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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왕조 멸망후 108년...황릉 묘지기들은 아직도 있다?

hanyuku 2020. 6. 8.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청나라가 망한지 약 10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요,

청나라 황족들이 묻힌 황릉은 아직도 묘지기가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 묘를 지키고 있으며, 그들의 월급은 누가 주는걸까요?

이와 관련한 중국 기사를 보면서 알아보아요~

 

 

 

 

대청황릉(大清皇陵)

 

 

대청황릉은 청군(清军)이 입관(入关)한 이후 마지막 황제가 묻힐때까지 총 9대 황제의 묘역을 총망라했는데, 이들 9명의 황릉은 각각 하북성 준화시(河北遵化)와 역현시(易县)에 방대한 규모로 위치해있습니다. 두 묘역 사이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다시 청동릉(清东陵)과 청서릉(清西陵)으로 구분되었습니다.

 

 

청나라 황조의 능원은 기본적으로 명나라의 규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만, 그 보다 배치가 더 성숙해진 점이 특징입니다. 남에서 북으로 석상생(石像生), 대비루(大碑楼), 크고작은 석교(石桥)들, 용봉문(龙凤门), 소비정(小碑亭), 신주고(神厨库), 동서조방(东西朝房), 융은문(隆恩门), 동서배전(东西配殿), 융은전(隆恩殿), 유리문(琉璃门) 등의 건축물이 있습니다. 또한 제릉(帝陵) 옆에는 보통 황후와 빈비의 침릉(寝陵)이 있습니다.

 

 

 

 

이 중 청동릉은 1661년에 건립되어 역사 중간에 247년이 흐른 뒤 비로소 종언을 고하였는데, 여기에는 효릉, 경릉, 유릉, 정릉, 혜릉(孝陵、景陵、裕陵、定陵和惠陵) 등 다섯 개의 제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청동릉에는 이 밖에도 14명의 황후와 136명의 빈비가 묻혀있습니다.

 

동서릉 이후 청나라 초년의 역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인 관외삼릉(关外三陵)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는 입관 전의 황제와 후비들이 묻혀 있습니다. 관외삼릉은 청영릉, 청복릉, 청소릉, 청동경릉(清永陵、清福陵、清昭陵和清东京陵)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그 중 청복릉에는 혁혁하고 유명한 누르하치(努尔哈赤)가 묻혀있습니다.

 

청서릉과 청동릉 이 두 개의 거대하고 보존이 잘 된 능원은 2000년 11월에 24번째 세계유산위원회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처럼 거대한 청황조의 묘역은 수릉인의 보위와도 관계있었습니다.

 

 

 

청나라 때의 수묘인(守墓人)

 

 

청황조는 수묘인 제도를 두었는데, 이 제도는 매우 삼엄하고 엄격하여 성청시대(盛清时代)때 수묘인은 비천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매우 영광스러운 직업으로서, 오직 황족과 팔기의 자제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대우였습니다.

 

 

 

 

고대에 귀신을 경외하던 이들에게 황릉을 지키는 것은 제왕의 존엄을 지키는 것과 같았고, 수릉을 지키는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벗어나는 자리였으며, 그 존재는 청조 때 그 자체로 특권의 상징이자 영광의 자리였습니다. 무덤을 지키는 사람이 제왕의 명을 직접 따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그들의 제왕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전성기의 청나라 때는 수묘인의 선택에 엄격한 기준을 두었고, 기본적으로 세 부류를 주요 선발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제1부류는 내무부가 지명한 전문 수묘인이고, 제 2부류는 팔기의 자제 중에서 선발된 수릉위사였으며, 제 3부류는 조정이 임명한 수호대신입니다.

이전 두 부류의 영광에 비해 조정이 임명한 대신은 징벌적 의미를 지녔습니다.

왜냐하면, 청황릉은 당시의 권력의 중심지였던 수도와는 거리가 있어, 권신을 황릉으로 전근시키는 것 자체가 바로 권력 중심지에서 축출했다는 의미이며, 여러 신하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주는 징벌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은 종신직이 아니고, 보통 임기가 끝나면 다시 수도로 송환되는 것이었습니다.

 

 

 

 

전문 수묘인과 팔기의 자제 중 선발된 사람들은 대부분 묘역 조성 이후 베이징과 관외에서 특별히 파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수입원은 청나라 조정이 직위별, 품위별로 나눠주는 두둑한 녹봉이었습니다.

 

수릉생활이 힘들고 지루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비교적 좋은 생활환경과 특별한 정치적 지위를 가지고 그들의 가족을 포함하여 잘 배치될 수 있도록 높은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또한 동시에 이 두 종의 수묘인 신분은 기본적으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며, 그 직책은 대대로 황릉을 지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 부류는 본질적으로 청나라의 특권층입니다. 이러한 신분은 또한 청나라 조정의 기개를 나타내며, 귀족으로서 황제의 망령을 지키는 것은 죽은 제왕에 대한 최대의 경의이자 경건한 관습이었습니다.

 

물론 묘역을 지키는 일은 단순히 수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 보수 등의 여러 일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물 준비와 교체, 그리고 정기적인 제사 행사입니다. 이런 번거로운 일 때문에 비록 수묘인들 사이에서도 명확한 권한과 책임의 구분이 있었으며, 월권이나 책임을 전가하는 일 등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위해 청나라 때 수묘인들은 사전에 전문적이고 엄격한 훈련을 거쳤습니다.

 

물론 청나라 조정이 주는 봉록은 이런 신분이 높은 수묘인들의 일상을 지탱하기에 충분하였지만, 청나라가 쇠락의 길로 들어서다가 멸망한 이후에는 누가 무덤을 지켰을까요?

 

 

 

 

청말민초(清末民初)의 수묘인

 

 

청나라 후반 조정 관리들은 부패하고 우매하여 국력이 쇠약해졌고, 막대한 은전이 들어 청나라 정부는 수입보다 지출이 컸습니다. 조정 관리들은 녹봉이 삭감되었는데, 하물며 능원 안의 수묘인들은 오죽하였을까요.

 

처음엔 이들을 소홀히 하다가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건립된 후, 수묘인들은 방치되었습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가 퇴위한 후, 황족 후손들은 황릉 보호를 위해 돈을 모아서 몇 명의 수묘인들을 찾는데 주력했습니다. 더욱 마음을 쓰는 사람들은 자진해서 황릉 묘역으로 가서 조상들의 묘를 지키기도 했습니다.

 

비록 푸이가 물러났을 때, 민국 정부는 신분 계급을 이어받아 황족을 우대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여기에는 청나라 황릉을 보호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청 황릉에 민국이 병사들을 보내 경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청나라 황릉에는 민국 정부의 월급을 받는 병사들, 황족들이 돈을 모아 영입한 수묘인, 그리고 선조의 마음을 간직한 자발적 수호자가 3개 조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 조의 수비에도 불구하고, 쑨뎬잉(孙殿英)이 공공연히 도굴을 하거나, 이 외에도 수릉대신(守陵大臣)이 스스로 도굴을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1924년~1928년 사이에 황릉에서 유실된 귀중품이 한 두개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지금 과거 역사를 연구하는데 헤아릴 수 없는 손실을 초래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당시 수묘인들은 이러한 도굴 행위를 막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바로 쑨뎬잉 부대가 군부대이기 때문입니다. 군 부대가 도굴을 하는데, 누가 목숨을 걸고 이를 막을 수 있었을까요. 두번째 이유는, 묘지를 지키는 감시자들의 도덕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마음먹고 묘 안의 귀중품들을 슬쩍 빼돌려 팔아치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당시 시대적 배경 때문인데, 나라가 위난에 빠져 난장판으로 변하자 황릉에 대한 통제와 보호는 어물쩍 넘어가는 분위기였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날 청나라가 멸망한 지 108년이 되었지만, 그 역사적 의미와 연구 가치는 지울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멸망한 나라의 묘지를 지키는 수묘인들을 고용해 월급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수묘인들이 많지는 않지만, 그 중 다수는 과거 전승된 황릉의 호위자이며, 그들이 아직까지도 떠나지 않은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마음속의 신념과 자부심입니다.

 

백 년의 격동과 전승(传承)을 거친 수묘인들은 청나라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청 황릉을 지키며 자신들의 신념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hare?context=%7B%22nid%22%3A%22news_8975977844448836747%22%2C%22ssid%22%3A%22%22%7D&pageTyp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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僵卧孤村不自哀,尚思为国戍轮台。悲主之伤,痛主之情,自身处境如何又何妨,一心只愿为国保疆扩土。这是一个关于守护的话题,之前莫论如何,唯谈今后应当如何。 清朝距今早已灭亡了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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