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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서 관동 지방으로의 이주붐이 일어났던 이유는?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 근대사에는 세 차례의 이주 붐이 일어났었는데요, 만리장성 서쪽으로 나가고, 관동쪽으로 진출하고, 남양 아래로 내려간 것(走西口,闯关东,下南洋)이 바로 그것이라고 합니다. 관동을 넘는 관문은 산해관(山海关)이고, 산해관은 만리장성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 천하제일관(天下第一关)이라고 불립니다. 산해관 북쪽에는 연산(燕山), 남족에는 발해(渤海)가 이어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청나라가 중원에 입성한 후, 장성은 철폐하면서 유독 산해관만은 남겨두었습니다.
관동을 넘으면, 산해관을 넘어 관동(关东) 지방에 도착합니다. 19세기 중국은 다사다난한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산동 지방은 식량이 부족하여 민생이 편치 않자, 대다수의 산동지방 사람들이 관동 지방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산동 사람들이 배를 타고 관내, 대련, 영구, 단동(关内,大连,营口,丹东) 지방으로 건너갔고, 관동 개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북 지역이 그렇게 추운데, 왜 산동 사람들은 양자강 아래 지역인 강절호(江浙沪) 지역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1. 천하제일관
<틈관동(闯关东)>은 그 시대 관동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천신만고 끝에 동북지역으로 와서 살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오늘 소개할 기사에서는 관동을 넘어간 진실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있습니다.
먼저, 틈관동(闯关东)이라는 세 글자를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동으로 이주했다고 하면, 동북지방 아래쪽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동북지방에는 인삼, 사슴 가죽, 청산녹수(青山绿水)가 있어서 환경이 좋고, 맛있는 것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정확하진 않습니다. 관동으로 이주했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엔 위법 행위였기 때문에, 몰래 갔다는 의미의 '틈(闯)'이라는 한자를 썼죠.
명나라 때 지금의 요녕성(辽宁省)은 당시 관헌의 지도 아래 이미 한인들의 대규모 이민 주둔지가 있었습니다. 명나라 말기 당시, 유목민족 만주족이 동북에서 한인에 대한 약탈과 학살을 자행하면서, 동북 지역의 상주 인구는 급감했습니다. 청나라 시기로 들어오면서, 만주족은 한족을 집단 학살하였고, 자신의 원천지에 외부 민족이 개입할 수 없다고 여겨서 남아있는 한인들을 추방하였습니다.
관동 안의 주요 관문은 산해관이고, 동쪽은 산해관의 동쪽을 가리킵니다. 1644년, 청나라 군대가 중원에 입성하였는데, 동북 지역은 청나라 용흥의 땅(龙兴之地)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파괴하지 않으려고 동북부를 금지구역으로 만들었습니다. 천하제일산해관이 경계가 되어 관내와 관외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여러 겹의 보호를 위해, 청나라 군대는 그 유명한 유조변(柳条边)을 건설하였고, 자신들의 용흥의 땅을 지키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했습니다. 청나라 조정은 이미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생각하였지만, 그 당시 인민들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한 중국 정세의 벽에 부딪혀있는데, 무엇이 반항을 억누를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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