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훠잉둥(霍英东) 사후, 10명의 아들들이 재산 분쟁..?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집안의 재산 분쟁은, 지금까지도 많은 가정에서 피할 수 없는 분쟁으로, 부모 사후 자녀들이 서로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공격을 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봉건 시대에는 황제의 권력 다툼이 더욱 큰 관심사였고, 이를 위해 서로 손발을 맞추기도 하였지요.
지금도 왕실부터 일반 부자들까지도 집안에서 이런 다툼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유명한 사회 활동가이자, 홍콩의 저명한 실업가로서, 훠잉둥은 그의 일생동안 국가화 사회 건설에 뛰어난 공헌을 하였고, 또한 스스로도 놀라운 경제적 부를 창출하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훠잉둥 선생의 아들들이 재산 다툼을 시작하였습니다.
본래의 안배
1923년, 훠잉둥(霍英东)은 홍콩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그 이후 항일전쟁의 발발 등 인생에서 큰 사건들을 겪었지요. 10대 때는 전쟁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다양한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뛰어난 비즈니스 마인드를 바탕으로 훠잉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바다에서 적하업무(驳运业务)를 하며 자신의 상업제국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기간동안 훠잉둥은 홍콩에서 대규모 선단을 조직하여 물자를 운송하였습니다. 훠잉둥은 개혁개방 이후 내지 건설에 투자하였고, 워터큐브(水立方,베이징 국가 수영센터) 건설을 위해 2억 위안을 무상으로 기부하기도 하였습니다.
훠잉둥은 중국의 건설에 이바지한 것이 너무나 많지만, 그런 인물이 세상을 떠난 뒤 자식들은 그가 미리 안배해놓은 것들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재산 쟁탈전까지 벌어져 세간의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였지요.
훠잉둥은 총 3명의 부인과, 13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그 중 아들은 10명, 딸은 3명입니다.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훠잉둥의 13명의 자녀들은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집안의 재산을 어떻게 분배하여 다툼을 피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훠잉둥은 걱정하였다고 합니다.
훠잉둥의 원래 계획은, 그의 모든 재산이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난 자녀, 특히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에게 상속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이러한 안배에서 큰아들인 훠젼팅(霍震霆)은 장래에 자신의 체육 방면의 일을 계속 해나가려고 했었고, 둘째 아들인 훠젼환(霍震寰)은 홍콩의 사업을 물려받고, 셋째 아들인 훠젼위(霍振宇)는 난샤(南沙)의 사업을 물려받을 예정이었습니다.
훠잉둥의 다른 자녀들은 훠잉둥이 직접 사업에 손대지 말것을 명령했으며, 다른 일을 하면서, 훠씨 집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면 모두 괜찮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부인에게 훠잉둥은 조용히 있으면서, 자신의 일에는 손대지 말 것을 주문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훠잉둥의 안배는 한마디로 말해서 집안의 사업을 모두 정실로 계승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사업을 나눠주진 않겠지만, 호위호식 할 수 있을 정도의 적지 않은 재산은 나눠줄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고대에 있던 가문의 적장자 상속제도와 같은 것이지요.
이 외에도, 훠잉둥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20년 동안은 분가를 허락하지 않는다고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년 만에 자신이 주문했던 모든 것을 날려버리게 되었습니다.
널리 좋은 인연을 맺다
2006년, 훠잉둥이 베이징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난 지 5년 후, 훠씨 일가의 재산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한 사람이 나서자 비로소 해결이 되었는데, 이 사람은 바로 둥젠화(董建华)입니다.
둥젠화는 홍콩 반환 후 첫번째 행정장관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둥젠화와 훠잉둥 사이에 과거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었습니다. 이 덕분에 훠씨 집안의 재산 다툼은 원만히 해결이 되었다고 합니다.
1982년 둥젠화의 부친인 둥하오윈(董浩云)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세계 7대 선박왕 중 하나이며, 홍콩의 유명한 4대 선박왕 중 하나였던 둥하오윈의 죽음은 그의 가족에게 큰 사건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둥하오윈이 세상을 떠난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해운업이 위축되던 시기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둥하오윈의 휘하에 있던 동방해외회사(东方海外公司)는 자산이 위축되고, 막대한 빚을 지게 되어 존망이 위태로웠습니다.
이 당시, 둥씨와 오랜 파트너였던 훠잉둥은 이 사실을 알고는, 두 말하지 않고, 즉시 둥씨의 회사에 미화로 억대의 돈을 쏟아부었습니다. 둥젠화 형제의 노력으로, 이 돈으로 가족 기업인 동방해외회사를 회생시켜 막대한 부채를 갚을 수 있게 하였고, 동방해외회사를 해운업의 신단(神坛)으로 복귀시켰습니다.
이 사건 이후, 둥씨 집안과 훠씨 집안은 더욱 가까워졌고, 훠씨 집안은 둥씨 집안에 대해 생명의 은혜를 받게 되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홍콩 반환 후, 훠잉둥을 필두로 한 지원 아래, 능력이 출중한 둥젠화는 홍콩 특별행정구 초대 행정장관이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둥젠화가 훠씨 집안에 줄곧 고마움을 느끼게 하였고, 이것 덕분에 둥젠화가 훠씨 집안의 재산 다툼을 보았을 때, 직접 끼어들어 분쟁 조정을 선택하게 된 것이지요.
가산 쟁탈전이 막을 내리다
훠씨 집안의 가산 재탈전이 전면전이 되고 난 후, 정실 부인이 낳은 훠젼팅과 훠젼위 그리고 다른 아들들 사이에 전쟁이 집중되었습니다. 훠젼팅은 훠씨 집안의 장자였지만, 자신의 동생들을 누르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이 싸움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지, 시종일관 이 싸움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쟁탈전에 참여한 사람들끼리, 오늘은 이걸 법정에 세우고, 내일은 저걸 법정에 세우는 난장판을 벌이게 된 것이죠. 심지어 훠잉둥의 기일에까지 소송을 벌였습니다.
홍콩 각계에서는, 결국 이것은 남의 집안일이므로 어느 누구도 감히 이 집안 싸움을 조정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당시 홍콩의 손꼽히는 갑부 집안의 재산 쟁탈전은 말 그대로 "신선 싸움(神仙打架)"이라고 할 수 있지요. 훠잉둥이 세상을 떠난 날로부터 따져보면 벌써 그 싸움은 10년 째였다고 합니다.
결국, 둥젠화는 이를 더는 두고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은혜가 깊었던 훠씨 집안이 곧 무너질 것 같은 것을 보며 그는 결국 참지 못하였습니다. 둥젠화 행정장관은 두 차례 홍콩의 특별 행정구 장관을 역임함으로서, 나설만한 체면도 있었습니다.
결국, 둥젠화는 훠잉둥의 생전의 뜻을 종합하여, 훠잉둥이 남긴 300억을 200억과 100억으로 나누었고, 200억은 정실 소생의 자녀에게, 나머지 100억은 다른 6자녀에게 주었습니다. 이로써 10년이 넘게 이어지던 훠씨 집안의 재산 다툼이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만약 둥젠화의 개입이 없었다면, 소모전이 계속될 지도 몰랐을텐데, 둥젠화가 보여준 친구로서의 행보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이러한 소모전은 가문의 쇠락을 초래할 뿐,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훠씨 가족들이 깨닫길 바랍니다.
<참고기사>
霍英东去世后,10个儿子争了10年遗产,最终董家一出面就解决问题
家产争夺,一直是许多家庭无法逃脱的一场争端,在父母离开之后,子女往往为了让自己得到更多的利益,会通过互相攻击来获得利益。在封建时代,最令人关注的恐怕就是皇帝的皇子之间的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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