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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방 농민들이 <신문연파(新闻联播)>를 잘 보지않는 이유는?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의 전통 설날에 맞춰 SNS 상에서는 중국 남북의 음식이나 민속 풍습 등에 대한 비교 논란이 자주 일어난다고 하는데요, 설 명절에는 더더욱 그러하다고 합니다. 중국의 남북 생활의 큰 차이점은 윤리적인 전통과 향촌 관리, 나아가 일부 상황에서는 여러가지 문화 등이 남북 차이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고 하네요.
예를 들어, "화중향토파(华中乡土派)"에서 청년학자 단체가 조사한 사회조사 연구에 따르면 북방의 농촌에서는 대부분 농민들이 <신문연파(新闻联播)>를 보고, 뉴스의 진실성을 신뢰하지만, 남방의 농촌에서는 대부분의 농민들이 국가 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구경을 위해 뉴스를 본다며, 국가에 대한 불평이나 기대는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남방의 농민들은 <신문연파(新闻联播)>를 보지 않는 것일까요? 이러한 차이는 중국인들에게 중국의 남북방 향토 사회에 대한 사회학자들의 깊은 관찰과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왜 남방 농민들은 <신문연파(新闻联播)>를 보지 않을까?
중원 농촌조사(中原农村调查)때 한 참석자가 <오간신문(午间新闻)>이 곧 시작되니 뉴스를 보러 집에 가야겠다며 벌떡 일어섰다고 합니다. 그가 이처럼 오간신문을 걱정하게 된 것은 바로 전날 밤 <신문연파>를 놓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해, <신문연파>가 <일기 예보>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신문연파>를 자주 보기 때문에, 여성이나 노인이나 국가 정책을 말할 수 있고, 많은 국가 지도자의 이름과 직무를 정확하게 열거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뉴스는 현지인들의 하루 생활 필수품으로 자리잡았고, 농민들은 <신문연파>를 보아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고도 하였습니다.
01. 북방 농민들은 권위를 믿고, 남방 농민들은 구경을 좋아한다
북방 농촌에 대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대부분의 농민들이 뉴스의 진실성을 믿는다고 답하였습니다. 왜 <신문연파>를 즐겨보냐는 질문에, 농민들은 그것이 가장 사실적이고 권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진짜가 아니면 뉴스에 나오겠느냐. 중앙신문이 다 가짜라면 나라가 엉망이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에 대해 고등학교 교사들은, 연구할 때 "가장 기층(基层)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은, 농촌까지 깊이 들어가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요, 이것은 <신문연파>에서 대중들의 생활에 관심을 갖는 간부의 모습과도 유사합니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당신들은 나라에서 보낸 것이 아니냐"라며 다급하게 묻곤 했습니다. 이어 농촌에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마을이 많다고 불평하였습니다. 마을 도로에는 사람이 없어서 비가 오면 마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침수 재해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으며, 옥수수 밭이 침수되는 것을 빤히 두고 볼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치안도 관리가 되지 않아, 자신의 양을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 안고 가는 것을 두 눈뜨고 당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불평을 하면서 이들은 국가에 이러한 점들을 보고하고, 국가에서 간섭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중국에서 마을 인터뷰를 하면, 노인들은 항상 매우 어려운 질문을 한다고 합니다. "아들이 부모를 부양하지 않는데, 당신들은 국가에 보고하거나 우리 현 위원회, 성 위원회 서기에게 보고할 수 있는가?" 이러한 것에 대해, "국가 대신에 마을 간부를 찾아가 말해보겠다"고 제안하면, 노인은 "모기가 뿔을 물어뜯는 것처럼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 텔레비전에서 지도자들은 매일 '세개의 대표(三个代表)'를 이야기하며 온기를 보낸다. 우리 밑의 간부들이 막무가내로 난동을 부리고, 군중의 생활에 관심이 없고,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으며 그들 자신들을 대표하니, 그들은 비로소 '아들이 부모를 부양하는 일'을 상관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노인은 "국가의 정책이 좋고, 모든 것이 농민을 위해주며, 농사짓는데 보탬을 주는 것은 이제껏 없었던 좋은 일" 이라며 "그 아래 있는 선에서 일을 안 하는 것이다"라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하지만, 강서, 호남 등지의 농촌을 조사하면서 남방의 농민들은 북방의 농민들처럼 <신문연파>에 강한 애착과 기대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 농민들은 드라마를 더욱 좋아하는 것 같고, 아무리 마을의 엘리트라도 <신문연파>는 커녕 세상사에 별로 기대가 없었다고 합니다. <신문연파>를 보는 소수의 농민들도, 뒷부분에 나오는 국제 뉴스를 즐겨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라크 문제나, 6자회담 문제, 이들 나라들이 싸우고 있는 것을 보면, 재미도 있고 시야를 넓힐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남방의 농민들이 뉴스를 보는 것은 국가 대사나 국가 정책, 국가 지도자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니고, 세상 구경을 위한 것이었던거죠. 그들의 일상적인 담론에서도 '국가'라는 말이 중원 농민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모습은 좀처럼 포착되지 않았고, 농민들의 원성이나 기대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남방의 농민들은 "중앙 뉴스는 우리와 너무 멀어서 실용적이지 않다"고 늘 말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보기에 그들의 삶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TV 속의 국가도, 먼 나라의 지도자도 아닌, 바로 마을과 지방의 규범인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국가 대사에 무관심하지만, 지방의 일에는 정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02. 북경 농민들의 "공(公)"에 대한 믿음
지역별로 <신문연파>에 대한 농민들의 태도나 국가에 대한 소구 정도가 다른 것은 국가 관념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북방의 농민들은 국가관이 뚜렷하고, 남방의 농민들은 냉담할 수밖에 없을까요? 이것은 마을의 성격과도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북방의 마을은 평원에 위치하여 전란의 충격을 받기 쉽고, 마을의 역사가 비교적 짧으며, 이주가 빈번하여 여러 성씨들이 함께 거주하는 마을 구조를 형성하였습니다.
여러 성씨들이 모여사는 공동 주거의 두드러진 특징은, 마을에서 보통 가족을 인정과 행동의 단위로 삼으며, 가족은 "대사(大私)"로서 가족내의 일을 책임지지만, 가족간의 일치된 행동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임시 가족 대표회나 촌조간부와 같은 가족 위에 구성되어 있는 공적인 힘에 호소해야 합니다. 이러한 농민들이 실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공(公)" 위에는 또 하나의 추상적인 "공"이 위치하는데요, 즉, 북방의 농민들이 상상하는 국가는 중앙정권에 가깝고 전통적으로 정권의 입김이 개입되어 주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기도 쉽습니다. 이 때문에, 마을의 구체적인 "공"이 그 기능를 제대로 못하고 사회적 요구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할 때, 북방의 농민들은 추상적인 "공"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 성씨가 공동으로 거주하는 마을은 여러 가족들의 "대사"에 의해 쪼개져 있기 때문에, 그 내부에는 마을을 커버하고 공동체를 통합할 수 있는 내적 역량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마을은 '우리'가 아닌, '우리'의 마을일 뿐, 개인들의 공동체적 느낌이 부족한 것이죠. 그래서 중원 농촌에서 마당 밖에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공공의 일, '소조장' 등의 구체적인 "공"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을의 경조사, 분쟁조정, 도로 보수, 심지어는 마을의 오물 처리까지 모두 이러한 구체적인 "공"의 일인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구체적인 "공"을 "소조장"의 관할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조사에 따르면 이러한 공적 관리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03. "대사(大私)"가 남방 농촌의 공공 수요를 해결하다
남방의 농촌에서는 자연 마을이나, 촌민에 일반적으로 조가 하나씩 있습니다. 이처럼 마을은 하나의 부족, 혹은 종족(宗族)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살아 숨쉬는 종족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깊고 다층적인 촌락의 전체적인 느낌과 주체감을 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남방의 종족이 모여사는 촌락에서는 가족의 "소사(小私)" 보다도 종족의 "대사"가 더욱 중요시되며, 북방의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 촌락처럼 구체적인 "공" 보다는 국가라는 추상적인 "공"과 직관되어 있습니다. 종족적 마을의 기능과 사회적인 사물 등은 모두 "대사"가 담당하고 완성하며, "대사" 위에 구체적인 "공"을 별도로 구축할 필요도 없고, 추상적인 "공"에 호소하지도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남방의 종족이 모여사는 촌락에서 높고 웅장한 종사(宗祠)는 촌락의 역사와 종족의 주체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역 농민들이보기에 종사가 없는 마을은 체면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고, 이러한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지방'에서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했으며, 종사가 없는 그 마을은 촌락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을 내부에서는 단순히 체면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조사, 마을 대표자회, 각종 마을 회의의 개최 등 마을의 공적인 업무를 이러한 곳에서 담당하고 있는데요, 종사를 둘러싼 촌락의 주체는 "족장공(族长公)", 각 집의 "장방(长房)", 그리고 60세 이상의 "노생(老生)" 및 "사문(斯文)"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촌락의 각종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경조사와 분쟁조정에도 개입하는 마을 내의 열성분자들입니다.
중국은 종사를 중심으로 한 촌락 주체 외에도, 남방의 촌락에는 신목으로 상징되는 사신(社神)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신은 '우리 마을'의 신일 뿐, 촌락 밖의 사람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사신은 단순히 마을 사람들의 의식적인 제사 대상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일부분이며,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늘 신목 밑에 와서 사신을 섬기며, 외지에서 일하는 가족들이 평안하고 돈을 잘 벌기를 기원하고, 외지에서 사기를 당하거나 약탈당하지 않고, 다단계 판매업자를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설 명절 즈음이 되면, 집집마다 술과 초를 들고 경건하게 신목 아래에 와서 사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사신의 가호에 감사합니다. 간혹 일부 아들들이 불효하는 노인들은 신목에 아들의 이름을 적은 붉은 띠를 걸어놓고는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아들을 키웠는지, 그리고 아들은 또 어떤 불효를 저질렀는지를 고하며 울먹이면서 사신에게 아들이 양심을 발견하고 부모에게 잘 대해줄 것을 빌기도 한다고 합니다.
북방의 마을에서는 촌조(村组)에 주체(主体)가 하나밖에 없는데 비해, 남방의 마을에는 주체들이 많습니다. 이런 촌락에는 소조장이 촌락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촌민들이 자신의 촌락을 관리합니다. 즉, '우리 마을'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지요. 촌락도 분조장만의 일이 아닌, '우리 전체의 것'이라고 봅니다. 촌락은 종족, 방계, 가족 및 모든 마을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私)"의 영역으로, 개인 가정인 "사"에 비해, 마을은 "대사"이며, 마을의 각종 공공 수요는 모두 "대사"가 해결합니다.
04. 중국 농촌의 공사(公私)관념과 국가관념
농민들의 '공사' 인식 변화를 보면, 북방 마을의 '공'은 넓어지고 '사'는 움츠러들고 있습니다. '사'는 종족, 가족에서 핵심 가정으로 후퇴하였고, 핵심 가정의 바깥은 모두 '공'의 범주 안에 들게 되었습니다. 이때, 농민들의 '공'에 대한 요구는 마을 조라는 구체적인 '공'에서 국가라는 추상적인 '공'에 이르기까지 무한하게 위로 확장되어 왔습니다. 한마디로, '공'이 무한대로 확장되고 '사'가 급격하게 위축되면서 '사'의 영역이 대부분 '공'의 영역에 밀려나 마을이 더이상 '우리 마을'의 일이 아니라 '우리 일'이 되는 것이죠.
공사 관념의 주체로 볼때, 북방의 마을은 '사'가 없고 '공'만 있는 마을이라, '공'이 가둬야 하고, 통합해야하는 마을입니다. 그러나 마을이라는 구체적인 '공'도 점차 약화되고, 공공의 일에서 손을 떼면서 추상적인 '공'에 대한 농민들의 기대가 더욱 간절해지고, 국가 관념도 강해지게 되어, 국가에서 더욱 '관할'해주기를 갈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남, 산동 등지의 농민들은 지방정부의 유연한 정책을 잘 이해하였지만, 반면 강서성의 농민들은 이해할 수 없다며 못 참겠다는 반응을 보인 것과는 대조적이지요.
남방의 농촌에서 촌락은 '우리'의 촌락이고, 촌락 자체가 커다란 '사'입니다. 마을의 공공 수요는 가족, 장방, 종족 등 구체적인 '사'를 통해 충족됩니다. 이런 구체적인 '사'가 소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대, 농민들은 추상적인 '사'인 '사신'에 의존하였습니다. '사' 덕분에, 마을 밖의 추상적인 '공'은 이들에게 실용적이지 못한 것이고, 농민들은 심지어 이에 대해 반감을 갖기도 하지요. 그래서 남방의 <신문연파> 선호도나 향촌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남방 농민들의 국가관념은 희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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