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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명맥을 이은 리우웨이쉐(刘伟学)의 '위항 종이 우산(余杭纸伞)' 이야기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우산 하나가 특별하면 얼마나 특별할까요?
그런데 2016년 1월, 파리 메종 오브제 홈 인테리어 박람회에서 지름 3m짜리 대형 야외용 종이 우산이 빛을 발했고, 박람회에 출품된 10개의 우산은 파리의 한 디자인 매장에서 모두 사갔다고 합니다.
만리가 넘는 중국 저장성 항저우 위항(余杭)에서 온 90년대생 "무형문화유산 수호자" 리우웨이쉐(刘伟学)와 환갑을 맞은 그의 스승들이 산간 벽지에서 "종이 우산 왕국(纸伞王国)"을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종이 우산이 천천히 펴지고 빙그르 돌면, 종이에 그려진 복숭아꽃 무늬와 특유의 질감이 마치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연상하는 것 같다고 하네요.
90년대생 젊은이가 다니던 직장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귀향하여 창업하여 위항 종이 우산의 수호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리우웨이쉐는 40년대생 리우요우췐(刘有泉)과 함께 2세대가 만들고 있다는데요, 두 사람 모두 공통적으로 위항 종이 우산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2014년, 리우웨이쉐는 항저우 사범대학 환경예술디자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1년 동안 직장을 다닌 후, 다니던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할아버지 리우요우췐에게 종이 우산을 만드는 기술을 물려받았고, 핑야오진 탕부촌(瓶窑镇塘埠村) 위항 종이 우산의 3대째 전승자이기도 합니다.
리우요우췐은 위항 종이 우산의 무형문화유산 전승자입니다. 30년 전, 그는 수십 리 산길을 걸어 우산뼈대 100여 개를 골라왔습니다. 2006년 말, 그는 연륜이 있는 우산 장인들 4명을 불러모아 복잡한 종이 우산 제작 기술을 복원하고 마을에서 그 기술을 전수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2007년 6월, 위항 종이 우산은 제2차 저장성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리우요우췐은 일년 내내 종이에 기름을 먹인 우산과 함께 하는데요, 리우웨이쉐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가 만드는 종이 우산을 보고 자랐습니다. 산 속의 꿋꿋한 죽순대가 우산 뼈대로 변하고, 도화지 한 장 한 장이 고운 모양의 우산 면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가슴 속에서 종이 우산에 대한 애착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우산 한 자루에는 최소한 거죽, 괄청, 평두, 벽골, 거조, 삭골, 배산골, 천산, 호산, 장병(锯竹、刮青、平头、劈骨、锯槽、削骨、排伞骨、穿伞、糊伞、装柄) 등 70여 가지의 공정을 거쳐야 한다고 합니다. 우산 면으로 사용할 도화지를 감칠로 적셔서 우산 뼈대에 한장씩 붙이고, 선을 따라 잘 묶어준뒤, 그림을 그리고 숙성시킨 오동나무 기름을 바른 뒤, 그늘에서 거꾸로 매달아 말리며 마무리해야 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전 과정에서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리우웨이쉐는 할아버지에게서 위항 종이 우산의 화려함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위항 종이 우산은 230년 가량의 역사가 있는데요, 하지만 이 화려한 역사는 새로운 공예품과 제품들이 나오면서 뚝 그치게 되었습니다. 기계로 만들어진 철골 우산이 나오자, 위항 종이우산의 생산은 점차 명맥을 잃고 1970년대에는 완전히 단종되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종이 우산 만드는 기술과 정제된 기법, 깊은 문화적 함의를 알고 있었던 리우웨이쉐는 할아버지가 전통 수공예가 맞닥뜨리는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했습니다.
2016년에 이르자, 위항 종이 우산 공예는 "미람", "서오홍", "심공흑"(“米蓝”、“西坞红”、“深空黑”) 등의 새로운 종이 우산으로 탈바꿈하여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가 제작한 "미람"이라는 이름의 기름 종이 우산은 밀라노 디자인위크에서 전시되었습니다. 우산은 중국의 전통색 중 "춘람(春蓝)"이라고 불리는 색으로, 봄의 옅은 회청색을 닮아있는데, 그제서야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위항 종이 우산은 날아올랐습니다.
타오바오에서 무형문화유산의 생명력을 이어가다
핑야오진(瓶窑镇)에서 약 10km 떨어진 서오촌(西坞村)이라는 작은 마을에, 리우웨이쉐는 옛 집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고택을 개조하여 "위항 종이 우산 전시관"을 만들었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종이 우산 왕국이 눈앞에 펼쳐진다고 합니다.
대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우산 틀을 제작하고,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고, 기름을 칠하는 등 위항 종이 우산이 장인들의 손에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리우웨이쉐는 이러한 종이 우산이 전시용 공예품에만 그치지 않도록 생명력을 이어나갈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어떤게 생명력인가 하면, 바로 비가 오는 날 누군가 종이 우산을 쓰고 있는 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종이 우산의 생명력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우리가 우산을 만들 때, 하나의 전승 기술로 보호되었지만, 그것은 종이 우산이 존재하게만 할 뿐, 이것에서 더 발전시킬수는 없었습니다." 2017년, 리우웨이쉐는 타오바오에 스토어를 열었고, 첫번째로 "보배(宝贝)"라는 이름의 순백색 고전 공예 기름종이 우산을 선보였습니다.
"타오바오에서 무형문화유산의 전승과 보호를 위한 더 많은 가능성을 찾았습니다."
위항 종이 우산을 가지고 리우웨이쉐는 "타오바오 조물제(淘宝造物节)"에 초청되었습니다. 그는 장치우(章丘) 가마솥 부스가 바로 옆에 있는 것을 보고, 타오바오가 수공예를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플랫폼이라는 것을 더더욱 믿게 되었습니다.
"인터넷 플랫폼은 우리같은 전통 기예 제조자들에게 젊은이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창구로 안성맞춤입니다."
'조물제' 이후, 리우웨이쉐 스토어의 팔로워는 3만여 명으로 급증하였다고 합니다.
타오바오에 있는 무형문화유산 수공예점은 2만5천개가 넘고, 지난 6월 말 현재 5천여개 가까운 무형문화유산 관련 점포가 타오바오 플랫폼에서 오리지널 보호 계획에 추가되었다는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무형문화유산 소비제품군에 대한 소비는 억대에 달하며, 주요 소비자들은 85년~90년대 이후 출생자들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타오바오는 리우웨이쉐가 젊은이들과 교류하는 장이 되었고, 위항의 작은 산골 마을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교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젊은이들이 일부러 타오바오점을 찾아와 위항 종이 우산을 결혼 우산으로 쓰려고 합니다. 이것들은 기능적인 제품일 뿐만 아니라, 감성적인 제품이기도 하지요."
리우웨이쉐가 말하길, 어떤 구매자들은 종이 우산을 사서 비가 오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종이 우산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네요. 그리고 종이 우산을 들고 무협지에 나오는 여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고 "천계를 걷는 협녀의 꿈"을 풀어준 스토어에 감사한다며, 리뷰란에 수백자씩 호평을 써준 구매자도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저 멀리 신장(新疆)에서 찾아온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요, 종이 우산을 사려는 것 외에도 그 안에 담긴 장인 예술 정신을 감상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천마행공(天马行空)의 상상은 이곳 종이 우산의 집 디자인 스튜디오 작업실에서 끊임없이 탄생하였고, 리우웨이쉐와 작업팀은 한 차례씩 혁신적인 탐색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리우웨이쉐는 전통 종이 우산을 젊은이들의 미적 감각에 맞추어 디자인하고 개량하였고, 이 결과 젊은층에서 유행하는 트렌디한 브랜드로 자리잡았습니다.
리우웨이쉐는 종이우산이 더 잘 쓰이도록 하기 위해서 수많은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전통 도화지는 투명하고 얇아서 찢어지기 쉽기 때문에 연하고도 내구성 좋은 수제 가죽종이로 바꿔보거나, 기름종이 우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무거운 통 대나무 대신 압축한 대나무를 사용하여 젊은 여성들이 들기에도 힘들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리우웨이쉐는 종이 우산의 내구도를 향상시켜서 1000번 까지도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수작업 전통 공예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리우웨이쉐와 스승들은 1년에 많아야 1000자루의 종이우산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생산량은 일반 양산소의 1만분의 1 수준에 불과하며, 종이우산 1개의 가격은 300~600위안에 이른다고 합니다. 종이우산은 제작부터 인도 시점까지 보통 7일에서 보름정도 걸린다고 하네요.
그들은 더 많은 젊은이들이 위항 종이 우산을 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십 년 동안 우산을 만드는 기술을 보호하는 것이 할아버지의 초심이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예전에는 우산 위에 그림도 많이 그리셨어요. 전시장에는 할아버지가 그렸던 우산도 있죠."
나이든 할아버지를 보며, 리우웨이쉐는 문화 유산은 젊은이들이 계승해야 하고, 나는 단지 운을 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한 세대에는 그 세대의 사명이 있습니다. 리우웨이쉐는 "우산을 만드는 작업마다 빈틈없는 협업이 필요합니다. 현재 팀에는 평균적으로 환갑이 다 된 4명의 스승님이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산 뼈대만 해도 좋은 대나무를 찾아 크기에 맞추어 대나무 통을 자르고, 또 맞춤 칼로 긁어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매끈하게 긁어낸 뒤, 우산 뼈대로 쪼개야 하죠. 일반적으로 대나무 통 하나가 50개 정도의 우산 뼈대로 쪼개집니다."
리우웨이쉐는 이런 것이 진짜 솜씨라며, 이 작업을 할 줄 아는 스승은 매우 적다고 합니다.
모든 전통 기술이 명맥을 잃고 사라진다는 것은 위항 종이 우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개된 정보에 따르면 중국은 무형문화유산 항목의 73%이상이 시골에 남아있다고 하는데요, 리우웨이쉐의 '종이 우산의 집'처럼 무형문화유산은 타오바오에서 새로운 전승의 길을 모색해나갈 수 있으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제공하고, 현지 문화 산업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농촌의 무형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농촌 진흥의 한가지 방법일 수 있습니다. 리우웨이쉐는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마을 사람들을 종이 우산 제작 공정에 참여하게 하였고, 위항 종이 우산도 시골 마을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하였습니다.
"종이 우산을 만드는 여러가지 과정들을 예전에 못해봤어도 괜찮습니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종이 우산 만들기의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어요."
리우웨이쉐는 위항 종이 우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현지 정부의 지원을 받아 2019년에는 '위항 종이 우산 핑야오 관(余杭纸伞瓶窑馆)'을 개관했습니다.
"저는 우산만 파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리우웨이쉐는 학술 세미나, 학생들을 위한 휴일 클래스, 국제 친선 문화강좌 개설 등 다양한 방식으로 위항 종이 우산의 매력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위항 종이 우산의 제작 공법은 내 손안에 있으니, 그런 식으로 남아서 적어도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종이 우산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자기 혼자서는 종이 우산을 만들어낼 수 없다며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리우웨이쉐는 마음 속으로 더 많은 젊은이들이 위항 종이 우산을 들고 일상 속에서의 정감과, 전통적이면서도 스타일리시한 느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판매량보다도 저는 위항 종이 우산이 가진 문화적인 요소를 미래지향적으로 추진하고 싶습니다."
그도 위항 종이 우산의 제작 기술이 저장성급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에 이어 갈수록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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