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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시대의 '전처혼'이란 무엇일까? 본문

Chinese Culture

청나라 시대의 '전처혼'이란 무엇일까?

hanyuku 2021. 12. 1.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요즘 중국에서 많은 남성들이 결혼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바로 경제적인 조건 때문이라고 하네요.

경제의 기초가 튼튼해야 상부 구조도 견실하듯이, 현대 사회에서 경제조건이 너무 나쁘면 혼인의 질에도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배우자를 고르는 기준 중 하나에 남성의 경제적 조건을 넣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요즘 중국에선 '가난한 사람들'이 장가를 못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오늘날 뿐만 아니라 고대(古代)에도 존재했었는데요, 그렇다면 중국의 고대엔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의 장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살펴볼 중국 기사에서는 청나라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이 장가를 못가서,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불가사의한 방법을 고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하는데요, 그 이야기가 대체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세 가지 불효 중 후대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효다

 

 

고대 봉건 통치 사회에서는 고대의 "예법" 관념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중 효도(孝道)는 고대 중국인들에겐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준수해야할 준칙이었습니다. 만약 어느 집 아이가 효성스럽지 못하고 경박하면 세간 사람들의 욕을 먹었고, 그 죄질이 무거웠다면 엄벌을 받았습니다.

 

 

고대 중국인들의 덕목과 도리 중에서 가장 으뜸이었던 것은 단연코 "효(孝)"였고, 이를 지키지 않는 것을 불효라고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세 가지 불효가 가장 심각한 불효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그 세 가지 불효 중에서도 으뜸은 바로 후대가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옛사람들은 빈천부귀(贫贱富贵)를 막론하고, 핏줄이 끊기지 않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한 집안에서 어느 세대에 후사가 없으면 그 대는 끊어지게 되는데요, 이렇게 집안의 대를 끊는 것은 온 집안의 죄인처럼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사람의 신분이 3,6,9 등급으로 나뉘어 있었고, 집안의 배경도 모두 달랐으며, 고관대작이나 부귀한 명문가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부자는 당연히 삼처사첩을 거느릴 수도 있었고, 의식주 때문에 근심하지 않고 풍요롭게 살았죠. 하지만 가난한 집안은 어떠했을까요? 자기 혼자도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아내를 맞고 아이를 낳아 기를 돈이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지 않아서 아내를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딸을 시집보내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결혼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세속의 관념에 못이겨 어찌되었든 자기 대에서 대가 끊어지게 하지 않으려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고, 결국 그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을 생각해내었습니다. 바로 아내 하나를 '찾아가는' 방법이라고 하네요.

 

 

 

 

 

가난해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니, 가난한 사람은 장가도 못 가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이러한 기형적인 사회 현상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내를 얻을 수가 없지만, 아이는 낳아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아내를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편, 어떤 집은 가정의 생활 형편을 조금이라도 개선해보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기에, 이러한 두 종류의 수요가 맞아떨어져 생겨난 것이죠.

 

 

아내를 얻긴 얻었지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던 가정에서는 "고객의 눈높이에 맞춘" 임대 사업을 생각해내게 되었습니다. 임대 상품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의 아내들이었죠.

 

 

이들은 아내를 임대, 전당(租赁、典当)을 주는 형식으로 일정한 형식에 따라 장가를 가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빌려주었고", 고객들에게 대를 이어주는 전통적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래서 장가를 가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일정한 돈을 지불하도록 해서 아이를 낳아줬는데요, 이러한 현상은 훗날 "전처혼(典妻婚)"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2. 전처혼(典妻婚)

 

 

임대차 거래는 예로부터 존재해왔고, 대여해주는 물건에는 차마(车马)도 있었고, 땅도 있고, 금전도 있었지만, 청나라에서는 아주 특이하고 병적인 임대 사업이 생겨났는데요, 그것이 바로 "임차 아내"였습니다.

 

 

청나라 때, 가난한 사람들이 장가를 못 가고, 가문의 대를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고안해낸 것이 바로 '전처혼' 이라고 합니다.

 

 

'전처혼'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남의 집 아내를 전당, 임대해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전처혼은 법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관헌에 저촉되거나 금지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적인 이유와 시대적 배경 때문에 전처혼은 여전히 금지되어 있긴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종종 벌어졌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처혼'이 비록 불법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체계적인 절차가 잘 갖춰져 있었다고 합니다. 우선 '전처혼' 역시도 부모의 명령이나 중매쟁이들의 말을 잘 따릅니다. 양가 부모와 양가 남편의 동의를 얻어 전문 소개업체가 소개를 했다고 하네요.

 

 

임대차 계약은 임차인이 일정 조건 이상을 합의한 뒤에 체결되었습니다.

 

 

계약 내용에는 임대차 쌍방의 이름, 주소, 임대금액, 시작시간, 종료시간, 임대기간 등 매우 상세히 정해놓았으며, 더 자세한 계약서에는 임대차 기간 내에 아내가 임차인을 위해 몇 명을 낳았는지, 그리고 아이 하나에 얼마의 보수를 더 받아야 하는지도 명시하였습니다.

 

 

임차료의 경우엔 '아내'의 조건을 따져서 결정하였는데요, 예를 들어 몸매, 외모, 나이, 출산 여부 등을 따져보고 조건이 좋을수록 가격이 비싸졌습니다. 세칙이 다 논의되고 나면 임차인도 장가가는 예절에 따라 아내를 맞이하였습니다.

 

 

 

 

 

보통 '전처혼' 기간은 3년에서 5년 정도였는데, '임대' 기간 동안에는 아내가 원래 남편의 집에 자주 들러 남편을 만날 수도 없고, 방을 같이 쓸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원래 집에 아이가 있다고 해도, 자주 들러 볼 수도 없고, 임대 기간이 끝난 뒤에 귀가해야 한다고 합니다.

 

 

3. 도덕 윤리에 어긋난다

 

 

오늘날 사람들은 '전처혼'이라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인륜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고 코웃음을 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봉건적인 예법과 도덕이 성행하던 시절, 여자는 "닭에게 시집가면 닭을 따라야 하고, 개에게 시집가면 개를 따라야 한다"가 원칙이었습니다.

 

 

이른바, '재가종부(在家从父)'라고도 하는데요, 일단 시집을 가면 부군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처혼'에서 아무리 여성이 이에 위화감을 느끼고 저항하려고 해도 그 당시 여성들에겐 선택할 권리도 없이 상품처럼 빌려주는 출산 도구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청나라에서 전처혼이 성행했지만,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나라(汉代) 시대까지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나라 시기에는 국력이 강했기 때문에, '전처혼'이라는 제도가 대귝의 이미지를 실추시킨다는 이유로 당시 관헌에 의해 금지되었고, 호된 타격을 받아 근절되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청나라에 이르러, 아내를 얻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자 '전처혼'이라는 낡은 관습이 다시 쓰이게 된 것이죠.

 

 

 

 

'전처혼'은 당연히 사람들의 괄시를 받았고, 이 관습에서 물건처럼 여겨지는 여자들이 불쌍하기도 하지만, 이는 결국 당시 사회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 관념의 일종이었을 뿐입니다. 당시 여성들의 고난이 그것 뿐이었을까요. 심지어 '전처혼'보다 더욱 비참한 행위도 많았다고 하니 안타깝습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8835491405514780893%22%7D&n_type=-1&p_fro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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