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yuku
양돈 전문가 거요우(葛优)의 배우 성공기?!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양돈 전문가"도 배우가 되고 싶다.
1995년, 유명하고 돈이 많은 거요우(葛优)는 금빛 찬란한 그의 보물상자에서 350만 위안을 꺼내, 베이징 싼환(三环)에 있는 집 네 채를 단숨에 사들였습니다.
지금 집값이 이렇게 많이 오를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었을까요? 지금 거요우는 그야말로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거요우는 미숙아로 태어나 베이징 영화 제작소 울타리 안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 거춘좡(葛存壮)은 베이징 영화제작수의 배우였고, 어머니 스원신(施文心)은 베이징 영화 제작소의 각본 에디터였습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베이징 영화 제작소 사람들의 자제들로 밝고 명랑한 성격이었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린 거요우는 내성적이었고 부끄럼 타는 아이였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에 따르면, 유치원 선생님이 강제로 무언가를 시켜도 아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배짱을 부리는 바람에, 아들이 앞으로 연기자로 발전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 거요우는 또래의 아이들처럼 장난이 심했습니다. 수업 중에는 공공연히 수업 질서를 어지럽히고, 수업 후에는 강단위에서 아버지의 영화 속 연기를 흉내내어 친구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까불고 다니던 탓에 성적은 별로였지만, 거요우는 그림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1976년, 고향 시골에 내려가서 인민공사의 생산대에 들어가 정착하며 살던 시절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때 거요우는 몸이 여위고 허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작은 동물들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돼지에게 먹이를 주곤 했습니다.
그 시절, 그는 돼지를 잘 쳤고, 돼지를 잘 키우기 위해 돼지우리 짓기, 돼지 밥 삶기, 어미돼지의 출산에 대해서도 배웠다고 합니다.
1978년, 거요우는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 속에서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림 솜씨를 살려 예술 전공에 응시하고, 앞으로 베이징 영화 제작소나 무용 미술이나 사진 작가로 일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요우는 굳이 부모가 바라던 그 길을 걷지 않고 배우가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부모는 아들이 배우가 되겠다고 하자마자,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심지어 사석에서 "거요우가 예쁜 얼굴도 아니고, 사람들을 끄는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냉정하게 평했습니다. 큰 장면을 만나면 맥이 풀려버리고, 별 볼일 없을테니, 그냥 내버려 두자고 하였습니다.
고집 센 거요우는 부모의 눈 밖에 났지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1979년, 예술대학 입학전형 소식을 듣고 거요우는 베이영(北影)에 지원했지만, 연기에 끼가 없어서 현장에서 탈락해버렸습니다.
이에 불복한 거요우는 칭이(青艺)에도 잇따라 지원했지만, 통제력이 부족하고, 캐릭터를 너무 과하게 표현하는 바람에 또 한번 낙제했습니다.
부부는 아들이 거듭 벽에 부딪히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거춘좡은 아들을 돕기로 결정했습니다.
거요우가 세 번째로 실험활극원(实验话剧院)에 지원했을 때, 아버지는 연기 선생을 찾아와서 아들에게 연기를 배울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어쩌다 2차 시험까지 통과하게 되었는데, 거요우는 애드리브라는 관문에서 가로막혀 또 다시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당시 두 부자는 무척이나 초조해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거춘좡의 친구가 전국총공회문공단(全国总工会文工团)단에서 아직도 배우를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귀띔해주었습니다.
어둠 속의 한 줄기 빛 같은 소식에, 거요우는 꿈을 위해 재출전을 결심했습니다.
이번에 거춘좡은 솔선수범하여 아들에게 직접 연기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자신의 친구들을 불러들여 아들에게 노래와 낭송하는 법도 가르쳤습니다.
지난번에는 경험이 부족하여 캐릭터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자, 이번에는 아들의 삶을 소재로 하여 소품 <돼지 키우기(养猪)>를 연습하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생활 밀착형이었던 이 소품 덕분에 자신도 익숙했었고, 결국 거요우는 합격하여 가족들은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기만성 "국민영제(国民影帝)"
거요우가 문공단에 들어간 후, 주로 연극을 하게 되었는데, 어릴 때부터 수줍음을 많이 타던 그는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긴장하고 대사까지 더듬었습니다.
아버지 거춘좡은 보다 못해 아들에게 여러 차례 이야기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지도와 노력 덕분에 거요우는 이후 매번 큰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죠.
시대의 발전에 따라, 연극은 점차 영화와 드라마로 대체되었습니다. 거요우는 1985년, 자신의 스크린 데뷔작 <한여름과 그녀의 약혼자(盛夏和她的未婚夫)>를 선보이며 연예계에 정식으로 데뷔하였습니다.
이후 아버지의 추천으로, 몇 편의 작품을 연달아 찍었지만, 큰 수확을 얻지 못하자, 거요우는 말단 엑스트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1988년에 이르게 되었고, 영화 <완주(顽主)>의 감독 미자산(米家山)은 캐스팅 도중 거요우의 사진을 무심코 보게 되었습니다. 사진 속 그는 이미 '반쪽 대머리' 상태였고, 미자산은 자신이 생각하는 "양중(杨重)" 역할에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오디션을 거쳐 거요우는 남자 주인공을 맡을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거요우는 백수 양중 역을 맡아, 메쏘드 연기를 펼쳐보였다고 합니다. 감독에 따르면, 거요우는 촬영장에서 다른 사람과 말을 걸지도 않고, 혼자 대본을 들고 옆에서 중얼거리며 연습만 했다고 합니다.
간단한 대사 한 마디를 몇 번이고 되새기고, 배우들은 그와 함께 연기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감독에게 거요우와 연기할 대마다 다른 배우들은 당해낼 수가 없다고 하소연하곤 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영화로 생애 첫 대상을 받은 거요우는 양중 역 하나로 '중국전영금계장 남우주연상(中国电影金鸡奖最佳男主角)'을 수상하였습니다.
수상 이후, 거요우는 자신감이 넘치고 의욕도 충만해졌습니다. 이후 그는 <황하요(黄河谣)>, <과년(过年)> 등의 작품에 잇따라 출연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습니다.
1992년, 거요우는 드라마 <편집부 이야기(编辑部的故事)>에 출연하여 중국 텔레비전 금응장 남우주연상(中国电视金鹰奖最佳男主角奖)을 받았고, 이 드라마 덕분에 "거요우마비(葛优瘫)" 라는 별명이 인터넷에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활착(活着)>에서 거요우는 부잣집 도련님 "푸꾸이(福贵)" 역을 맡아 캐릭터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그려냈습니다. 이 역할은 긴 인생사를 그려내어 연기폭이 넓기 때문에, 이 역할을 맡은 배우의 연기력을 시험하는 캐릭터라고 하네요.
이 영화 전체의 분위기는 조용하고, 히스테리나 반전도 없이 안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촬영 중, 거요우는 장면마다 공을 들이는 장이머우 덕분에 더욱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개봉 후에는 최고의 연기력으로 칸 국제 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의 쾌거를 이루어, 중국 본토 내에서 첫번째 칸 영제(影帝)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거요우의 집중력과 몰입이 그를 명실상부한 국민배우로 만들었다고 하네요.
이후, 거요우의 커리어는 수직상승했고, 수많은 고전 드라마에 출연하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들에 출연하였습니다.
거요우는 캐릭터에 대한 이미지를 강하게 표현하는데요, 특히 사회적으로 변변찮은 "소인물(小人物)" 캐릭터를 스크린 상에서 맛깔나게 표현하는데 재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이러한 연기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스크린으로 끌어당겨 캐릭터들과 함께 극 중의 애환을 맛보게 하죠.
거요우는 커리어가 한창일 때 광고제휴를 많이 받았으며, 이후 다양한 광고 모델로 등장하여 수천만 위안을 벌어들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게임 광고에서도 게임 배경과 상반된 모습으로 등장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인간청성(人间清醒)" 거 아저씨(葛大爷)
거요우는 그야말로 인간청성이라고 하네요. 일찍이 큰 돈을 벌어 집도 살 줄 알고, 지금은 촬영도 하고, 대언(代言)도 하고, 유명하고, 돈도 많은데, 스캔들이 한 번도 나지 않은 것으로 연예계에서 유명하다고 합니다.
중국 본토의 첫번째 칸 영제로서 거요우는 대박난 드라마들 외에도 인품과 감수성으로도찬사를 받았습니다.
유명해진 뒤, 거요우는 사석에서 스타 티를 전혀 내지 않았고, 촬영장에서 틈만 나면 "현장판 거요우 마비(现场版葛优瘫)"를 연출한다고 합니다.
2019년 춘완(春晚, 설맞이 특집 프로그램)에서 거요우는 소품 <아들이 왔다(“儿子”来了)>에 출연하였는데, 다른 연예인들은 긴장감에 안절부절 못했지만, 유독 거요우만 의자에 누워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완벽한 할아버지같은 모습으로, 이 사진이 인터넷에 퍼져 많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고 합니다.
거요우는 방송에서 "연예인"이라는 단어가 시청자들에게 매우 중립적인 단어라고 말하면서, 시청자들이 당신의 연기를 좋아하면 '연예인'이라 부르는 것이고,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딴따라'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거요우는 줄곧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딴따라'로 설정하고 있었는데, 시청자들에게 연예인이라는 찬사를 받고는 깜짝 놀랐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는 무대 앞의 풍경도 받아들일 수 있고, 무대 아래에서의 "명쟁암투(明争暗斗)"에도 가볍게 헤엄쳐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거요우는 자신에 대해 매우 잘 파악하고 있는데요, 자신에게 잘 맞는 것, 안 맞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잘 맞는 것은 열심히 하고, 잘 맞지 않는 것은 절대 시도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대본을 받을 때, 그 배역이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를 스스로에게 꼭 물어보았고,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는 다양한 "소인물"에 집착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의 생각엔 이런 "소인물"이어야 극 전체를 더 잘 해석하고 자신을 더 잘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극 중 뿐만 아니라, 무대 아래에서도 거요우는 처세술의 털털함과 당당함을 지녀, 연예인으로서 가지는 경계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정보의 홍수의 시대에 다들 흥행에만 열을 올리고, 대단해지고 싶어하지만, 거요우는 자신이 맡는 캐릭터처럼 "소인물"이 되고 싶어합니다.
촬영이 있을 때는 몰입하고, 촬영이 없을 때는 쉬고, 드러눕고, 어슬렁 거리며 돌아다니는데, 오히려 그의 이런 자발적인 소외감은 적절하며, 그 자신을 좋은 방향으로 이끕니다.
연극에서는 "소인물"이지만, 연극이 끝나면 시종일관 가장 또렷하고 맑은 거요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기사>
'China new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산둥성 출신 화빈 그룹 회장 옌빈(严彬)의 인생스토리 (0) | 2021.12.20 |
---|---|
홍콩 빈민가 출신에서 재벌가 사모님이 된 간비(甘比)의 인생스토리 (0) | 2021.12.16 |
1980년대에 국가에 24억 위안을 내놓은 쟈오비옌(赵碧琰) 할머니의 기부 이유? (0) | 2021.12.14 |
중국 여자 스타 왕위안위안(汪圆圆)과 결혼한 홍콩 부호 차이자짠(蔡加赞)은 누구? (0) | 2021.12.13 |
깊은 산 속에서 발견된 미모의 매국노의 인생 스토리 (0) | 2021.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