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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이 대만으로 쫓겨갈 때도 이 세 사람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그가 대만으로 함께 데려간 이들은 누구? 본문
장개석이 대만으로 쫓겨갈 때도 이 세 사람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그가 대만으로 함께 데려간 이들은 누구?
hanyuku 2020. 5. 19. 08:00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1949년, 중국 본토에서 장개석의 군영은 힘을 잃고 맞은 편의 대만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장개석은 이사 과정에서 본토에서 수탈한 금은을 대량으로 가져간 것 외에 세 사람을 함께 데려갔습니다. 장개석은 이들 세 사람을 '나라의 보물'이라고 여겨 반드시 데려가야 된다고 하였는데요, 과연 이 세 사람들은 누구이며 왜 '나라의 보물'로 여겨졌을까요?
공덕성(孔德成)
첫 번째 인물은 바로 공덕성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거의 오래된 문명에는 통치자를 위한 문화의 통로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통치자의 권력 장악의 합법성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 확산시킵니다. 유럽에서는 교황이, 서아시아에서는 대 이맘(이슬람 교단의 지도자)과 대 아홍(이슬람 교리 교사)가 그 역할을 맡았으며, 동아시아 중국에서는 유가의 성인으로 불린 공자의 후손들이 대대로 맡았습니다.
공덕성은 이와 같은 공자의 후손으로 중국에서는 특별한 위치에 있습니다.
유가 사상은 서한 이후 역대 왕조의 공식 사상으로서 자리매김 하였고, 공자를 추앙한 왕조는 한족 왕조들 뿐만 아니라 북위(北魏)와 같은 호인(胡人) 왕조, 금조(金朝), 청조(清朝) 처럼 중원을 차지한 왕조들도 있었습니다. 서하(西夏)처럼 중원을 차지하지 않았던 왕조의 정권조차 공자를 '문선황제(文宣皇帝)'로 추앙했습니다.
공자의 이런 지위로 공자의 후손들도 덩달아 덕을 보았기 때문에, 이천 년 동안 비록 중국에서 세대 교체가 이어지고는 있지만 공자의 후손들은 역대로 존귀한 사람들로 여겨지며 작위와 숭고한 지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중화민국 초년에 원세개는 황제가 되려고 준비를 할때, 능청을 부리며 공자의 정통 후손에게 선위를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이와 같은 말은 인사치레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해 중국에서 공자의 직계 후손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장개석이 대만으로 갈때 함께 끌려간 공덕성은 2008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학문만을 하고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은 채 평생을 살았습니다.
장은부(张恩溥)
두 번째 인물은 바로 장은부입니다.
장은부는 도교 정일파(正一派)의 주교인 장천사(张天师)입니다.
민간 전설에 따르면 장천사는 콩을 뿌려 병사를 만들고, 바람을 불러 비를 내리게 하고, 심지어 하늘의 병사도 모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개석이 장은부를 데리고 대만으로 간 것은 이러한 재주가 있다고 믿어서인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산동성의 공부(孔府)와 견줄만한 것은 강서 용호산의 천사부(天师府)이고, 공자의 정통 후세에 비할 만한 것은 천사부의 역대 천사(天师, 도교의 도사)들이었습니다.
도교 역사에서 천사도(정일파)(天师道(正一派))는 도교의 가장 오래된 분파이지만, 송나라 때 전진교(全真教)의 발흥과 함께 명청 때 가짜 탁도교의 일부 민간 종교(예를 들어 백련교의 일부 변종)가 유행하면서 정일파의 영향력도 약해졌습니다.
적어도 정일파의 도교에서의 영향력은 전체 판을 장악할 정도로는 역할을 하지는 못합니다.
적어도 청나라에서는 도교의 가장 큰 종파가 전진교(全真教)였으며, 정일교(正一教)는 전진교에 버금가기는 하지만 정일교주의 영향력은 고작 3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에 생각컨대, 장은부는 유가의 '문선왕(文宣王)'인 공덕성과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도교의 정통있는 종파의 교주였기 때문에 장개석은 장은부를 대만으로 함께 데려가겠다고 고집했습니다. 장은부는 장개석과 함께 대만으로 건너가 1969년에 우화등선(羽化登仙)할 때까지 쭉 타이베이에 있었습니다.
장가활불(章嘉活佛)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인물은 네이멍구의 장가활불입니다.
티베트 불교에는 4대 활불(活佛, 살아있는 부처, 라마교의 수장)이 있는데요, 그 중 장가활불은 세 번째로, 대청문수황제(大清文殊皇帝, '문수'는 청나라 황제에 대한 불교의 존칭으로, 선통제(宣统帝)는 청나라의 마지막 문수황제였다.)가 장가활불을 내몽고의 활불로 책봉하여 내몽고를 관장하였습니다. 마지막은 철부존단바활불(哲布尊丹巴活佛)인데, 그 도장(道场)은 외몽고에 있습니다. 근대사에서 철부존단바활불은 풍운아였는데요, 대몽골의 황제로 자립했고, 러시아 사람들과도 어울렸다고 합니다.
이 4대 활불 중, 첫째와 둘째 활불은 명목상으로 장개석을 수장으로 인정했지만, 실제로 장개석과 교집합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철부존단바는 1920년 대에 세상을 떠났지만, 오히려 장가활불은 장개석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가활불은 티베트 불교의 활불로서, 한족 지역 내에서는 신도가 매우 적은데요, 그렇지만 장개석은 장가활불을 함께 데려가는 것을 고려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한족 불교의 체계는 매우 방대하여, 하나의 종파를 관장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비록 불교에는 법화종, 선종, 정토종이 존재하지만 이 종파에는 문파를 호령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장문(掌门)의 신분을 갖추고, 장개석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장가활불 하나 뿐이어서 장개석은 장가활불을 대만으로 데려왔습니다.
솔직히 공덕성과 장은부는 대만에 와서도 별 탈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만 역시 한족 문화가 지배적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장가활불은 대만에서 대초원의 라마 사원을 자주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장가활불은 1957년 3월 4일, 타이베이에서 입적하여 장개석이 친림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하늘이 어둑어둑하고 햇빛이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구름이 걷히고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아 피어올라 마치 갓 피어난 연꽃처럼 눈부시게 빛나며 십리를 향긋하게 물들였다고 합니다.
장개석이 대만으로 데려간 세 사람은 뛰어난 과학기술을 가진 사람도, 특이한 기능을 잘 하는 사람들도 아니지만, 유교, 도교, 불교의 대표들이었습니다. 중화문화의 틀은 이들 3대 원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장개석은 대만에 가면서 문화사막이었던 곳에 이들 세 사람을 데려감으로써 문화를 충족시켜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기사>
장개석의 이와 같은 선택은 오늘날 돌아보았을때 좋은 선택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문화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았던 것은 높이 사지만, 그 문화가 기존의 문화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로 발전하는 방향에 가치를 두었다면 혹시 또 다른 미래를 가져왔을지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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