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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왕조 멸망 후, 100만 청나라 대군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1912년에 청나라가 멸망했던 것은 역사의 흐름에서 볼 때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무거울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청나라의 멸망을 돌이켜보면, 그 과정에서 반드시 자희태후(慈禧太后)를 거쳐갈 수 밖에 없는데요, 예허(叶赫)의 수령이었던 김태길(金台吉)이 말했던 것처럼 그녀는 청나라 멸망의 저주를 불러일으킨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조정을 손에 넣은 48년 동안 황실의 세력이 시들해졌기 때문입니다.
먼저, 함풍제(咸丰帝)는 빈비(嫔妃)가 많았지만 아들 동치(同治) 하나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원래 함풍제 이전의 황제들은 모두 자손이 많았는데, 그의 아버지 도광황제만 보아도 19명의 자녀를 두었던 것에 비하면 함풍제 대에는 유달리 자손이 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나라 말기의 광서제와 마지막 황제 푸이의 형제들은 많은 자녀들을 보았기 때문에, 함풍제와 그 후의 세 명의 황제들은 근친혼의 후유증으로 자손이 귀했다는 주장은 허점이 많은 견해입니다.
그리고 청나라 멸망으로 가는 길은 황실을 이끌어갈 후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희태후의 집권시절, 극도의 사치와 무지는 청나라라는 거대한 배를 심연으로 몰고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나라 백만 대군은 어디로 갔을까?
청나라는 멸망했지만, 처리해야할 많은 후속 문제 중 하나로 청나라 군대의 거취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청나라 군인들이 한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후 북양군(北洋军)에 합류했고, 그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름이 잊혀졌습니다.
역사 속에서 백만 명의 청나라 군인들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지만, 마침내 1987년이 되어서야 그들의 종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아편전쟁 이후 영국이 불평등조약을 통해 홍콩을 점령했지만, 당시 구룡(九龙)지역은 청나라 식민지에 속했고, 구룡 지역은 홍콩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구룡과 인근 지역에 백만 주둔군을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견고한 성벽과 포루를 건설했지요.
그러나 청나라 멸망 후, 이 군대는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약 5만명 가량은 구룡 지역에 남겨두었습니다.
이때 영국은 청나라가 막 멸망한 틈을 타서 갑자기 구룡 지역으로 쳐들어가 구룡을 점령한다면 곧바로 다음 단계의 침략 계획을 진행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아있던 수 만명의 청나라 군이 다시 전투복을 입고 영국군과 맞서기 시작했고, 지지부진한 대치가 이어지다가시간이 흐르자 각종 여론의 압력으로 영국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룡 성채(龙城寨)는 고립되어 어쩔 수 없이 병사들은 자급자족 해야했고, 그렇게 75년을 버텼습니다. 그동안 그들은 점차 잊혀졌습니다.
1984년에 중영 연합성명이 체결되어 구룡 성채를 철거하기로 결정하고 나서야, 사람들은 그 백만 명이나 되는 청나라 군인들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쭉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 당시의 편제와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명으로 청나라의 마지막 군대는 결국 해산되었습니다.
비록 구룡 성채는 한때 청나라 군대의 관리 아래 회색지대가 되어 범죄 소굴이 되었었지만, 자신의 국토를 목숨으로 지키던 청나라 군인들의 희생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적의 침략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가를 지키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진 청나라 군인들에게서 우리가 본받아야할 점인 것 같습니다.
<참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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