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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국가에 24억 위안을 내놓은 쟈오비옌(赵碧琰) 할머니의 기부 이유?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1984년, 베이징에서 한 할머니가 자신의 재산 24억 위안을 국가에 무상으로 기부한다는 폭탄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사람들 사이에선 논란이 분분했는데요, 80년대 24억 위안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노인은 왜 이렇게 후한 기부를 한 것일까요?
쟈오비옌(赵碧琰)이라는 이름의 이 할머니는 기부를 하면서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돈을 기부하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쟈오비옌은 청나라 말기에 태어난 전형적인 대갓집 규수였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어려서부터 쟈오비옌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였으며, 여자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으며 매우 평온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 당시 남자든 여자든 성인이 되면 결혼하는 것이 당연했는데요, 졸업 후 쟈오비옌도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고, 쟈오보신(赵伯欣)이라는 약혼자가 있었습니다. 쟈오보신은 쟈오비옌의 집안과 대대로 친분이 두터웠고, 그는 전도유망한 법대 출신 수재이기도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정말 하늘이 맺어준 천생연분같은 한 쌍이었죠.
두 사람은 곧 결혼식을 올렸으나,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에게 자신이 일본에 유학을 갈 계획이라는 것을 알렸고, 집안일은 쟈오비옌이 돌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남편의 결정을 지지한 쟈오비옌은 남편에게 일본에서 마음편히 공부할 것을 당부하고 나머지는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쟈오비옌은 남편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쟈오보신은 팔방미인으로서 각종 상류사회를 넘나들며 일본의 명사들을 금세 알게 되었고, 중국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일본은 쟈오보신이라는 중국인을 일본인의 앞잡이로 끌어들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쟈오보신에게 많은 혜택을 줬고, 귀국 후에 일본에 많은 도움을 달라고 했습니다. 쟈오보신은 일본인들의 유혹에 굴복하여 동의하였고, 귀국 후 일본인들의 배려로 쟈오보신은 장쭤린(张作霖)의 법학 고문이 되었습니다. 그가 맡은 주요 임무는 장쭤린과 일본인들의 의사소통을 돕는 것이었죠.
남편은 하루 종일 바깥에서 바쁘게 지내며 열흘이나 보름에 한번 집에도 들르지 못했고, 쟈오비옌은 혼자서 가족들을 돌보느라 다소 힘들었지만, 남편의 바깥활동을 방해할 수가 없었기에 계속 버텨내야만 했습니다.
쟈오비옌이 만약 남편 쟈오보신이 밖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면 아마 속이 타버릴 것이었습니다. 쟈오보신은 동북에서 일본인들과 더러운 거래를 계속하면서 동북지역의 공장, 철도 건설 관리권을 일본인들에게 넘겼고, 그 자신도 많은 지분을 나눠받아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남편이 일본인들과 가까이하는 것을 보면서 쟈오비옌은 늘 이상하게 여겼지만, 그 당시 쟈오보신에겐 말하지 않았고, 장쭤린 등의 인물들과 일본인이 겉으로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쟈오비옌은 비록 좋지 않다고 생각하긴 했지만,무엇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918 사변이 터지자 그제서야 쟈오비옌은 자신의 남편이 이미 중대한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동북3성을 침범하자, 쟈오보신은 봉천자치유지회 회장(奉天自治维持会的会长)으로 변신하여 매국노 노릇을 했습니다. 쟈오보신은 일본인이 동북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공개담화까지 발표했었는데, 순간 민심이 격분하였지만, 쟈오보신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의 수중에는 돈이 점점 많아져갔고, 마지막 황제 푸이마저 급히 그에게 돈을 보내며 일본인 앞에서 자신을 위해 좋은 말을 좀 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쟈오보신이 집으로 돌아가는 횟수는 더욱 적어졌고, 쟈오비옌은 남편에게 일본인들과 연락을 끊으라고 설득하였지만, 쟈오보신은 일찍이 최소한의 양심마저 저버린 상태였고, 아내가 하는 말을 아무것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때, 쟈오비옌은 쟈오보신과 오랜 부부의 정으로 잘 타일렀다고 생각했었고, 쟈오비옌은 남편이 제때 돌아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쟈오보신은 다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쟈오보신은 여러 해 동안 풍성하게 지내다가, 일본이 패전 직전에 이르르자 비로소 당황하였습니다. 그는 바쁘게 재산을 빼돌렸는데, 그는 비상한 머리로 주판 알을 잘 튕겼으며, 아내 쟈오비옌이 자신에게 정이 깊다는 것을 알고 거액의 재산을 아내 명의로 빼돌리며, 만약 가압류당해도 자신에게 살 길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쟈오보신은 너무 간단하게만 생각했습니다. 그가 지불해야하는 대가는 금전 뿐만 아니라 동북 3성 백성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것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1951년 7월, 쟈오보신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의 아내 쟈오비옌은 그의 거액 재산의 상속자가 되었지만, 쟈오비옌은 이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매국노인줄은 알았지만, 그가 이미 죽었고, 그 뒤에 남은 책임을 모두 그녀에게 떠넘겼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쟈오보신이 체포된 후, 쟈오비옌은 아이들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녀는 일용직 노동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감옥에 수감중인 남편을 돌봐야 했죠. 1951년에 쟈오보신이 처형된 뒤에 쟈오비옌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요,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뜻밖에도 그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요, 60년대에 랴오청즈(廖承志)가 쟈오비옌을 찾아가 쟈오보신이 일본에 거액을 남겼다고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단지 현재 위탁받은 사람이 독점하려고 하고 있고, 이 돈이 반드시 쟈오비옌의 수중에 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긴 했지만 말이죠. 쟈오비옌은 이 소식을 듣자 다시 한번 경악했고, 그녀는 일본으로 건너가 쟈오보신이 남긴 돈이 20억 위안에 달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렇게나 많은 돈이 대체 어디에서 나왔는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지만, 쟈오비옌은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그 돈을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던 사람과 2년간 소송을 벌여 결국 돈을 자신의 수중에 넣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을 가지고도 쟈오비옌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묻고 싶어졌습니다. 도대체 왜 매국노를 하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많은 부담을 떠넘기고 가버렸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쟈오보신은 세상을 떠나고 없었고, 쟈오비옌은 혼자서 속을 끓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돈의 거취를 놓고 고민하다가, 쟈오비옌은 결국 국가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그녀는 참 오랫동안 망설였다는데요, 그 이유는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이 돈을 기부하면 자신이 매국노의 미망인이라는 신분이 드러나게 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그 걱정을 하면서 사람들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간에 그녀는 이 돈을 가지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쟈오비옌은 24억 위안에 달하는 이 돈을 국가에 내놓았던 것입니다.
이 돈을 내놓아야만 비로소 자신의 마음이 좀 편안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선 속죄행위로, 당시 그녀가 쟈오보신의 매국 행위를 막지 못했던 것이 물론 그녀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마음 속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후반생 내내 속죄를 하고 싶어했으며, 이렇게라도 자신의 미안함을 표현해야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결정을 내리며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했고, 비록 매국노는 치욕적인 기둥에 영원히 못박히겠지만, 사람들은 사과하는 쟈오비옌의 진심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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