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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대 보안요원에서 북경대 학생이 된 장쥔청(张俊成)의 인생역전 이야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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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대 보안요원에서 북경대 학생이 된 장쥔청(张俊成)의 인생역전 이야기

hanyuku 2021. 4. 8.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에서 70년대부터 90년대 생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서 하나의 고무적인 이야기를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북경대학 보안요원 한 명이 다년 간의 노력을 통해, 수업을 방청하는 형식으로 공부하여 성인 가오카오(高考)를 통과하였고, 북경대 법대(전문대)에 합격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소리없는 보안요원의 역습은 "북경대 보안요원 입시 1인자"로 알려졌고, 이러한 고무적인 에너지는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학자들을 거쳐 전승되었습니다.

 

 

한때, 그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전설적인 인물이었는데, 현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26년이 지난 후, 그는 가난한 집 출신을 뛰어넘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초심을 지켜냈다고 합니다.

 

 

1. 기회를 붙잡아, 산골짜기에서 벗어나다

 

 

산시(山西)성 농촌의 가난한 집 출신인 그는 장쥔청(张俊成)이라고 합니다. 그의 집에는 7명의 아이가 있었는데, 그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중학교를 마치고나서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큰 형과 큰 누나는 심지어 하루도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릴 적, 복슬복슬한 카스테라 케이크는 보기 드문 별미였는데요, 이 집안 아이들에게도 환상의 맛이었다고 합니다.

 

 

장쥔청은 이런 환경에서 자라며 감히 자신에게 미래가 있는지 없는지 꿈도 꿀 수 없었다고 합니다. 가난 때문에 그는 큰 산속에 갇혀 있다고 느껴졌고, 그는 이러한 점에 열등감을 느끼며 이곳에서 탈출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때, 그는 친구들에게조차 업신여김 당하고 나서도 제멋대로 행패를 부릴 자격조차도 없다고 느껴졌고, 어머니는 늘 그에게 "남들은 맘대로 소란피워도 되지만, 우리는 그럴 능력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집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지만, 비록 가난했어도 의지는 굳세었습니다. 그는 자라서 꼭 이 큰 산을 벗어나야겠다고 몰래 다짐하였고, 한바탕 명성을 떨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10대 후반의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돌아온 산골 아이에겐 빠져나오기 힘든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농사일, 철광, 자동차 정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가끔은 20~30위안을 위해 광산에서 철광석 1톤을 파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생이 장쥔청의 마음가짐을 무너뜨리지는 못했고, 오히려 그는 기회의 소중함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회가 왔을때, 꽉 붙잡았습니다.

 

 

이 시절 장쥔청은 자기 이름 한자로 张君成을 사용하였었다.

 

 

어느날 일을 할 때, 그는 현() 노동국에서 북경으로 노동 인력을 전송한다는 것을 알고, 즉시 가서 자신의 이름을 등록하였습니다.

 

 

26일간의 훈련을 거쳐, 그는 500명 중에서 수석으로 선발되어 북경대학의 보안팀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이것은 장쥔청 인생의 중대한 기회이자, 한 산골 아이의 인생 전환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부모님에게 "나는 출세하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이 모진 말이 한때 그의 포부였을 수도 있지만, 나중에 그가 포기하고 싶었을 때도 이 말이 계속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격려했다고 합니다.

 

 

2. 운명이 바뀌다

 

 

처음 꼿꼿한 유니폼을 입고 북경대 서문의 자리에 섰을 때, 장쥔청은 자신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때, 19세의 나이였던 그는 산속에서 멀리 떨어진 바깥으로 나와 바깥의 넓은 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오가는 단정한 차림의 학생들과 교수들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과 이들의 진정한 차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식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후광'이 없는 자신은, 그들을 마음속으로 동경하게 되었고, 스스로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막상 대학 입시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은, 의외의 사건에 대한 충격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당직이 되었을때, 장쥔청은 7명의 외국 학생들을 가로막게 되었었는데, 그들은 증명서가 없었기 때문에 규정대로 학교 안에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장쥔청은 영어를 못해서 외국 학생들 앞에서 손짓으로만 막아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쌍방이 잠시 대치하고 있다가, 몇몇 외국 학생들은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떠나기 전 그들은 일제히 장쥔청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는 손짓을 했다고 합니다.

 

 

뜻을 알게 된 후 장쥔청은 너무도 부끄럽고 분하다고 생각하였고, 그 간단한 손짓은 그가 애써 쌓아올린 자부심을 부숴버렸습니다.

 

 

한동안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전화상으로 어머니는 "네가 유명해져서 돌아올거지?"라고 말했고, 이 말은 장쥔청을 다시 일깨웠습니다.

그는 이대로 집에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영어를 접하기 시작하면서, 독학으로 전혀 알수 없는 이 언어를 공부했습니다. 이것은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곤란한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보초지에 앉아 있을때, 장쥔청은 항상 영어 책을 보며 억지로 씹어 삼키듯이 거의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어를 읽곤 했습니다.

 

 

어느날, 북경대 영문과 차오옌(曹燕) 교수가 그를 찾아와 그에게 수강증 두 장을 주었습니다. 한 장은 영어 강화 훈련 수업, 하나는 성인 가오카오 준비 훈련반으로, 모두 무료였습니다.

 

 

 

 

 

 

차오옌은 장쥔청의 귀인으로, 장쥔청이 묵묵히 노력한 것이 차오옌의 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녀는 장쥔청에게 "너는 부지런하고 공부를 잘하니, 아줌마가 도와줄게."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낯선 사람의 배려에 19세 청년은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고, 이것은 장쥔청의 인생의 궤적을 송두리째 바꿔놓게 되었습니다.

 

 

3. 노력할수록 행운이 찾아오다

 

 

첫 날, 수업에 들어간 장쥔청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흰 셔츠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는 보안요원 제복을 입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평범한 학생처럼 수업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북경대 캠퍼스에는 종종 길을 달려가는 어린 보안 요원이 눈에 띄었습니다.

 

 

서문에서 교위대까지는 5분, 교위대부터 수업 교실까지 5~6분씩 걸렸는데, 그는 시간을 잘 계산하고 양쪽에서 시간을 지체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열심히 할 수록 행운이 따라와 장쥔청의 삶은 많은 귀인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북경대학의 많은 교수들은 이 부지런한 보안 요원을 좋아하였고, 법대 교수들은 장쥔청의 방청을 반겼습니다. 그리고 서양어과 장위슈(张玉书) 교수는 장쥔청을 데리고 산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담화를 나누며 그에게 마르크스주의 철학, 헤겔 사상을 들려주었고, 장쥔청에게 책 리스트를 추천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때는 차와 말이 느려서 인심이 더욱 소중하였다고 합니다. 장쥔청은 비록 보안 요원 신분이었지만, 여러 북경대 교수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분발하여 책을 읽고, 책을 베끼고, 일기를 쓰며 공부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습니다.

 

 

그 당시, 보안대가 숙소를 10시가 되면 소등하도록 엄격하게 규정하였기 때문에, 그는 이불 속에 숨어 손전등을 켠 채 책을 읽었습니다.

 

 

 

 

 

 

시험 보기 전, 그는 보초를 서는 시간을 제외하고 매일 서너 시간만 자면서 나머지는 모두 공부하고 스스로 문제를 푸는데 썼습니다.

 

 

장쥔청은 가오카오에서 413점을 받았고, 합격선을 2점 넘어서 북경대 법률학과(전문대) 전형에 합격하였습니다.

 

 

보안요원이 북경대에 합격한 일은 널리 미화되어 전국에 퍼져나갔습니다.

 

 

장쥔청 이전에는 이런 전례가 없었던 것이지요. 장쥔청 이후, 20여년 간 500여 명의 보안 요원이 장쥔청과 같은 길을 걸으며 독학으로 자신들의 운명의 길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후, 몇 년간 장쥔청을 추적해 보도하는 언론은 드물었지만, 사람들은 북경대 보안요원의 전설을 기억하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북경대 소식지에 실려 각종 신문에 실렸고, 사진은 북경대 지도책에도 소개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경대 학생들에게 자주 초청되어 강연도 하는 등 불멸의 신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장쥔청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북경대학에 합격한 것이 바로 그의 인생의 최고봉이었을까요?

 

 

사실, 26년 후의 장쥔청은 비로소 정말로 가장 되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4. 북경대를 나와, 후학을 양성하다

 

 

1999년, 장쥔청은 북경대를 떠나 고향인 장치시(长治市)로 돌아왔습니다.

먼저, 그는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교편을 잡았고, 교사, 학과주임, 부교장 등의 직위를 지냈습니다.

 

 

2015년, 장쥔청은 몇 명의 동업자들과 함께 장치시 과학기술 중등직업학교를 설립하였고, 스스로 교장직을 맡았습니다.

 

 

이것은 중등 졸업생을 모집하는 중등전문학교로, 자동차 수리, 전기, 기계, 마케팅 등 다양한 전공이 있는 직업학교라고 합니다.

 

 

 

 

 

 

학교의 설립 취지를 묻자, 장쥔청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학교는 열다섯, 열여섯 살의 초중등 학교 졸업생들을 가르치는데,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반드시 교육을 계속 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마음의 지혜가 아직 온전하지 못하고, 인지 판별 능력이 높지 않아 나쁜 풍조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만큼, 너무 일찍 사회에 진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장쥔청은 살면서 많은 학교 문턱을 넘었고, 결국 그는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아이들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주게 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5년만에 100~200명의 학생들에서 점차 1300여 명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북경대학에서 청강하여 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부터, 자신이 진정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가 되기까지, 20여년 동안 장쥔청은 줄곧 자신이 왔던 길을 잘 기억하며, 거의 매년 북경 대학으로 돌아가 은사님과 동료들을 보러갔습니다.

 

 

 

 

 

옛사람들은 흔히 지식이 운명을 바꾼다고 하였는데, 장쥔청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명문대 졸업은 그의 자기 만족보다도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뒷받침이 될 것입니다.

 

 

지식이 운명을 바꾸는 것은, 장쥔청이 스스로 해낸 것일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더 낮은 단계로의 일까지 이끌어내게 되었고, 학교를 설립함으로써 더 많은 아이들의 운명을 바꿔놓았습니다.

 

 

26년 전, 전국을 뒤흔들었던 북경대 보안요원의 가오카오 1인자는, 자신이 예전에 했던 호언장담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정말로 성과를 거둔 셈이 되었습니다.

 

 

모두들 시대가 변하여 이제 개천에서 용 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마음속에 항상 굳건한 의지가 있다면 기회가 왔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아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누가 아나요, 자신이 제 2의 장쥔청이 될 수도 있을지요?^^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10023698016616164844%22%7D&n_type=-1&p_fro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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