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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마지막 도둑왕" 계병웅(季炳雄), 만기 출소후 자유를 되찾다?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20세기 말의 홍콩은 치안이 혼란하였고, 수많은 망명자들이 돈을 노리고 약탈하고, 온갖 악행을 저질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은 장자강, 엽계환, 계병웅(张子强、叶继欢、季炳雄)이라고 합니다. 이들 세 사람은 "홍콩 삼대 도둑왕(香港三大贼王)"으로 불리며, 이들의 소문을 듣게 되면 간담이 서늘해지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듯이 인과는 돌고 돈다는 말이 있습니다. 1998년, 장자강은 장먼(江门)에서 체포되어 총살형을 선고받고, 비명횡사 했습니다. 2017년, 엽계환은 암에 시달리다가 옥사했습니다. 두 명의 도둑왕은 결국 모두 응보를 받았고,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되었지요.
반면, 계병웅은 금고형을 선고받았지만 사형은 면했고, 지난해 출소하여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3대 도둑왕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마지막 도둑왕"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옥중에서 높은 사람의 조언을 받아, 좀도둑이 큰 도적으로 변하다
계병웅의 본래 본명은 관덕영(关德荣)으로, 광동 삼수(广东三水)출신입니다. 그는 또래와는 달리, 학교도 다니지 않고 하루하루를 빈둥거리며 온갖 직업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습니다.
정당한 직업에 종사하지 않는 것 외에도, 관덕영은 절도라는 나쁜 습관에 물들어, 자주 광저우 지역에 출몰하여 소매치기로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어느날, 관덕영은 홍콩 신분증을 훔치게 되었습니다. 당시 홍콩은 경제가 발전하여, 항간에서는 "홍콩 곳곳이 황금(香港遍地是黄金)"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욕망에 이끌려 홍콩으로 밀입국하게 되어 생계를 도모하게 되었고, 이름도 계병웅으로 바꾸었습니다.
처음 홍콩에 왔을때, 계병웅은 먼저 아르바이트를 찾아 일하면서 생계를 꾸렸으나, 임금이 적은 것이 싫어서 바로 사직하고 본업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3년 만에 도둑질로 8번이나 콩밥을 먹게 되었지요.
계병웅은 1984년, 교도소에 재수감 되었고, 이번의 수감 경력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게 되었습니다.
계병웅은 수감 기간 중, 동료 수감자들과 난투극을 벌이게 되었지만, 백전백승의 기세로 감옥에서 가장 잘 싸우는 사람이 되어 "사포자(沙埔仔)"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그와 함께 수감되어 있는 죄수 중에는 황지명(黄志明)이라는 거물도 있었습니다. 황지명은 마피아의 "대권방(大圈帮)"의 두목 중 한 사람이었는데, 총을 들고 금은방을 털다가 붙잡혀서 그쪽 길에선 명망이 높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계병웅이 용맹스럽게 싸우는 것을 보고, 자진하여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계병웅은 큰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자, 더욱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그 때부터 이 스승의 말을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황지명은 계병웅에게, 좀도둑질은 체면이 서지 않고, 진정한 도적이라면 공공연하게 약탈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계병웅은 큰 깨달음을 얻고, 출소 후에 큰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황지명의 천거로, 그는 순조롭게 "대권방"에 합류하게 되었고, 그는 "호남방(湖南帮)" 계파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잔인하고 악랄하게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고,
종적을 감춘 채 아무런 법적 제재를 받지 않다
"대권방"의 갈래 중 하나인 "호남방"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암흑가에선 잔인하고 악랄하기로 소문 나 있었습니다. 조직원은 총 7명이었는데, 거의 모두가 망명자이고, 한번 행동할 때마다 총기, 탄약을 소지하고 경찰과 교전하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1985년, 막 출소한 계병웅은 그들과 한 패가 되어 강도 행각을 벌였는데, 이들이 노린 것은 바로, 주룽 젠사쥐(九龙尖沙咀)의 종신뱌오싱(忠信表行)이었습니다. 행동 당일, 이들 7명은 모두 방탄복을 입고, 손에 "흑성(黑星)" 두 자루를 쥐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계병웅과 패거리가 180만 위안 상당의 명표(名表)를 빼앗아 달아났습니다. 이어서 경찰이 현장에 도착하자, 양측은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경찰의 집계에 따르면, 양쪽 모두 126발의 총성이 발사 되었고, 사상 최대의 교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악당들은 도주하면서 길거리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해, 무고한 민간이 11명이 다쳤습니다.
사건 발생 4개월 만에, 경찰이 뒤늦게 결판을 내면서 호남방의 두목은 검거되었고, 부하인 계병웅은 가까스로 도망쳤습니다. 조직을 잃은 그는 따로 살 길을 찾아 내륙으로 동업자를 모집하였고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였습니다.
이듬해, 계병웅은 동료 2명과 함께 유마 지애운가(油麻地爱运佳) 보석상에서 40만 위안 상당의 보석을 약탈했습니다. 불과 5개월 만에 그는 중환 치지 광장(中环置地广场)에서 보석 가게의 보석 200만 위안어치를 모두 털어내는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1989년 9월, 중환에 있는 적생(迪生) 보석 가게에서는 계병웅과 일당 2명에게 200만 위안의 피해를 당했습니다.
그 뒤, 계병웅은 4년간 손을 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캐나다로 이민 가서 여자친구와 가정을 이루며 딸 하나를 낳았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러나, 1994년, 칩거 중이던 계병웅은 강호로 나선 지 한 달도 안 되어, 시계점 두 곳을 털었고, 그 금액만 해도 1650만 위안에 이르렀습니다.
더욱 원망스러운 것은, 경찰과 교전 중에 계병웅이 23세 여성을 총으로 쏴 살해한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폭력은 사람들을 분노시켰고, 사람들은 계병웅의 법 집행을 요구하며 성토했습니다.
그러나, 계병웅의 반정찰 능력은 너무 뛰어나서, 그는 범행 후 매번 종적을 감췄고 경찰이 그를 수배한 지 10년이 다 되도록 제대로 검거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계병웅은 실명을 쓰지 않는 조심스러운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붙잡힐까봐 결코 같은 사람과 두번 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1994년 이후, 계병웅은 두 차례 더 범행을 저질렀고, 매번 도망쳤습니다.
2003년, 사건은 전환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당시 계병웅의 부하였던 오진강(吴振强)의 형이 만료디었던 것입니다. 형사정보과에서는 출소 후에도 오씨가 재범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일부러 그의 생활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오진강이 출소한 후 첫 번째 한 일이 바로 전 사장님인 계병웅을 찾아갔던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출귀몰한 도둑왕이 드디어 꼬리를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통화 기록에 근거하여, 경찰은 계병웅의 소재지를 신속히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 밤 늦게 비호대(飞虎队)가 출동하여, 잠자고 있던 계병웅을 붙잡았습니다.
계병웅의 은신처에서 경찰은 특수부대원 16명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들도 대거 적발했다고 매체에서 전했습니다.
계병웅은 2005년, 24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홍콩 법률은 인도주의를 중시하기 때문에 사형이 성립되지 않았는데요, 그리하여 이렇게 죄가 산더미처럼 많은 세기의 도둑왕도 목숨을 건진 셈이었습니다.
계병웅은 복역 중 모범 생활로 감형을 받았습니다. 그는 지난해 적주 교도소(赤柱监狱)에서 형기를 마치고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계병웅 이후 홍콩에는 도둑왕이 등장하지 않아, 그가 마지막 도둑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제 자유를 되찾아 3대 도둑왕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참고기사>
“末代贼王”季炳雄:心狠手辣射杀路人,坐牢15年出狱直送美国
上世纪末的香港治安混乱,无数亡命之徒为了钱财烧杀抢掠、为非作歹,其中最有名的当属张子强、叶继欢、季炳雄,他们三人也被称作"香港三大贼王",令人闻风丧胆。 俗话说"善恶终有报,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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