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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황제 12명에 순위를 매겨본다면..?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에서 개인의 능력과 청나라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청나라 황제 12명(실제로는 13명)의 순위를 매겨보았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과연 그 순위가 어떻게 되는지 한번 재미삼아 살펴볼까요?^^
1위. 청태조 누르하치(清太祖努尔哈赤)
청태조 누르하치가 없었다면, 이백여 년의 청나라 왕조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후세의 제왕들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청태조 누르하치에 비할 바는 못되는 것이죠.
이 사람들은 어린시절 힘든 나날을 보냈었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명나라 왕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고, 그는 불평 한 마디도 없이 명나라 요동총병 이성량(明朝辽东总兵李成梁)을 을 친아버지처럼 섬기며 기꺼이 이성량의 가노(家奴)가 되려 했습니다.
이후 이성량은 보다 못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지반과 재산을 누르하치에게 돌려주었고, 이로인해 누르하치는 인생에서 첫번째로 큰 돈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누르하치가 건주여진(建州女真)을 통일하였고, 해서여진(海西女真)과 엽혁여진(叶赫女真)을 병합시키는 등 여러 여진 부락들을 흡수 합병하면서 여진족들의 일대통일 작업을 이루어냈습니다. 이러한 창업 과정은 상당히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공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커얼친 몽고족과 혼인으로 연을 맺는 것을 선택하였고, 후금한국(后金汗国)을 세웠습니다. 결국 이 시기에 원숭환(袁崇焕)의 대포에 맞아 숨졌습니다. 건국 시조는 자연히 일등을 차지할 수밖에 없겠지요.
2위. 청성종 다이곤(清成宗多尔衮)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이곤은 황제가 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 명단에 오르게 되었을 수 있을까요? 다이곤은 황제로서, 살아 생전에 황부 섭정왕에 머물렀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청성종으로 추서되었습니다.
왜 '성(成)'이 들어간 걸까요? 그것은 바로 청 왕조의 기업을 이룩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다이곤이 없었다면, 청나라 왕조로 들어가는 관문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이곤은 팔기병을 관내에 들여보낸 뒤, 천하를 대부분 정복하였고, 이러한 것들은 모두 그의 한 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이곤은 청 왕조의 구성에 큰 공을 세운 것이므로, 그를 2위에 올려놓는 것에 결함이 없는 것이지요. 그가 없었다면 청나라 왕조는 관외에서 말과 양을 키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 추서되었더라도, 순수하게 그가 쌓은 업적 만을 보고 다이곤을 건국황제 누르하치 다음으로 청나라 왕조에 대한 공적이 크다고 꼽았다고 합니다.
3위. 청성조 강희(清圣祖康熙)
강희는 현엽(玄烨)이라고도 하는데요, 그의 재위기간 동안, 삼번의 난 평정, 대만 통일, 갈이단 정복, 제정 러시아에 저항하는 등, 그의 공적은 실로 현저합니다.
당시 오삼계(吴三桂) 등이 삼번의 난을 일으켰을 때, 이미 장강 이남의 국토의 절반을 함락시켰고, 그 외에도 서북의 왕보신(王辅臣)도 서북의 영토를 빼앗아갔습니다. 그때 청군은 하마터면 관외로 돌아갈 뻔 했지만, 강희가 없었다면 정말로 훗날의 청나라 왕조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이곤 다음으로 강희를 꼽은 것은 바로 대청 왕조의 영역을 잘 보전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청나라의 철기(铁骑)가 관외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으니, 청나라 왕조에 공이 컸던 셈입니다.
4위. 청태종 황태극(清太宗皇太极)
황태극은 누르하치의 8남입니다. 게다가 그는 누르하치의 뒤를 잇는 2대 황제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황위를 물려받은 뒤 이권을 배제하고, 다이곤 3형제를 내세워 4대 패륵(贝勒, 청나라때 세습귀족)의 권력을 모두 빼앗았습니다.
이후 후금(后金)을 대청(大清)으로 바꾸어 여러차례 명나라와 전쟁을 벌였고, 명나라의 관녕금방선(关宁锦防线)을 무너뜨렸습니다. 또한, 찰합이몽고(察哈尔蒙古)를 멸망시키고, 청나라 군대가 입관(入关)하도록 하기 위해 그 배후를 쓸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황태극 때는 입관하지 못했습니다. 서기 1644년 청군이 입관하기 바로 전 해인 서기 1643년에 황태극은 갑자기 급사한 것이지요. 이 때문에 그의 공로는 다이곤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5위. 청세종 옹정(清世宗雍正)
옹정 황제의 본명은 윤진(胤禛)으로, 그는 강희 황제의 성인이 된 아들 중 넷째 아들로서, 왕위 계승자였습니다. 옹정 황제는 청나라 전체와 봉건시대 전체 제왕 중 한 줄기의 청류(清流)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비교적 굳센 점은 바로 권력자와 감히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강희 황제 말년에 신하들을 내버려두어 전국이 부패한 풍조를 일삼게 되자, 옹정 황제가 황위를 넘겨받았을 때에는 사실 난장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옹정은 청나라를 살리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탄정입묘(摊丁入亩), 사신(士绅)과 당차(当差) 모두 세금을 납부, 화모귀공(火耗归公) 등 모두 권세가의 지주들에게 도전하는 정책들이었습니다.
옹정은 재위 13년 만에 부패한 청나라를 쇠락의 끝자락에서 끌어냈습니다. 그가 죽었을때, 그는 아들에게 5000여만 냥의 은을 물려주었고, 게다가 돈을 벌 수 있는 시스템도 남겨주었습니다.
6위. 청세조 순치(清世祖顺治)
이 황제는 사실 별 역할이 없었으며, 재위 초기에는 다이곤이, 후기에는 색니(索尼), 오배(鳌拜) 등의 사람들에게 의지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진정으로 정치를 주관했던 시간이 비교적 짧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집권한 동안 청나라 왕조는 대륙의 통일 작업을 완수했으니, 이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다이곤이 죽었을때, 사실 청조는 수습 국면이었습니다.
복건의 정성공(福建的郑成功)과 운남의 이정국(云南的李定国)은 모두 최고의 군사 천재였습니다. 순치때 두 사람을 잇따라 대륙에서 쫓아냈는데, 정성공은 대만으로 갔고, 이정국은 맹랍(勐腊)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순치 황제는 개인적인 능력은 그다지 출중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본전을 찾는 수준은 되었다고 할 수 있어서 6위에 뽑혔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명군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애석하게도 너무 시대를 앞선 인물이었던 것이겠지요.
7위. 청고종 건륭(清高宗乾隆)
건륭 황제는 단점이 하나 있지만, 그의 능력은 확실히 비교적 뛰어납니다. 가장 먼저, 그가 즉위 했을 때, 그는 아버지의 밑천으로 유명한 재벌2세가 되었습니다.
중기에는 강옹건성세(康雍乾盛世)의 절정을 이루어,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백성을 배불리 먹게 하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다섯 번이나 천하의 조세를 면제해주었고, 팔성(八省)의 조세를 세 번이나 면제해주어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습니다.
이밖에도 건륭은 변경 지역을 평정하여, 신강(新疆)을 정식으로 청나라 영토에 포함시켰습니다. 이 밖에도 티베트의 지배도 공고히 해서, 변방에 관해서는 다른 황제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노년이 된 후, 그는 노망이 들어 내부 봉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쇄국을 선택하여, 철저히 중국과 서양을 양립시켰는데, 이로 인해 근대 중국과 서양의 격차가 벌어지게 된 것은 바로 이 노황제 탓이 된 것입니다.
특히 건륭은 봉건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오래 산 황제로 89세를 족히 넘었습니다. 실제로 가장 오래 집권한 황제는 무려 64년간 집권하였다고 하네요.
8위. 청인종 가경, 청선종 도광, 청문종 함풍(清仁宗嘉庆、清宣宗道光、清文宗咸丰)
이 세 명의 황제는 청조 중말기의 황제로, 건륭 황제가 승하한 이후부터 청조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건륭은 아들인 가경(嘉庆)에게 혼란스러운 국면을 남겨주었고, 가경의 능력은 이런 국면을 헤쳐나가기엔 형편없었던 데다, 쇄국 정책까지 겹쳐져 청나라는 부진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후 도광(道光) 시기에는 서양인들의 포탄이 일제히 날아들기 시작하였고, 함풍(咸丰) 시기에는 그 유명한 태평천국 운동을 겪었으며, 서양인들의 침입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 황제의 능력과 공헌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여집니다. 그들 조손(祖孙) 세 사람이 모두 대단한 능력도 없고, 대단한 치적도 없기 때문에 한 줄에 세운 것은 순전히 보기 좋으라고 한 것일 뿐이죠.
9위. 청목종 동치, 청덕종 광서, 청폐제 선통(清穆宗同治、清德宗光绪、清废帝宣统)
함풍은 아무런 능력도 없었고 수명도 짧아서, 황위를 자신의 유일한 아들인 동치 황제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이 기간 자희 태후가 보정(辅政)했습니다. 그러나 동치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나자, 자희는 광서를 황제로 세웠습니다.
광서는 평생 꼭두각시로 살아오면서, 자희 태후가 모든 권력을 누렸습니다. 자희 태후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날 광서도 덩달아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광서 황제가 세상을 떠난 후, 3살이던 선통이 황위를 이어받아 황제가 되었고, 그가 바로 대중에게 친숙한 부의(溥仪)입니다. 섭정 왕재풍(王载沣)이 보정을 하였고, 3년 뒤 청 왕조는 멸망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 황제는 모두 꼭두각시 황제로, 지금까지 진짜로 손아귀에 권력을 움켜쥔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능력과 공헌은 꼴찌로 밀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죠.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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