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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쑨중산(孙中山) 선생의 아들, 쑨커(孙科)의 인생스토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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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쑨중산(孙中山) 선생의 아들, 쑨커(孙科)의 인생스토리

hanyuku 2021. 6. 30.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의 국부(国父)로 숭앙받는 쑨중산(孙中山) 선생은 1891년 10월에 본처인 부인 루무젼(卢慕贞) 씨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낳았습니다. 쑨중산의 첫 아이이자 유일한 아들인 이 사람의 이름은 쑨커(孙科)인데요, 쑨중산은 그 이후로도 몇 명의 자녀를 가졌지만 모두 딸이었다고 합니다.

 

 

 

 

 

쑨중산의 아들 쑨커, 장제스를 따라 대만으로 간 후 어떻게 지냈을까?

 

 

쑨커는 자신의 정치적인 이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재능은 한계가 있었고 경험도 부족한데다 큰 성취도 없이 세간 사람들에겐 책 읽는 것만 좋아한다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쑨커의 일생은 모두 아버지인 쑨중산 선생의 후광 아래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쑨중산 선생의 정치적 행보가 너무 엄청났기 때문이었는데요, 이러한 것은 일종의 행운이기도 하여서, 집안의 배경이 분명히 쑨커에게는 큰 힘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평생 아버지의 후광으로 살아온다는 것은 그에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쑨커는 쑨중산의 유일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인 쑨중산은 그에게 엄격한 교육을 시켰습니다. 쑨중산은 외국에서 혁명 사업을 해왔기 때문에 자녀에 대한 교육 관리는 당연히 비교적 적게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쑨중산 선생은 쑨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감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쑨중산 선생의 가르침 아래, 쑨커는 어려서부터 좋은 독서 습관을 형성했습니다. 당시 국민정부 "행정원"에서, 독서를 좋아하는 쑨커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쑨중산은 쑨커가 어렸을 때 그를 미국으로 보내어 체계적인 고등 교육을 받게 하였고, 쑨커거 성년이 된 후 그를 불러들여 함께 혁명 사업을 하도록 했습니다.

 

 

쑨중산은 쑨커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해서 특별한 대우를 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쑨커에게 밑바닥부터 한 걸음 한 걸음 힘써 일하며 올라오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쑨중산 선생의 아들에 대한 엄격한 교육에 대해 세간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고 하는데요,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광저우 국민혁명정부 수립 후 쑨중산은 쑨커에게 광저우 시장 자리를 맡겼습니다. 쑨커가 광저우 시장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쑨중산의 아들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미국에 있을 때, 쑨커는 시정관리(市政管理) 연구를 하였었는데, 그러한 이유 때문에 랴오중카이(廖仲恺)의 강력한 추천을 얻었다고 합니다. 당시 광저우는 국민혁명정부의 혁명 근거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의 시장이 되는 것은 권위가 높은 직책이었고, 이것은 사람들이 쑨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923년, 시장이 된 쑨커는 직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징집한 군인들에게 급료와 보급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쑨중산 선생으로부터 질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쑨커는 국민당의 원로격인 후한민(胡汉民)으로부터 이간질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뒤에서 부추김을 당하여, 그는 지팡이로 후한민을 한 대 때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쑨중산이 이 사실을 알고나서 아들을 잘못 가르쳤다는 생각에 대노하여 권총을 들고 쑨커에게 방아쇠를 당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백방으로 막아서서 참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를 통해 쑨커에 대한 쑨중산의 가르침이 어느정도 엄격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자신의 아들이건 아니건 간에 엄벌에 처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는 것이지요.

 

 

1925년 쑨중산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쑨커는 이때부터 독립적으로 정계의 요직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쑨커는 "만약 혁명으로 건설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혁명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혁명 이후의 건설을 위해서 쑨커는 점진적인 방식으로 국민당의 혁신을 추진하고, 나아가 중국의 현대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쑨커와 왕징웨이는 협력하여 광저우에 국민혁명정부(国民革命政府)를 세워 장제스(蒋介石)의 난징 국민혁명 혁명정부(南京国民革命革命政府)에 대항하였습니다.

 

 

나중에 경비가 부족하여 광저우 정부는 곧 붕괴되었고, 이후 난징 국민정부는 쑨커를 행정원장으로 초빙하였습니다. 그러나 광저우정부의 관계 때문에 쑨커와 장제스는 줄곧 겉으로만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1949년, 장제스가 하야한 것은 계계군벌 리쭝인(桂系军阀李宗仁)의 협박때문이기도 하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쑨커의 끈질긴 압박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당시 쑨커는 평화협상을 지지하였는데, 장제스와 리쭝인 그리고 쑨커 세 사람은 국민당 내부에서 삼각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국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 중에서 쑨커는 정치 경험이 부족했던 탓에, 그는 곧 압력에 의해 사퇴하였다고 합니다. 장제스가 실패해서 대만으로 물러났을 때, 쑨커는 대만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쑨커는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일정 기간 동안 미국에서 거주하였습니다. 쑨커는 쑨중산 선생의 장남이고, 부친과 마찬가지로 청렴하고 사재를 축적하지 않았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쑨커는 아무런 저축 없이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미국 생활은 매우 청빈했다고 합니다.

 

 

 

 

 

1965년, 장제스는 쑨커의 대만 귀환을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고시원 원장(考试院院长)에 임명하여, 그가 대만으로 돌아온 뒤의 생활은 다소 나아졌다고 합니다. 대만으로 돌아온 그는 가르치는 데 전념하였고, 둥우대학의 이사장(东吴大学的董事长)이 되었습니다. 그는 1973년에 결국 심장병으로 인해 82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쑨중산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엄격한 가르침 아래 성장했던 쑨커의 인생스토리였는데요, 비록 아버지만큼의 위대한 성과는 없었으나, 그의 인생도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10164414073180207332%22%7D&n_type=-1&p_fro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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