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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연예계를 키워낸 매니저 진숙분(陈淑芬)의 이야기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홍콩 연예계의 톱스타들은 모두 이 사람의 손에서 나왔고, 한 명은 홍콩 연예계 전반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스타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오늘은 "제일 매니저(第一经纪人)"라고 불리는 진숙분(陈淑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01
2003년 4월 1일 오후 6시경, 장국영(张国荣)은 진숙분에게 "5분 뒤에 호텔 앞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오겠다" 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5분 후, 진숙분은 굉음을 들었습니다.
커다란 슬픔 속에서도 진숙분은 조금도 장국영에 대해 누설하지 않고, 그를 보호했습니다.
장국영이 사망하기 전, 진숙분은 매연방(梅艳芳)과 장학우(张学友)의 투어에 바빠 장국영에 대해서는 관심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었다고 합니다. 만약 시간을 좀 내서 청두(成都)에 갔더라면, 그가 그런 길로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후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진숙분과 장국영의 우정은 매니저와 연예인의 협업 관계를 넘어선지 오래였다고 합니다.
장국영은 일전에, 진숙분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자이기 때문에, 자신을 그녀에게 맡긴다고도 말한 적이 있었고, 진숙분도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며, 그들의 호흡은 장국영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도 유지되었습니다.
1977년 5월 어느날, 21세의 장국영은 20위안을 품에 지니고, 전차를 타고 완쯔(湾仔)에서부터 중심가로 이동한 뒤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또 버스를 타고 마침내 "리디(丽的)" 방송국에 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얼마 안 되는 돈에서 등록비 5위안을 내고, 그해 리디에서 주최하는 노래자랑에 참가하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던 장국영은, 1969년, 13세의 나이로 홀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졸업 후에는 리츠 대학(利兹大学)에 진학해 방직과를 다녔고, 아버지의 뒤를 이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년여 만에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공부를 중단하고 홍콩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그의 가정은 이미 기울어져 있었고, 생활을 위해 장국영은 노점을 벌이고, 보조원으로 일했으며, 시간이 나면 각종 공연장에서 사회자로 활동하며 비록 고통스럽지만 줄곧 자신의 작은 취미인 노래 부르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그 해, 그는 리디 방송국에서 노래자랑 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심사숙고하면서 이것이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그의 생활은 아직 참담한 편이었고 돈 벌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탈락한다면 참가비와 여비를 날려야 하므로 두렵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해보고 싶은 유혹이 결국 이겼고, 장국영은 그렇게 1977년 리디의 노래자랑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장국영이 열심히 연습하면서 준비하던 그 시기, 14세 소녀였던 매연방의 생활 역시 장국영과 비해 별로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매연방은 이 해 10년째 무대에서 노래하고 있었는데, 언니와 함께 집안의 기둥으로서, 어린 나이에도 매일 쉬지 않고 노래를 불러 목청을 돋우었습니다. 다음 해, 15세의 매연방은 성대에 두 개의 굳은 살이 박히게 되어, 노래는 커녕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진찰을 받으러 가자, 의사는 그녀에게 수술과 휴양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였습니다.
수술은 효과가 빠르지만, 목이 상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매연방은 자신의 목소리가 상하는 위험을 원하지 않아 1년을 쉬었습니다. 1년 후에는 음계가 8도 내려갔으며, 고음에서 저음으로 변하게 되었고, 한 차례의 병으로 인해 매연방은 목소리를 망칠 뻔했으나, 우연히도 이러한 안 좋은 것들이 모여 독특한 중성적인 여성의 목소리를 갖게 되었고, 그 후 20여 년 동안 이러한 독특한 목소리는 매연방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 장국영으로 돌아와서, 참가 신청을 마친 후, 그는 안절부절 했었지만, 현장에서 활약이 대단하여 결국 결선까지 진출했고, 홍콩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뒤 3년 계약을 맺으며 리디 소속 아티스트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장국영은 마침내 고정된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완쯔의 허름한 숙소와 헤어지고, 그때부터 그는 매달 1000위안의 월급을 받고 500위안을 썼으며, 방송가에서는 독방을 얻어 하루 세 끼를 모두 화려한 식당에서 해결하며 생화랗였습니다. 쪼들리던 예전에 비해 업그레이드 된 셈이죠.
그러나, 가수로서는 그다지 잘 나가지 못했는데요, 리디에서 그에게 전해준 말에 의하면, 1위안 밖에 앨범이 팔리지 않았고, 그는 영화에도 출연했었지만, 그가 맡은 배역은 모두 조연이었습니다.
장국영은 막막해졌습니다. 원래 준우승자가 되면 이로부터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러한 상황으로 보아선 약간 나은 일을 찾았을 뿐이었던 것이죠.
장국영이 이 길을 그만둘까 망설이는 사이, 같은 취미로 노래부르기를 좋아하던 장학우는 캐세이퍼시픽 항공사에서 승객들에게 자리를 예약해주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일이 기계적이고 바빴지만, 그때만 해도 그는 이 일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일이 끝난 후, 그는 도처에서 노래를 부르며 목청을 돋우고, 생활에 만족을 느끼며 가수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장학우의 마음 속에선 항상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있었고, 특히 노래자랑이 열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보고 싶었습니다.
1982년, 장학우가 노래자랑에 출전했을 때, 장국영 만큼의 행운은 없었던 그는 이번 대회에서 순위에 오르지 못하였고, 그 결과 그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삶은 쉽지 않았고, 톱스타들의 출세 여정은 험난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모자라는 것은 조금의 운일 뿐, 버티기만 하면 전기(转机)가 마련된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해, 장국영과 매연방의 전기가 마련되게 되었지요.
02
1982년, 26세의 나이로 진숙분은 화성엔터테인먼트(华星娱乐)의 없어서는 안 될 거물이 되었습니다.
10년 전, TVB가 화성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고 이듬해 진숙분이 입사하였습니다.
당시, 진숙분은 해외 가수들을 보면서 공연을 한번 하면, 영향력과 수익이 매우 괜찮게 나는데, 홍콩은 왜 그게 안 될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때부터, 진숙분은 화성엔터테인먼트의 콘서트를 주선하였고, 1976년, 화성의 첫번째 '화인 가수 솔로 콘서트(华人歌手个人音乐会)'를 개최하였습니다. 진숙분 덕분에 이러한 포맷이 점점 성숙해졌고, 진숙분은 '국내 단독 콘서트 1인자'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1981년 콘서트라는 형식에 대해 이미 숙달된 진숙분은, 상당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당시의 한 일본 음반사에서 일하던 한 친구에 의해 스카웃 제의를 받았고, 그녀에게 일본에서 음반 리메이크 판권 일을 맡기고자 하였습니다.
화성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은 이것을 알고는 깊은 이해를 표시했지만, 절대로 동의하지는 않았습니다. 진숙분이 가버리면, 화성은 누굴 바라야 하는걸까요?
사장은 진숙분을 찾아가 제발 안가면 안되겠냐고 물었습니다. 진숙분은 생각해보더니, 그러면 자신에게 레코드 회사를 설립하게 하라고 하며, 그 회사를 자신의 총괄에 맡기고, 음반의 판권의 절반은 회사에, 절반은 친구에게 귀속시키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장은 그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진숙분이 회사를 차리고 처음 한 일은 노래자랑 대회를 개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이 분야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일해왔는데, 만약 옛 가수들과 함께 일한다면, 동료들의 미움을 많이 살 것이기 때문에 진숙분은 신인들에게로 눈을 돌렸습니다.
공교롭게도, 진숙분이 새 회사를 설립하고 일하기 시작했을 때, 우연한 기회로 그녀는 우울하지만 멋져 보이는 장국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진숙분의 말로는,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합니다.
회사가 막 창립되었고, 가수도 아직 한 명도 없었는데, 어느날 진숙분이 첨동 만향루(尖东香满楼)에 식사를 하러 갔다가, 막 들어섰을 때, 홀 안에서 사람들과 식사를 하고 있는 장국영을 보게 되었습니다.
진숙분은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장국영의 준우승 시합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 청년에 대한 기억이 생생했었습니다. 그녀의 기억속에 장국영은 빨간색 부츠를 신었던 발랄하고 아름다운 젊음을 지닌 청년이었지요.
당시 그녀는 TVB의 기둥인 이설금(李雪琴)에게 그를 알고싶으니 소개 좀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이설금의 소개로 진숙분은 장국영과 만나게 되었고, 그녀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화성엔터테인먼트에서 음반부를 차렸는데, 제가 가수들이 좀 필요하거든요, 혹시 들어올 생각 있으세요?"
장국영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관심있어요, 매우 관심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시 장국영은 리디와 계약이 만료되었고, 몇 년 동안 큰 성과가 없었기 때문에 리디와는 재계약을 하고 싶지 않았었습니다. 진숙분을 만났던 시기에 그는 막막했던 공백기였고, 자유로운 신분이었던 것이죠.
곧, 장국영은 진숙분이 첫 번째로 계약한 가수가 되었습니다.
"모든 물길이 모여 이루어지니, 어떠한 것도 막힘이 없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진숙분은 그때를 회상하며 그들의 만남이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다시 장학우로 돌아와, 그는 그 노래자랑에서의 결과로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이 노래자랑은 바로, 1982년 진숙분이 개최했던 "제1회 신수가창대회(第一届新秀歌唱大赛)"였습니다.
장학우는 비록 당시 생활에 만족해하며 늘 즐거웠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노래를 하는것을 너무나 좋아했었기 때문에, 충동적으로 참가 신청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경연대회날, 그는 노래 두 마디를 부르기도 전에 심사위원이 그를 탈락시켰는데, 그 이유는 "노래는 그럭저럭 괜찮은데, 너무 못생겼기 때문"이라는 너무나도 간단한 이유였지요.
그러나 매연방의 운명은 장학우와는 정반대였습니다.
매연방도 그 대회에 참가신청을 했는데, 그 이유는 언니 대신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던 것이었습니다.
매연방의 무대 경험은 매우 풍부하여, 1차전부터 2차전까지, 그리고 다시 결승전까지 이르렀으며, 그녀는 줄곧 관문을 통과하며 거침없이 올라섰습니다.
결승전이 있는 밤, 매연방은 서소봉(徐小凤)의 <풍적계절(风的季节)>을 열창하여 터프한 여성 저음에다가 잘 어울리는 분장까지 더해져 여러 가수들 사이에서도 돋보였고, 결국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진숙분이 나중에 말하길, 매연방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보고는 반드시 그녀와 계약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었다고 합니다.
이로써, 매연방은 진숙분이 두 번째로 계약한 가수이자, 화성엔터테인먼트 소속이 된 연예인이 되었습니다.
회사가 생기고, 가수들이 모이며, 진숙분이 활개를 치면서 홍콩 음악계는 천지개벽의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였습니다.
03
1983년, 진숙분은 장국영에게 첫번째 음반인 <풍계속취(风继续吹)>를 주었습니다.
당시, 일본 스타 가수인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惠)가 속한 회사와 진숙분의 관계가 매우 좋았는데요, 야마구치 모모에의 가곡 판권이 모두 진숙분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편하고 좋은 조건으로 자신이 계약한 가수를 위한 앨범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풍계속취> 이 노래는, 원래 야마구치 모모에의 1980년 일본어 노래 <재견적영일방(再见的另一方)>에서 비롯되었는데요, 진숙분은 당시 홍콩의 유명한 작사가인 정국강(郑国江)을 찾아가, 이 노래의 중국어 가사를 만들어냈고, 이것을 장국영의 1집 타이틀 곡으로 발표했습니다.
<풍계속취>로 인해 장국영은 히트를 쳤지만, 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장국영은 낙담했지만, 그에게 진숙분은 "기죽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격려 했다고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숙분은 일본에서 "MONICA"라는 곡을 듣게 되었고, 매우 듣기가 좋아서 그녀는 장국영에게 그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진숙분은 여러차례 일본을 오가며 결국 그 판권을 얻어냈습니다.
1984년, <MONICA> 앨범이 나왔을때, 일반적으로 음반이 3~5만장 팔리면 대단하다고 하던 시절이었는데, 장국영의 이 앨범은 무려 40여만 장이나 팔렸습니다.
그해, 홍콩에서 드디어 장국영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었죠.
진숙분의 손에서 장국영은 최고봉에 올랐고, 곧 홍콩 음악계에서 담영린(谭咏麟)의 독점적인 지위를 단숨에 깨버리고 천하를 양분하게 되었습니다.
장국영이 노래 한 곡으로 인생을 단숨에 역전했던 것에 비해, 매연방의 출세는 다소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1982년, 진숙분은 매연방에게 1집 <심채(心债)>를 주었는데, 청순한 옆집 아가씨 같은 이미지로 노선을 잡게 되었습니다.
매연방은 노래는 말할것도 없고, 이 앨범이 나오자마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같은 제목의 노래 <심채>로 단숨에 홍콩 라디오 중국어 금곡방 1위에 올랐습니다. 1983년에는 두번째 앨범인 <적색매연방(赤色梅艳芳)>을 발표해 잇따라 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매연방이 두각을 나타내며 휩쓸자, 어린시절 그녀의 경력까지 낱낱이 파헤쳐지며 '가희(歌女)' 신분이 폭로되자, 여론이 들끓게 되었습니다.
"4살 때부터 가희였는데, 저런 장소에 오래 드나들면서, 청순한 척을 했단 말이야?"
비난과 모욕이 빗발치게 되자, 매연방은 엄청난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이때, 진숙분이 다시 한번 그녀를 도왔습니다.
좋은 매니저는, 반드시 자신의 최고의 자원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하며, 정확한 안목으로 연예인이 가진 장기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진숙분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던 것이죠.
그녀는 처음 회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음반에 익숙하지 않아서 이미지를 디자인하는데 익숙하지 않았지만, 장국영에게는 어떤 노래가 어울릴 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매연방을 대할 때는, 어떤 분야에서 어떤 사람을 찾는것이 최대의 효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잘 알게 되었지요.
그녀는 일본 유명 작곡가에게 부탁을 하여, <사수유년(似水流年)>이라는 곡을 매연방에게 지어주었고, 또한 당시 홍콩 최고의 디자이너를 초빙해와 매연방에게 완전히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주었습니다.
1985년, 매연방은 <매연방>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앨범을 발표하며, 메인 곡으로 <사수유년>을 걸었는데, 앨범 재킷에 등장한 그녀는 부드러운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수트, 선글라스, 와이드 숄더 등으로 데뷔 초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고, 같은 시기의 여가수들과는 대조적으로 신선했습니다.
이 때부터 매연방은 장국영, 담영린과 함께 "양왕일후(两王一后)"로 불리며, 홍콩 음악계의 삼각점이 되어 빛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매연방은 1987년, 홍관에서 28회 공연의 대기록을 세우며, "매입팔(梅廿八)"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그들이 진숙분을 알게 된 지 불과 몇 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진숙분의 주선으로, 류배기(刘培基)와 매연방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첫 만남부터 류배기는 매연방의 전속 스타일리스트가 되어, 매연방의 생애 마지막까지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2003년, 매연방은 류배기를 다시 찾아가, 그에게 자신의 웨딩 드레스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류배기는 그녀에게 왜 웨딩드레스를 연출 의상으로 입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매연방은 "나도 여자다, 나도 나를 위한 신부 드레스를 입고 싶다."라고 답했고, 류배기는 오늘날까지도 매연방이 그 말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합니다. 그당시 그녀는 화학요법 치료 때문에 머리를 모두 삭발했었는데, 이 말을 끝냈을 때,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왔었다고 합니다. 이 때가 매연방이 자신을 위해 류배기에게 옷을 만들어 달라던 마지막이었습니다.
04
1980~90년대, 진숙분의 추진으로, 신인 발굴 경연대회는 매년 치러졌고, 이 대회에서 나온 스타들은 나중에 홍콩 연예계의 거의 반쪽을 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연방과 장국영 등 두 명의 정상급에다가, 주혜민, 양천화, 이민, 하운시, 정수문, 여명, 허지안, 진혁신, 온조륜(周慧敏、杨千嬅、李玟、何韵诗、郑秀文、黎明、许志安、陈奕迅、温兆伦) 등등이 있습니다.
진숙분의 화성 음반은 홍콩에서 가장 크고, 역동적인 중국 음반사가 되었습니다.
1982년, 그 대회에서 장학우는 진숙분을 놓쳤지만, 다행히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년 후, 장국영과 매연방이 인기를 끌자, 장학우는 친구의 격려로 다시 가요제에 나갔습니다. 결승전에서 장학우는 <대지은정(大地恩情)>이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그가 노래를 다 부르고 난 후, 심사위원인 노국첨(卢国沾)은 "점수를 매길 필요가 없다. 바로 이 사람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만여 명의 참가자들 중에서 단번에 우승을 차지하며 연예계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2년 연속 두 장의 앨범을 내놓으며, 장학우는 가요계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1993년에야 진숙분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당시 젊고 패기만만했던 장학우는 5집 앨범이 수백 장 밖에 팔리지 않자, 가요계에서 첫번째로 타격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커리어가 슬럼프에 빠지자, 장학우는 술로 근심을 해소하기 시작했고, 과음하며 늘 싸우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어느날, 어떤 친구가 그에게 아이디어를 내 주었습니다. "진숙분을 찾아가자!"
그때 진숙분은 이미 화성을 떠나 5년 전 자신의 회사를 차리고 콘서트 기획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장학우는 친구의 충고를 듣고, 진숙분을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가르침을 청했고, 진숙분은 당신을 돕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다만 술에 취해 말썽을 일으키는 악습을 고쳐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장학우는 반드시 고치겠다며 40세 이전에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규칙을 정했습니다. 그 후, 장학우는 정말로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1993년, 진숙분의 도움으로 장학우가 내놓은 음반 <문별(吻别)>은 전 세계적으로 400만 장의 앨범이 팔리면서 홍콩 가요계의 천왕이라는 지위를 확정짓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진숙분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듬에 장학우의 콘서트를 열어주었습니다. 해외 관계가 많았던 진숙분은 이를 잘 활용하여 장학우의 월드 투어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1995년 초부터 1996년까지 1년 넘게 3일 평균 1회 이상, 총 2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던 이 콘서트는 당시 아시아 가수 콘서트의 신기록을 써내려갔고, 장학우의 이름값 역시 홍콩에서 해외까지 껑충 뛰어올랐습니다.
이쯤 되면 정상에 오른 것 같은데, 더 이상 올라갈 수 있을까요?
진숙분은 모퉁이를 돌면서, 또 한번 긴박하게 장학우에게 뮤지컬을 열어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홍콩 홍관의 공연 기록을 경신한 <설랑호(雪狼湖)>였습니다.
2006년, <설랑호>의 재공연이 북경에서 매진되었고, 몇 년 만에, 관객들의 감회는 역시나 천지를 뒤흔들만 했다고 합니다.
장학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진숙분과 여태까지 일해오면서 종이 한 장의 계약서를 작성해본 적이 없다. 오롯이 '믿음' 하나 뿐이다."
05
21세기 들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진숙분은 스타들을 만들어낸 사람으로서 그들과 친구로 지냈지만, 그때부터 하나 둘 씩 떠나보내기 시작했습니다.
2002년에는 매니저 겸 가수로 활동하던 절친한 친구 나문(罗文)을 떠나보냈습니다.
2003년에는 20년 넘게 절친한 친구였던 장국영이 떠났지요.
그 해에는, 매연방이 1년 만에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2008년, 심전하(沈殿霞) 역시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진숙분은 심전하의 매니저로 수십 년간 일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심전하는 스타와 매니저를 넘어선 친구이자 자매같은 관계였지요.
심전하가 죽기 전, 자신의 유일한 딸인 정흔의(郑欣宜)를 진숙분에게 정중하게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후에, 진숙분은 장국영, 심전하, 나문의 위패를 팔보산으로 옮겨서 1기로 두었고, 매년 8차례씩 그곳에 방문해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이들의 잇따른 사망으로, 장학우도 가요계를 떠났고, 몇 년 만에 진숙분에게 투어를 부탁했을 뿐, 그 이외는 모두 자취를 감춘 채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당시, 화려했던 홍콩의 별들은 갑자기 역사의 거대한 장막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고, 오직 진숙분 만이 항상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많은 사진들을 보며 지난 일들을 추억할 뿐입니다.
장국영은 그녀가 처음 계약한 아티스트이자, 마지막 연예인이었습니다.
장국영이 세상을 떠난 후, 진숙분은 다시 프로듀서로 옮겼고, 더 이상 어떤 사람의 매니저도 맡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시대가 빠르게 막을 내리며, 인사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매니저라는 이러한 직업명은 진숙분 이전에는 없던 것이라고 합니다.
진숙분은 "이건 이순은(李纯恩)이 자신에게 준 호칭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장국영이 데뷔 초에는 성격이 너무 솔직해서 매번 손해를 보기 쉬웠다고 합니다. 인터뷰에서 한 두마디 말을 잘못 내뱉으면 부정적인 뉴스 기사가 나오게 되지요.
이러한 국면을 전환 시키기 위해, 진숙분은 선택적으로 그를 방문하도록 인터뷰를 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매번 인터뷰를 할 때마다 진숙분의 지정을 받았어야 하는데, 장국영은 늘 그녀에게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당시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하던 이순은은 장국영을 방문했을 때, 진숙분에게 '매니저'라는 호칭을 붙여주면서 이러한 '매니저'라는 직함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매니저는 여전히 없어서는 안될 직업입니다.
그러나 이 매니저는 그냥 매니저가 아닙니다.
1980~90년대에는 매니저와 연예인 사이에 스승과 벗과 같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장국영과의 관계를 되짚으며 진숙분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그 시절, 매니저와 가수 연예인은 친한 친구로서 서로를 도왔습니다. 상부상조하며 같이 성장했지요. 진가영과 진혁신(陈家瑛和陈奕迅)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나와 장국영도 그랬습니다. 우리는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었고,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기초해 함께 일하더라도 이익을 따지는 관계는 아니었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지금에 이르러, 몇 십년 동안 홍콩 연예계를 주름잡았던 홍콩의 간판 매니저 진숙분은 이제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요즘 가수들은 큰 회사들과 계약을 하고, 이런 회사들은 모두 상장사들인데, 막후에서 사장이 매니저를 하고, 그들과 가수들의 관계는 이제 모두 고용관계인데, 이런 가요계에 진정한 정이 어디있겠어요."
진숙분은 연예인에 대해 시대의 줄다리기가 당대 연예인과 그 시절의 연예인들을 판이하게 다르게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한때 그녀는 장국영과 도쿄 음악제 등 많은 행사 활동에 단 둘이 참석했었는데, 이때 진숙분은 매니저이자, 보조이자, 차수였으며, 장국영은 연예인이자,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였다고 합니다.
"예전엔 연예인들이 그렇게 허영심이 많지 않았는데, 요즘 젊은 연예인들은 회사가 작으면 연예인에 대해서도 좋지않다고 생각하니, 무슨 음악 할 마음이 있겠나요?"
진숙분에게 톱스타들의 탄생이 시대와 관련이 있냐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녀는 그렇다고 답하며, 시대는 영웅을 만들어낸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또 그런 영웅이 나타날 수 있겠냐는 질문에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을 뿐 대답하진 않았다고 합니다.
<참고기사>
张国荣背后的女人:一人捧红半个娱乐圈,至今无人知晓
文|蓝橙 上世纪八九十年代,香港娱乐圈进入巅峰时代。很多明星都可以横跨影视歌三栖。那段时间,实力歌手一打一打的诞生。经典的影视作品一部一部的推出。香港乐坛先有谭张争霸,后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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