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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국우민(忧国忧民)의 태도로 참된 도교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한, 리위안퉁(李圆通) 도사의 인생 이야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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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국우민(忧国忧民)의 태도로 참된 도교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한, 리위안퉁(李圆通) 도사의 인생 이야기

hanyuku 2022. 5. 2.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유교, 도교, 불교는 줄곧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유교는 정통으로 받아들여져 통치자들의 추앙을 받아온 반면, 도교는 한동안 국교였었고, 이 둘에 비해 불교는 비교적 외래자(外来者)였습니다.

 

 

"도사는 난세에 하산하고, 성세에 산을 봉한다(道士乱世下山,盛世封山)"는 말은 도교가 오랜 세월 중국 역사 속에서 우국우민(忧国忧民)의 형태로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정말로 중국 역사 속에서 도교의 도사들은 국가의 역사적 변혁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요, 오늘 기사에서 소개하는 인물이 바로 국가와 백성을 위해 걱정하는 도사였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인지 함께 살펴볼까요?^^

 

 

 

 

 

1957년, 베이징에서 전국도교협회(全国道教协会)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에는 아국, 아군(我国、我军) 창건자인 주더(朱德)도 끌어들일 정도였었습니다. 회의장에서 '리위안퉁(李圆通)'이 연설을 하자, 주 총통이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쳤다고 하네요. 리위안퉁은 현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도사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리위안퉁은 왜 이렇게 유명한 걸까요? 모든 것은 그의 인생 경험부터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합니다.

 

 

 

 

 

리위안퉁의 이야기

 

 

대영제국의 포격으로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던 청나라의 문이 열렸고, 난징조약(南京条约)이 체결되면서 반식민지, 반봉건사회로 접어든 청왕조 사회에서,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이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1878년, 리위안퉁은 허베이성 만청현(河北满城县)의 한 표사(镖师, 고대 중국의 운송, 보험, 경비를 담당하는 민간 보안원)의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훈련을 받고 자란 그는 이러한 무술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의협심이 강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표국(镖局)의 사업이 갈수록 나빠지자, 아버지처럼 표사가 되려고 하지 않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름을 숨긴 채 군에 입대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청나라 왕조는 이름뿐인 중국 정통 정권이었기 때문에, 리위안퉁은 처음에는 국가를 도와 만주족 정부를 몰아내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지만, 군대 생활을 하면서 갈수록 청나라 왕조는 구제불능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당시 군대에는 평민은 소수에 불과했고, 청나라 왕조의 이른바 귀족 자제들이 더욱 많았는데요,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그저 한낱 벼슬이라도 하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군대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리위안퉁은 이런 환경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군대를 떠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망망인해 속에서 자신이 스스로 어찌해야할 것인가를 생각하던 때, 가족들의 복을 빌기 위해 한 도교의 사원에 들렀습니다. 그는 원래 가족들의 복을 빌러 왔지만, 도사들의 독경 소리가 들리자 소란하던 마음이 안정되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교 사원에 남기로 결심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도교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았고, 그저 사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자신이 남아있을 기회를 얻었는데, 오래지 않아 그 역시도 도경(道经)을 따라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중의학 의술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몇 년간의 연구 끝에 그는 침술 한 벌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병이 나서 복을 빌러 사원에 왔다가 그의 치료를 받고 점차 완쾌되는 병자들이 늘어나자,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명성은 부근에 널리 퍼지기 시작햇습니다.

 

 

이때, 사원에 왕용칭(王永清)이라는 도인이 찾아왔는데, 이 도인은 도교에서 매우 명성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귐을 나누는 가운데, 서로를 매우 존경하게 되었고, 왕용칭은 리위안퉁에게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 되었습니다. "위안퉁(圆通)"이라는 두 글자는 바로 왕용칭이 그에게 지어준 도호(道号)입니다.

 

 

 

 

 

공문(空门)에 은거하며, 대의(大义)를 잊지 않다

 

 

그 격동의 나날들 속에서도 사원은 평화로웠고, 리위안퉁의 도술은 점점 더 정교해졌으며, 의술은 더욱 진보하였습니다. 인근 백성들이 병에 걸리면 그를 찾아와 치료를 청했는데, 침 몇 개만으로 환자가 완치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왕용칭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자, 현지인들은 그를 '살아있는 신선'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매우 평온했지만, 밖에서는 항일 시기에 이르러 전 국민이 힘을 합쳐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웠습니다. 리위안퉁이 있던 이 사원이 있는 곳은 량야산 치판퉈(狼牙山棋盘陀)에 위치해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중국 교과서 상에 나오는 "랑야산의 다섯 용사(狼牙山五壮士)"에서 말하는 그 랑야산이라고 합니다.

 

 

 

 

 

그 시기, 전사들은 이곳에 근거지를 만들어 게릴라를 전개하였는데, 리위안퉁은 나라의 원한과 가정의 원한을 잊지 않고 팔로군이 현지에서 게릴라를 일으키자, 음식을 보내왔으며, 전사들이 다쳤을 때는 밤낮으로 전사들의 상처를 치료해주었습니다.

 

 

또한, 일본 침략에 맞서 싸울 것을 호소하며, 팔로군과 현지 민중 사이의 가교가 되어주었는데, 나중에 왜구의 "3개월 중국 전면점령" 구호가 산산이 부서지자, 왜구는 분한나머지 소탕에 나섰습니다.

 

 

그들은 대량의 군대와 중화기를 가지고 화북지역에서 반격을 하였고, 랑야산에 주둔한 팔로군은 배신을 당하였습니다. 일본군은 화력을 모아 이곳을 포위하고 있었죠.

 

 

 

 

 

양청우(杨成武)는 즉시 결단을 내려 이동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역시도 그 길로 가야 일본군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태였죠. 이때 리위안퉁이 그에게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양청우는 그를 매우 신뢰하였고, 그래서 리위안퉁은 팔로군과 민중을 데리고 랑야산으로 들어갔고, 양청우는 시간을 벌기 위해 팔로군 한 소대를 다른 쪽으로 보내어 적의 화력을 끌어당겼습니다.

 

 

리위안퉁의 도움으로, 팔로군은 포위망을 벗어나는데 성공하였지만, 남은 군대는 적에게 고문과 협박으로 자백을 강요받을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잇달아 벼랑 아래로 뛰어내렸습니다.

 

 

 

 

 

주 총통(朱老总)의 초청

 

 

팔로군을 포위망에서 데리고 나온 리위안퉁은 자신의 제자와 남은 팔로군을 안심시키지 못하고 곧바로 귀로에 올랐지만, 사원에 돌아와보니 사원 안에 시체가 들판에 널려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슬픔을 참으며 시신을 묻어주었고, 절벽에서 뛰어내렸던 오장사(五壮士) 두 명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일본군에게 들킬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해 생존자를 치료한 끝에 두 전사의 목숨을 구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두 전사들은 완쾌한 후, 다시 부대로 돌아가 혁명을 계속하였고, 리위안퉁도 사원을 떠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전란으로 부상당한 백성들과 혁명 전사들을 구하였습니다. 그의 명성은 전사들의 칭송과 함께 팔로군 사이에서 높아져갔습니다.

 

 

 

 

 

해방 이후, 리위안퉁은 다년간의 성명으로, 1957년에 개최된 전국도교협회에 초청되어 참가하였고, 주더(朱德)도 팔로군의 은인이 회의장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는 회의장에 나와 리위안퉁 도장(道长, 도사의 존칭)을 보려고 하였습니다.

 

 

회의에서 리위안퉁은 도교협회의 구성원들에게 우리 당과 인민정부의 집권이념을 깊이 피력하여 우리 당이 집권을 더욱 잘 전개하는데 크게 기여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여러 도우(道友) 여러분, 우리는 나라를 위해 단결해야 하고, 국민이 행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고 말했습니다.

 

 

주 총통은 회의가 끝난 후, 리위안퉁을 베이징에 오랫동안 머물게 하면서, 병원에서 침구 의사와 정협 위원으로 활동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리위안퉁은 주 총통의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중국에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으니 생활이 점차 좋아질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자신은 계속해서 도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맺음말

 

 

훗날, 다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리위안퉁의 발자취는 화북, 화중으로 퍼져나갔고, 그의 명성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았습니다.

 

 

그의 마지막 소식은 산시성 종남산루(陕西终南山楼)에 있는 관대(观台)에서 학을 타고 서쪽으로 갔다(도교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은유적 표현)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번에 그는 진정으로 도법을 따라 떠나게 되었고, 남은 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간직될만한 그의 공헌과 이름뿐이었습니다. 정말 존경받을만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참고기사>

1957年,朱德极力挽留李圆通道长留在北京,为何道长没有答应? (baidu.com)

 

1957年,朱德极力挽留李圆通道长留在北京,为何道长没有答应?

在我国历史中,儒道释三教一直扮演着重要的角色。其中,儒家一直被奉为正统,深受统治者推崇,而道教则在一段时间内成为国教,与这两者相比,佛教则显得比较外来者了。 都说“道士乱世

mbd.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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