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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형편과 난세를 딛고 일어난 중국의 재벌 훠잉둥(霍英东)의 인생 스토리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되어 많은 사람들이 식사 후에 그날의 새로운 사건들을 이야기 하는데 익숙해졌습니다. 특히 부자들의 이야기는 일반 사람들에게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인데요, 이들의 이름은 각종 뉴스의 탑으로 자주 등장하곤 하지만, 중국에서 부자들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패기 넘치는 부자로 통하는 훠잉둥(霍英东)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훠잉둥의 그간의 헌신 덕분에 손꼽히는 부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신분을 생각하면, 그가 외출할 때 반드시 한바탕 난리가 일어날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리 단촐하게 하여도 몇 겹으로 보디가드를 둘러싸고 가야될 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는 외출할 때마다 그런 대단한 사치를 부리지 않는다고 하는데요, 훠잉둥은 자신이 홍콩에서 경호원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다고 하였었고, 이러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호언장담이 나오자마자, 당시 인터넷 상에서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안하무인으로 여겼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절대적으로 그럴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라고도 여겼습니다.
그가 비록 자신의 노력으로 상업제국을 이룩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의 생활이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그는 고생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비로소 그가 현재 가진 모든 것을 얻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빈한 가정 형편
그가 태어나던 그 시대에는 중국이 난세를 맞이한 데다가, 어린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정의 일상적인 지출은 어머니가 벌어오는 적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모자는 매일 헐벗고 굶주린 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지만, 아들 훠잉둥은 자신처럼 되길 바라지 않아 아들을 꼭 학교에 보내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학교에 다니게 된 후로 훠잉둥은 어머니의 고생을 잘 알고, 지식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 수업마다 남들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원래 노력도 하는데다가 자질도 갖추었던 그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난세에 태어났기 때문에 학교 밖은 온통 포화(炮火) 천지가 되어버렸고, 온 나라가 모두 외적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를 생각하던 시기였습니다. 게다가 전쟁이 한 차례, 또 한 차례 발발함에 따라, 결국 그도 어쩔 수 없이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난세를 만나, 끊임없이 운명과 싸우다
공부를 할 수는 없어도, 삶은 계속 이어져야 했습니다.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어머니가 그렇게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 십대였던 그는 작은 몸으로 가족의 짊을 짊어졌습니다. 그때 그는 업종을 가리지 않고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보았지만, 그의 나이가 너무 어리고, 게다가 학식도 없어서 석탄공이나 설탕 공장의 견습생 등 간단한 노동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아왔지만, 그런 경험이 사회 경험을 풍요롭게 하였습니다. 작은 키에 눈치를 잘 보는것 뿐만 아니라 남의 장사까지 살피며 비즈니스 마인드를 익혔습니다. 어머니가 작은 잡화 상점을 운영하던 시절, 수입을 늘리기 위해 그는 가게에서 어머니께 작은 활동들을 하게 하였고, 이러한 것들은 어머니의 사업을 번창케 하였습니다.
착실하게 사업을 시작하다
1940년대 말, 중국은 백파대흥(百废待兴, 방치되거나 미루어져 왔던 일들이 모두 시행되기를 기다리다)의 시기를 맞이하였고, 훠잉둥은 이때 본격적으로 창업의 길을 열었습니다. 창업을 할 마음이 생겼지만, 돈이 없었기 때문에 저임금의 일을 택해서 돈을 모을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버티면서 돈을 모았습니다.
1950년대, 중국이 점차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많은 곳에 고층빌딩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홍콩의 부족한 자원은 땅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토지는 모두 금싸라기 땅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훠잉둥 역시 이 시기를 노리고, 저축해왔던 돈을 모두 털어서 본격적으로 부동산 창업의 길을 열게 되었습니다.
훠잉둥은 부동산업을 하기로 결정한 뒤, 집을 짓거나 땅을 만드는 대신 부동산 납품 업자들에게 원부자재를 공급하는 등 작은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도 그의 이러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일한 후, 그는 부동산 업계를 완전히 파악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입하였습니다. 당시 부동산은 시장성이 있었고, 하기도 비교적 편했던 덕분에, 그는 몇 년 만에 홍콩 부동산 업계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부동산 사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이러한 재산이 생겼으니, 이제 나이가 들면 편하게 놀고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훠잉둥은 부동산 사업을 하면서도 다른 사업 기회를 알아보았고, 건축, 건재, 석유 등등 다양한 분야에 뛰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분야에서 그는 거의 개척자라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비즈니스 마인드를 바탕으로 이 분야에서 성공을 이뤄냈고, 그는 정말로 홍콩 비즈니스계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국가의 위기에 용감히 나서다
중국의 부동산 붐은 50년대에 시작되었지만, 60년대 들어서 홍콩의 부동산은 침체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때 많은 부동산 재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그는 나서서 모두가 함께 발전하고, 국가가 함께 번영하는 전제하에 진행해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모두가 스스로를 건사하기 위한 생각만을 할 때, 그는 난관에 부닥친 나라를 위해 여러 차례 부동산 재벌들과 만남을 가졌고 결국 겨우 그들의 동의를 얻어내었습니다.
그는 조국을 위해 항상 앞장섰고, 능력이 생기면 조국에 그 보답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국가의 교육과 스포츠를 중시하여 여러 자선단체를 만들었고, 많은 빈곤층 가정에 희망을 주었습니다.
오늘날의 훠잉둥은 명성과 재산은 물론 엄청난 부를 갖추었지만, 그가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생한지를 생각하면, 결코 요행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피눈물나는 노력과 능력은 존경할 만하지만, 그가 보인 애국심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중국 상업계에서 일정한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그의 전설적인 일생은 많은 중국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데요, 그의 창업 이야기도 그렇지만 특히 그의 품행은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더욱 배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참고기사>
霍英东:港澳陆我可以横着走,不用带任何保镖
现在互联网的发达,让很多人在茶余饭后都习惯讨论一些当日发生的新鲜事情。尤其是富豪的故事,很多人听起来更是津津乐道,比如李嘉诚、向华强等等。他们的名字经常出现在各大新闻的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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