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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자리 그룹(嘉里集团)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는 누구?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2000억 위안의 몸값을 자랑하는 궈허넨(郭鹤年)은 아시아 설탕왕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이 이름만 들어보면 생소할 수도 있지만, 중국에서는 진룽위(金龙鱼)라는 잘 알려진 식용유 브랜드 이름은 대부분 들으면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진룽위는 사실 궈허넨 상업제국의 한 갈래라고 하네요.
많은 사업가들이 그렇듯, 궈허넨에게도 여러 자녀들이 있는데요, 그에게는 아들 셋과 딸 다섯이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재벌 사업가들은 후계자들을 선택할 때 주로 아들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지만, 궈허넨은 막내딸을 선택하였다고 합니다.
1. 아시아의 부유한 상인
궈후이광(郭慧光)을 소개하기 이전에 먼저 궈허넨의 전설적인 인생 스토리를 살펴봅시다. 궈허넨의 본관은 푸젠성 푸저우시(福建省福州市)이며,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말레이시아에서 사탕수수 사업을 하였습니다. 가정 형편이 넉넉했던 그는 좋은 교육을 받았고,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말레이시아가 일본의 침공을 받아 온 나라가 거의 침체에 빠져들었습니다. 전쟁 승리 이후, 당국에서는 물품 통제를 실시하였고, 이는 사회 전반적으로 소비재의 부족을 초래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궈허넨의 아버지는 정치계 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쌀과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을 수 있었고, 이러한 편의에 힘입어 궈씨 가문은 말레이시아 전역의 곡물시장을 빠르게 장악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은 궈허넨은 기존의 궈씨 집안의 사업에서 한 발 더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다른 분야에도 접촉하고 진출하였습니다. 식량과 기름으로 시작한 궈씨 가문의 사업은, 십 년 만에 해운, 금융, 미디어, 부동산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였고, 유명한 샹그릴라 호텔은 궈허넨이 직접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2. 후계자 선택
아시아 전통 문화의 영향을 받아, 궈허넨은 처음엔 맏아들인 궈콩청(郭孔丞)에게 자신의 상업제국을 물려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 궈콩청은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줄 생각은커녕, 유명 가수 덩리쥔(邓丽君)과 연애에 빠져 있는 등 바람둥이 행세를 보였습니다.
궈콩청이 이렇게 연예인과 함께 하는 것은 궈허넨의 어머니가 보기에 궈씨 집안의 신분을 욕되게 한 것처럼 보여 노여움을 샀습니다. 결국 할머니의 간섭으로 궈콩청은 덩리쥔과 헤어져야 했습니다. 그러자 궈콩청은 더더욱 가업을 물려받기 싫어하였고 화를 아버지에게로 돌렸습니다.
큰아들의 바람둥이같은행세 때문에 궈허넨은 둘째 아들인 궈콩옌(郭孔演)에게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마음이 있었던 궈콩옌은 샹그릴라의 집행 부장을 자처하였고, 아버지에게 좋은 성적표를 드려서 자신을 증명해보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사업을 할 수 있는 재목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뿐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 유명한 샹그릴라 호텔은 궈콩옌의 관리 하에 적자 신호까지 나오게 되었죠. 이와 동시에 남동생이 샹그릴라의 집행장이 되자 궈콩청은 궈콩옌과 다시 관리권 다툼을 시작하였습니다. 형제의 다툼을 지켜보면서 궈허넨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죠.
첫째 부인 소생의 두 아들은 업무 능력이 안 되고, 권력을 놓고 서로 다투기만 하여 노년의 궈허넨은 이같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둘째 부인 소생의 딸에게 눈을 돌렸죠. 이 자녀들 가운데서도 궈후이광(郭慧光)은 단연코 우수한 딸이었습니다.
형제들이 권력을 다투는 동안, 궈후이광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녀는 하버드대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비록 그녀가 재벌가 출신임에도 그녀는 집안의 권력 다툼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버드 졸업 후에는 미국 JP모건체이스의 애널리스트로 일하다가 2003년에야 가족기업으로 복귀하였죠.
복귀한 이후, 궈후이광은 직접 임원이 되기는 커녕, 밑바닥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화남조보(华南早报)>에서 꼬박 1년여간 기자 생활을 한 이후에야 비로소 이사회에 들어가 집행이사를 맡았습니다. 분명 사업에 대한 마음도 있고 겸손한 딸이 있는데 궈허넨이 싫어할리가 있을까요.
당초 둘째 부인 소생의 장녀였던 그녀가 가지고 있던 모회사 지분은 3% 안팎으로, 다른 형제들에 비해 크게 못 미쳤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만에, 궈후이광의 지분은 계속 상승하였고, 오히려 두 오빠들의 지분은 계속 하락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바로 궈후이광이 아버지의 환심을 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샹그릴라 집행장 자리에 궈콩옌이 앉게 된 이후, 형제의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인 궈허넨은 아들들의 능력의 한계를 알면서도 가족애를 손상시키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그는 궈후이광을 서서히 자리에 올려놓는 부드러운 방식을 택했습니다.
궈허넨의 첫걸음은 형제간의 권력 다툼을 틈타, 궈후이광을 사외이사로 앉히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궈허넨의 이와 같은 행보는 당시엔 큰 파장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되돌아보니, 이와 같은 행보는 궈허넨이 둘째 부인 소생의 장녀에게 호텔 산업을 안정적으로 넘겨줄 것을 시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샹그릴라에서 궈후이광의 위상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습니다. 2016년, 궈후이광은 샹그릴라 대표이사와 이사회 부회장이 되었습니다. 이듬해, 궈콩청은 이사회 의장 자리에서 물러났고 대신 궈후이광을 내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호텔 수십 개를 정식으로 물려받은 그녀는 일약 수백억 위안대의 여성 부호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사업에서도 뛰어난 성취를 보인 궈후이광의 결혼생활도 부러울 정도로 행복하다고 합니다. 2006년, 궈후이광은 우지린(吴继霖)이라는 멋진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우지린은 프린스턴대에서 정치학 학위와 스탠퍼드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우지린의 할아버지는 "꽁즈멘 대왕(公仔面大王)"이라 불렸던 저우원쉬안(周文轩)입니다.
우지린은 궈후이광과 결혼하기 이전에 뉴욕의 한 대형 증권사에서 재경분석사로 일했으며, 매달 좋은 수입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우지린은 자신의 커리어를 접고 자리 건설(嘉里建设)에 들어가 아내의 일을 돕기로 결심하였고, 지금은 자리 건설의 대표이사가 되었습니다.
일찍이 형제들이 다투고 있을 때, 궈후이광은 집안 권력투쟁에 가담하기는커녕, 유학을 떠나 스스로 업무 능력을 향상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귀국 후, 궈후이광은 밑바닥부터 시작하여 그룹 전체의 운영패턴을 잘 파악하였고, 또 한번 권력을 잡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궈후이광은 아버지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하여 샹그릴라의 장악력을 차근차근 얻었고, 자리 그룹(嘉里集团) 전체에서도 영향력을 키워갔습니다. 궈허넨은 아직 후계자 인선 발표를 미루고 있지만, 궈후이광이 희망적이라는 예측은 분명해보입니다.
<참고기사>
父亲坐拥2000亿身家,在55岁时才生下她,如今她继承数十个酒店 (baidu.com)
父亲坐拥2000亿身家,在55岁时才生下她,如今她继承数十个酒店
坐拥2000亿身家的郭鹤年,被称作亚洲糖王。提到这个名字,或许有些人还会感到陌生,但提到金龙鱼这个家喻户晓的粮油品牌,绝大多数人应该都非常熟悉。可能很多人不知道,金龙鱼实际上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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