이연경 씨는 오히려 웃으며 "걱정마라. 매일 바쁘게 지내니, 내 몸이 오히려 더 건강해졌다. 당원으로서, 매일 살면서 빛을 발하여 인민을 위해 힘을 보탤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연경 씨의 이와 같은 노력 덕분에 소 사육장은 매년 30만 위안의 수입을 올릴 수 있는 큰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연경 씨가 경영하는 소 사육장이 잘 되어 마을 소득이 올라가고 마을 주민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는 것을 보고, 주변 마을에서도 소 사육 농장을 차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연경 씨는 자신의 경험을 아낌없이 베풀어서, 주변 소 사육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고, 현재 주변에는 이미 몇 십 개의 소 사육 농가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연경 씨의 소 사육장을 둘러싸고, 안정적인 산업관계가 형성되었고, 소를 키우는 산업 사슬이 만들어져서 마을의 경제가 많이 개선되었으며, 젊은 사람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소 사육장의 모든 수입을 이연경씨는 모두 고향의 발전에 사용하였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소 사육장을 운영하는 것은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고향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이며, 앞으로도 소 사육장은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고 고향의 후생을 위해 물려줄 것이다."라고 공언하였습니다.
이연경 씨는 현재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매일 같이 일찍 일어나 소 농장을 둘러본 뒤, 몸을 단련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취지를 되새기고, 소 사육장에 매일 오성홍기를 게양하며 이 사실을 일깨운다고 합니다.
사람에겐 모두 유한한 시간이 주어지는데, 자신의 삶을 인민에 대한 무한한 봉사에 쏟는 이연경 같은 오래된 당원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귀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연경 씨는 소 사육장이 성장했다고 해서 사장을 자처하지도 않았고, 소 사육 농장의 노동자들과 매일같이 함께 먹고 함께 일했습니다. 또 직접 요리를 해서 식생활 개선을 돕기도 하였습니다.
퇴근 후에도 가장 늦게 돌아가는 그는 모든 것이 정리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고 합니다.
이연경 씨는 마을 공익 사업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데, 곡식창고가 수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3만 위안의 월급을 들여서 곡식 창고를 보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중학교 45주년 개교기념일을 맞이하여 어린이들이 공부를 잘 할 수 있도록 교육 지원급 3000위안을 기부하였습니다. 또한 곤란에 처한 마을 사람이 도움을 청하면, 그는 아낌없이 주머니를 열어 베풀었다고 합니다.
소박하고 꾸밈없는 그는 한 마디로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심없이 헌신하고, 남을 돕는 것을 즐기는 정신은 은연중에 감화되어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고향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이연경 하면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깊은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연경 씨는 젊은 시절 고향의 작은 산골 마을을 나와 국가 지도자의 안전을 위해 정성을 다한 경호원이었으며, 퇴직 후에는 노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가 고향을 건설하는데 힘을 보탰습니다.
가난하고 낙후되었던 시골 마을은 이제 이연경 씨의 손에 이끌려 말끔히 새롭게 단장하게 되었고, 경제도 왕성하게 발전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두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평범해 보이지만, 반짝이는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이연경 씨는 고향 사람들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모든 근로자들의 자랑이기도 하였으며, 그의 정신은 모두가 국가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계속 노력하도록 격려하는 아름다운 정신이기도 하다고 기사에서 보도하였습니다.
<참고기사>
李连庆:守护毛主席15年只回家1次,退休后借300万回乡养牛
看着熟悉的山村,寥寥无几的村民,远归的游子李连庆留下了激动的眼泪。 "少小离家老大回,乡音无改鬓毛衰。儿童相见不相识,笑问客从何处来?" 这首诗,道尽了李连庆此时的心情。 村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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