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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배우 쉐리(雪梨)의 인생 스토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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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배우 쉐리(雪梨)의 인생 스토리

hanyuku 2021. 5. 7.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어쩌면 운명이란 것은 자신의 자의적 선택에 대한 구실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조심성있게 걸음마다 신중히 나아가고,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안정적으로 만들어가는 사람을 보고 운이 좋다고도 하는데요, 반면 교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결국은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리고 마는 경우에는 운이 나쁜 사람이라고 치부해버리기도 합니다.

 

 

오늘 소개할 이 기사의 주인공은 장궈룽(张国荣)을 저버리고 난봉꾼을 사랑해서 17세에 임신을 하고, 미혼으로 아이를 낳은 쉐리(雪梨)입니다.

 

 

01

 

 

 

쉐리의 본명은 옌후이밍(严惠明)으로, "아주시후(亚洲视后)" 수상자인 미쉐(米雪)의 친동생입니다.

 

 

1976년, 21세의미쉐는 <사조영웅전(射雕英雄传)>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는데, 그녀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원작자 진룽(金庸)의 극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드라마까지 성공시키며 홍콩 사상 첫 밀리언셀러 시청을 기록하였습니다.

 

 

미쉐의 인기가 치솟자,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그녀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녀의 친동생이었습니다.

 

 

 

 

 

미쉐의 본명은 옌후이링(严惠玲)인데, 옌후이밍의 친언니로, 그녀가 벼락 유명세를 타는 것을 본 동생 옌후이밍은 연기자로서의 영광에 눈을 뜨고 학문의 바다에 뛰어들 마음이 없었습니다.

 

 

옌후이밍은 스스로 자신이 공부할 재목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언니인 미쉐 못지 않은 외모로 연기자로서 언니 못지 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옌후이밍의 이같은 계획은 가족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는데요, 그때 막 10세를 넘긴 아이에게는 아무래도 학업이 우선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족들마다 반대에 부딪히자, 꾀가 가득했던 옌후이밍은 마음을 접지 않고 도망갈 궁리를 했습니다.

 

 

 

 

 

 

당시 옌후이밍의 가족은 이탈리아에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몰래 홍콩을 찾아가 언니인 미쉐에게 의탁하였습니다.

 

 

미쉐는 제멋대로인 이 여동생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서, 그녀를 연예계에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옌후이밍은 쉐리(雪梨)라는 예명으로 데뷔하여, 처음으로 자기 멋대로 행동하여 단맛을 맛보게 되었고, 마치 일평생 이것이 계속 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막 데뷔한 쉐리는 언니의 조력을 받을 수 있었던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의 외모가 받쳐주었던 것도 그녀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쉐리의 외모는 비록 매우 출중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미간의 독특한 스타일과 풋풋함 속에 맑고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고, 아름다움 속에 억척스러운 쾌활함이 배어있었습니다.

 

 

15세 때, 쉐리는 저우룬파, 런다화(周润发、任达华)와 짝을 이루어 TVB에서 찍은 가족 드라마 <친정(亲情)>에서 전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쉐리는 <친정>에서 주목할 만한 연기자였고, 곧 회사에서 주선한 <갈채(喝彩)>를 찍게 되면서 이 극중에서 그녀의 첫사랑인 장궈룽과 첫만남을 갖게 되었습니다.

 

 

장궈룽은 소탈하고 천진난만한 쉐리를 매우 좋아하였고, 그는 열애를 공식으로 인정하는 것은 물론, 연예뉴스 인터뷰에서도 쉐리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장궈룽은 성격이 순수하고 대범하여, 우물쭈물하지 않고, 일을 할 때도 솔직하며, 심지어는 쉐리와 함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에도 그녀의 나이가 어린 것을 걱정하여 일부러 미리 미쉐의 동의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동생과 장궈룽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쉐는 동생을 위해 매우 기뻐해주었습니다. 그녀가 보기에 쉐리는 너무 제멋대로였고, 장궈룽은 의젓하고 온화한 성격이기 때문에 쉐리와 상호보완이 되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쉐가 잊고 있었던 것은, 제멋대로인 소녀의 스타일이 잠시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마이웨이였다는 것이지요.

 

 

15세의 쉐리는 놀기 좋아하고, 원기 왕성한 성장기였으며, 금방 장궈룽의 다정다감한 모습에 싫증을 냈습니다. 그리고 <갈채>에 함께 출연한 천바이창(陈百强)과 열렬한 감정에 빠져들었습니다.

 

 

쉐리는 장궈룽을 난감하게 만들고, 그의 열애를 시작과 동시에 마무리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다행히도 장궈룽은 인품이 훌륭하여, 쉐리는 이 연애에서 얻은 것은 총애 뿐이고, 장궈룽과의 헤어짐도 평화롭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쳐본 적이 없는 사람은, 평생 행운이 계속 따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두황후(断头皇后)"에는 유명한 말이 있는데요, 그녀는 그때만 해도 너무 어려서 운명이 보내준 선물을 모르고 일찌감치 가격을 매겨버렸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쉐리도 그 시절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댓가를 치러야 할지 몰랐는데요, 운명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함정을 파고 앉아서 사냥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궈룽을 뿌리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쉐리는 그녀 일생의 몹쓸놈인 쉬샤오창(徐少强)을 만나게 됩니다.

 

 

02

 

쉐리와 쉬샤오창의 사랑 싸움은 1982년에 시작되었습니다. 17세의 쉐리와 32세의 쉬샤오창은 함께 드라마 <양귀(养鬼)>에 출연하며 만나게 되었고, 쉐리는 본격적으로 평생의 감정의 나락으로 빠져들 본 동생 옌후이밍은 연기자로서의 영광에 눈을 뜨고 학문의 바다에 뛰어들 마음이 없었습니다.

 

 

 

 

 

옌후이밍은 스스로 자신이 공부할 재목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언니인 미쉐 못지 않은 외모로 연기자로서 언니 못지 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옌후이밍의 이같은 계획은 가족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는데요, 그때 막 10세를 넘긴 아이에게는 아무래도 학업이 우선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족들마다 반대에 부딪히자, 꾀가 가득했던 옌후이밍은 마음을 접지 않고 도망갈 궁리를 했습니다.

 

 

 

 

 

 

 

 

 

 

 

 

 

당시 옌후이밍의 가족은 이탈리아에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몰래 홍콩을 찾아가 언니인 미쉐에게 의탁하였습니다.

 

 

 

 

 

미쉐는 제멋대로인 이 여동생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서, 그녀를 연예계에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옌후이밍은 쉐리(雪梨)라는 예명으로 데뷔하여, 처음으로 자기 멋대로 행동하여 단맛을 맛보게 되었고, 마치 일평생 이것이 계속 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막 데뷔한 쉐리는 언니의 조력을 받을 수 있었던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의 외모가 받쳐주었던 것도 그녀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쉐리의 외모는 비록 매우 출중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미간의 독특한 스타일과 풋풋함 속에 맑고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고, 아름다움 속에 억척스러운 쾌활함이 배어있었습니다.

 

 

 

 

 

15세 때, 쉐리는 저우룬파, 런다화(周润发、任达华)와 짝을 이루어 TVB에서 찍은 가족 드라마 <친정(亲情)>에서 전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쉐리는 <친정>에서 주목할 만한 연기자였고, 곧 회사에서 주선한 <갈채(喝彩)>를 찍게 되면서 이 극중에서 그녀의 첫사랑인 장궈룽과 첫만남을 갖게 되었습니다.

 

 

 

 

 

장궈룽은 소탈하고 천진난만한 쉐리를 매우 좋아하였고, 그는 열애를 공식으로 인정하는 것은 물론, 연예뉴스 인터뷰에서도 쉐리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장궈룽은 성격이 순수하고 대범하여, 우물쭈물하지 않고, 일을 할 때도 솔직하며, 심지어는 쉐리와 함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에도 그녀의 나이가 어린 것을 걱정하여 일부러 미리 미쉐의 동의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동생과 장궈룽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쉐는 동생을 위해 매우 기뻐해주었습니다. 그녀가 보기에 쉐리는 너무 제멋대로였고, 장궈룽은 의젓하고 온화한 성격이기 때문에 쉐리와 상호보완이 되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쉐가 잊고 있었던 것은, 제멋대로인 소녀의 스타일이 잠시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마이웨이였다는 것이지요.

 

 

 

 

 

15세의 쉐리는 놀기 좋아하고, 원기 왕성한 성장기였으며, 금방 장궈룽의 다정다감한 모습에 싫증을 냈습니다. 그리고 <갈채>에 함께 출연한 천바이창(陈百强)과 열렬한 감정에 빠져들었습니다.

 

 

 

 

 

쉐리는 장궈룽을 난감하게 만들고, 그의 열애를 시작과 동시에 마무리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다행히도 장궈룽은 인품이 훌륭하여, 쉐리는 이 연애에서 얻은 것은 총애 뿐이고, 장궈룽과의 헤어짐도 평화롭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쳐본 적이 없는 사람은, 평생 행운이 계속 따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두황후(断头皇后)"에는 유명한 말이 있는데요, 그녀는 그때만 해도 너무 어려서 운명이 보내준 선물을 모르고 일찌감치 가격을 매겨버렸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쉐리도 그 시절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댓가를 치러야 할지 몰랐는데요, 운명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함정을 파고 앉아서 사냥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궈룽을 뿌리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쉐리는 그녀 일생의 몹쓸놈인 쉬샤오창(徐少强)을 만나게 됩니다.

 

 

 

 

 

02

 

 

쉐리와 쉬샤오창의 사랑 싸움은 1982년에 시작되었습니다. 17세의 쉐리와 32세의 쉬샤오창은 함께 드라마 <양귀(养鬼)>에 출연하며 만나게 되었고, 쉐리는 본격적으로 평생의 감정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쉬샤오창이란 사람에 대해 말해보자면,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도 그의 악역 연기는 본 사람이 있을 정도로 연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의 인품은 흙투성이였기 때문에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쉬샤오창은 쉐리보다 15살이나 많으며, 유명세를 탄 것도 쉐리보다 빨랐습니다.

 

 

1979년, 쉬샤오창은 <천잠변(天蚕变)>에서 남자 주인공 윈페이양(云飞扬)을 연기한 계기로 홍콩드라마 사상 최고 기록을 세우며 시청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윈페이양 역의 쉬샤오창은 드라마의 배역 필터를 벗겨내면 악명이 높습니다. 그해 <천잠변>은 촬영을 하면서 쉬샤오창이 대박을 터뜨린 후, 라이벌 회사에서 거금을 주자 멋대로 드라마에서 증발해버리며, <천잠변>은 빈껍데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사업에 있어서 신용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조진모초(朝秦暮楚)와 같아 심성이 불안정했습니다. 쉬샤오창은 대박이 나기 전에 이미 결혼도 했었고, 아들도 하나 있었는데, 아내와 아들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고, 결혼 후에도 곁에는 여전히 여자들이 달라붙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런 방탕한 바람둥이가 쉐리를 만나게 되자, 파리처럼 몸을 사리지 않고 달려들었다고 합니다.

 

 

 

 

 

 

세상물정이 깊지 않은 쉐리가 어떻게 쉬샤오창이라는 늙은 사냥꾼의 상대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언니인 미쉐는 쉐리와 쉬샤오창이 열애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쉬샤오창의 인품을 인정하지 않으며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쉬샤오창은 이번에도 증발해버리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쉐리가 증발해버렸습니다. 그는 밖에서 셋방을 얻어 쉐리를 숨겨 동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내, 쉐리는 쉬샤오창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임신 후 쉐리는 쉬샤오창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멀었던 쉐리는 개의치 않고 다른 여자와 한 남편을 섬기겠다고 하였고, 쉬샤오창과 본처가 언젠가는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쉐리는 숨어버렸고, 남들 앞에서 반짝거리던 여자 스타는 은퇴 후, 쉬샤오창의 그늘에 가려진 여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쉐리는 데뷔 원점이 높았는데요, 저우룬파 아니면 천바이창 같은 쟁쟁한 스타들과 연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력까지 겸비했고 언니인 미쉐와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2년 만에 많은 팬을 얻었고, 홍콩에서 대만까지 유명세를 탔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쉬샤오창의 작업 중단 결정을 내릴 때부터 작품이 나오지 않자 많은 팬들의 애를 태웠습니다.

 

 

미쉐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공연할 때, 많은 팬들이 미쉐에게 쉐리의 매니저가 되어달라며 일감을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미쉐는 쉐리에게 너무 많이 권유하여 쉐리는 이미 그녀와 반목하게되어 왕래를 끊었고, 팬들의 요청에 대해 미쉐는 부득이하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쉬샤오창이 쉐리를 꽁꽁 숨겨놓고 집에서 아들만 키우게 했다.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에서 그녀를 찾아 캐스팅하고 무대에 서게 하려고 해도 모두 쉬샤오창에게 밀려버렸다."고 말이지요.

 

 

3년 동안 쉐리는 쉬샤오창과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남의 가정에 침입한 여자들은 모두 자신이 원래 그 사람의 배필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언젠가는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죽하면 남자가 자기 치마폭에 굴복하고 말았을까 생각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여자들이 잊고 있는 것은, 꿀벌들이 꿀을 따는 동안에는 위에 있는 꽃이건, 아래에 있는 꽃이건 별로 다른 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공통점은 꽃이 활짝 피어있는 것 뿐이라는 점입니다.

 

 

쉬샤오창에게 숨겨져 있던 몇 년 동안, 쉐리는 대중과 일체 단절되어 있었고, 가정에서 전업주부로 있으면서 집에서 남편을 상대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쉬샤오창이 이혼하고 자신과 재혼할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렸습니다.

 

 

후에 쉬샤오창은 이혼을 했지만, 좀처럼 쉐리를 만나려 하지 않았고, 곁에는 여전히 다른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쉐리는 참다못해 쉬샤오창에게 자신과 함께 민정국에 가서 증거를 남기자고 강요했습니다. 쉬샤오창은 가긴 갔지만, 아쉽게도 앞의 수속은 다 끝냈지만 마지막 한 걸음만을 남겨둔 쉬샤오창은 이혼 증명서를 가져오는 것을 잊었다고 했습니다. 쉐리는 그에게 돌아가서 가져오라고 하였지만, 그는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며 다시 처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쉐리와 결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그의 마음을 마침내 쉐리도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자신의 창창한 사업을 6년간 접고, 여자 스타에서 동네 아줌마로 벗어나 있었던 쉐리에게 남은 것은 아들 딸을 고생스럽게 키우는 일 뿐이었습니다.

 

 

눈앞의 냉정한 사실 앞에서 쉐리는 제멋대로 결정한 자신의 7년 청춘이 결국은 잘못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이름을 날린 것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영광의 화환을 보내주면서도 유혹의 함정을 만들었고, 이는 인생을 방종하게 만드는 저력을 주었으며,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오르락 내리락하는 뼈아픈 교훈을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인생 경험이 부족할 때는 머리 위의 화환을 들어올리는 것보단 발밑을 단단히 밟는 것이 더욱 어려운 법입니다.

 

 

자신이 제멋대로 살며 순간의 즐거움은 인생 후반전의 행복을 희생한 댓가였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쉬샤오창과 함께 있을땐 쉐리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23살의 자신이 싱글맘으로 혼자 두 아이를 키우며 여생을 보내야 된다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거라는 것을요.

 

 

03

 

 

쉬샤오창에게 자신은 놀잇감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은 쉐리는 결국 이를 악물고 그를 떠났습니다.

 

 

1988년, 쉐리는 쉬샤오창에게 정식으로 이별을 통보하고, 다섯살 난 아들과 세살배기 딸을 데리고 언니인 미쉐에게 의탁하여 캐나다로 갔습니다.

 

 

 

 

 

 

미혼모 혼자서 두 명의 아이를 홀로 키우는 일은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두 어린 아이들의 의식주를 돌보고, 세상의 유언비어를 떠안는 것은 물론, 경제적인 부담도 크기 때문이지요. 비록 어머니와 언니가 도와주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평생 다른 사람에게 자기 가족을 맡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

 

 

쉬샤오창과 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쉐리는 다시 연예계에 복귀하였지만, 복귀가 쉽지 않았습니다. 연예계에는 젊고 예쁜 여자들이 항상 넘쳐나고, 연기와 인연을 끊은 지 7년이 지나면 이미 좋은 배역이 쉐리에게 돌아가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조연으로 다시 시작해서 연예계의 싸움에 뛰어들었습니다.

 

 

심지어 쉐리는 자신의 애증까지도 접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는데요, 극중에서 쉬샤오창과 재결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상처 투성이의 이 감정에서 그래도 쉐리는 "리모처우(李莫愁)"라는 캐릭터를 얻어내는 수확을 이루었습니다.

 

 

 

 

 

 

1995년, <친정>에서 쉐리를 추천했던 리텐셩(李添胜)은 다시 한번 쉐리를 찾아가 <신조협려(神雕侠侣)>에서 리모처우 역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리모처우 역시 쉐리의 경력과 비슷하여, 사람에 속고 사랑에 버림받는 캐릭터였는데요, 한때 뼈에 사무친 한을 리모처우라는 캐릭터에 풀며 녹아든 쉐리는 이 인물을 연기하는데 극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95판 <신조협려>가 방영된 뒤, "쉐리 이후엔 리모처우는 다시 없다"는 극찬이 쏟아졌습니다. 연기 성적이 좋은 미쉐도 자신보다 한 수 위라며 쉐리의 연기력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리모처우를 연기할 수 있어도, 미혼모인 그녀는 자녀들을 위해 홀로 하늘을 떠받쳐야 합니다. 가정의 책임을 아무도 그녀를 도와 분담하지 않으니, 그녀는 혼자 힘으로 모두 짊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굴욕을 참으며 복귀한 지 몇 해가 지나고, 모처럼 리모처우를 등에 업고 홍역을 치렀지만, 안타깝게도 딸이 쉐리를 보는 눈에는 반항이 가득했고, 시도때도 없이 옆에서 늘 챙겨주는 엄마가 아니라 낯선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짝을 잃은 마음의 상처는 쉐리에게 아들 딸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들 딸의 소원함을 본 쉐리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이번엔 그녀는 더이상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촬영을 위해 외출하는 발걸음을 늦추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아들 딸의 성장을 지켜보며, 다시 스크린에서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오랜만에 시상식에 초청받은 쉐리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난 나쁜 남자를 사귀었었지만, 내게는 하늘이 준 최고의 선물인 두 명의 귀여운 자녀가 있습니다."

 

 

중년에 접어들어, 쉐리가 스스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들 딸 뿐이었습니다.

 

 

 

 

 

 

이후 몇 년간, 촬영을 하지 않고 얼굴도 제대로 드러내지 않다가, 딸이 데뷔하려고 하자 딸을 돕기 위해 인터뷰를 하며 카메라 앞에 비로소 출연하였습니다.

 

 

이미 50세의 나이인 쉐리는 볼이 수척하고, 눈빛이 피로하고, 주름도 뚜렷했으며, 마른 손은 나무껍질 같았는데요, 옛 미인은 세월과 사랑의 이중고에 시달리며 나눌 수 없는 책임의 무게에 짓눌려 빛이 바랬습니다.

 

 

그러나 쉐리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선택한 그 길을 후회하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일생은 마치 어두운 밤에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과 같아서, 가장 어려운 것은 새벽녘의 쓸쓸함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인어의 감동적이고 치명적인 노래에 사로잡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젊었을 때 스스로 자부하는 용감함을, 여러 해 뒤에 돌아보고서야 그것이 무식함이었다는 것을 깨닫곤 하는 것과 같은 것이겠지요.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10396361797689798794%22%7D&n_type=-1&p_from=-1

 

她曾是张国荣的挚爱,却因任性爱上负心汉,17岁产子成单亲妈妈

女人这一生,有人麻雀飞上枝头做凤凰,就一定有人凤凰跌下高枝做土鸡。 跌下高枝的人觉得万般皆是命,半点不由人。 我们又怎知所谓的命运,不过是对自己任性选择的托词呢。 幸运的人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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