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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 시기 신의없는 토비(土匪), 리우헤이치(刘黑七) 인생 스토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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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 시기 신의없는 토비(土匪), 리우헤이치(刘黑七) 인생 스토리

hanyuku 2021. 10. 12.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에서 민국 시기는 특수한 시대로서, 각 지역의 호걸들이 함께 일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일반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없는 난세였습니다. 각지에서 비환(匪患, 비적에 의한 재난)이 속출하였고, 극악무도한 사람들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수많은 비적들 가운데 리우헤이치(刘黑七)는 단연 으뜸가는 존재였다고 하네요.

 

 

수많은 호걸들과 달리, 리우헤이치는 토비(土匪)들 중 가장 기개가 없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데요, 그가 믿는 진리는 단 하나, 바로 "젖을 주면 어머니요, 돈을 주면 아버지다(有奶就是娘,给钱便是爹)" 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지조없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했다고 하는데요, 도대체 리우헤이치는 어떤 토비였을까요? 어찌하여 수많은 무장 세력들 중에서 우여곡절 끝에 20년 넘게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일까요?

 

 

예로부터 "일산일수일성인(一山一水一圣人)"으로 불리던 산둥성(山东)에는 유교 문화의 발원지가 있고, 수호 일백단팔장(浒一百单八将), 수·당 영웅 반산동(隋唐英雄反山东)의 전설이 있습니다.

 

 

산둥성에서 유명한 것은 저러한 문성무종(文圣武宗) 뿐만 아니라,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도적들도 있었습니다. 리우헤이치는 바로 이러한 땅에서 나온 사악한 혼세(混世)의 마왕이었다고 합니다.

 

리우헤이치

 

 

광서(光绪)18년인 서기 1892년, 리우헤이치는 지금의 산둥성 핑이현(山东省平邑县)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리우상윈(刘相云)은 평소 야간 순찰을 하며 생활하는 현지의 경부(更夫)로써, 여름과 가을이 되면 다른 집의 농사를 도와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습니다.

 

 

사실 리우상윈은 청나라 말기에 집 한 칸, 밭 한 고랑도 없이 비바람을 피할 곳 조차 없이 살았고, 먹을 것도 없어서 주워서라도 한입만 먹으면 큰 은혜처럼 여기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가난한 사람이 리우상윈 뿐만이 아니었고, 하늘이 그를 도우셨는지 마흔 살 되던 해에 결국 아내를 얻어 리우헤이치를 낳았습니다.

 

 

궁상맞게 살았던 리우상윈은 어렵게 얻은 이 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며 리우구이탕(刘桂堂)이라는 의미있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 세 식구는 리우상윈이 직접 지은 오두막에서 하루에 간신히 한 끼는 먹고, 한 끼는 굶는 생활을 했는데, 리우구이탕도 이런 고생 속에서 어렵게 자라났습니다.

 

 

리우구이탕이 12세 되던 해, 아버지 리우상윈은 그에게 집안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며, 마을의 큰 부잣집에서 양몰이를 하는 일을 시켰습니다.

 

 

아직은 어린아이였던 리우구이탕은 이때부터 양치기 소년이 되어 하루 종일 양떼를 몰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양떼를 방목하며 돌아다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변하게 되었죠.

 

 

뚱뚱하게 살찐 양떼를 몰고 다니는 자신을 보며, 집안의 부모는 종일 배불리 한 끼도 먹지 못하는 것을 보고 리우구이탕은 못마땅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처럼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리우구이탕은 그제서야 부자가 될 길을 모색하게 되었죠. 그는 자신이 몰고 다니며 살찌운 이 몇 십 마리의 뚱뚱한 양들은 지주의 재산에 자그마한 흠집도 안 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리우구이탕이 주인 몰래 양 한 마리를 팔았습니다. 주인이 그 사실을 알고 그에게 추궁하자, 그는 미리 생각해둔 대답을 허심탄회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양을 방목하던 중 양을 잃어버렸는데, 그 사실을 알고 찾아갔을 때는 이미 양이 종적을 감춘 뒤였다고 말한 것이었죠. 주인은 그의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며 그의 거짓말이 사실인 것으로 곧이곧대로 믿게 되었습니다.

 

 

 

 

한 번, 두 번 하게 되면서, 리우구이탕의 담력은 점점 커졌고, 주인집의 양들도 간헐적으로 사라져갔지만, 아무도 리우구이탕이 몰래 양을 팔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양을 팔고, 리우구이탕 수중에 돈이 생기자, 그는 올바르지 못하게도 남이 도박장에 가서 돈을 놀리는 것을 흉내내다가 결국에는 영락없이 잃고 빚더미 위에 앉게 되었습니다.

 

 

리우구이탕이 20세 되던 해, 양을 친지 8년이 되던 그는 빚쟁이에게 압박을 받았고, 그가 돈을 갚을 수 없자, 빚쟁이는 홧김에 그를 절벽에서 밀어버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사일생으로 절벽에 난 휘어진 나무에 걸린 리우구이탕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집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혼자 칭다오로 몰래 도망가 돈을 벌 궁리를 하였습니다.

 

 

리우구이탕은 칭다오에서 2,3년간 머물렀지만, 돈은 얼마 벌지 못했고, 오히려 번화한 세상을 보며 견문만 넓혔습니다. 하지만 자꾸 밖에서 헤매기만 하는 것도 방법이 아닌지라, 1915년에 이르자, 리우구이탕은 도저히 칭다오에서 계속 버틸 수가 없었고, 그래서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리우구이탕은 23세의 청년이 되어있었고, 고향에 돌아온 후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놀았고, 생활력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은 리우구이탕은 어떻게 사람이 돈을 가장 빠르고 많이 벌 수 있는지를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는 약탈해오는 돈보다 더 빠르고 많이 벌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었고, 몇 가지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리우구이탕은 그와 비슷한 동네 건달들 몇 명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린촨쥐(林传聚)와 자오춘룽(赵春荣) 두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그들 세 사람은 큰 칼 하나와 재래식 엽총 한 자루를 들고 집에서 멀지 않은 산 속에서 풀을 뜯고, 민가 약탈을 했습니다. 나중에 리우구이탕은 자신의 동생인 리우구이즈(刘桂志)와 친척들을 끌어들여 8인조 그룹을 꾸렸습니다.

 

 

 

 

평서(评书)의 녹림호걸(绿林好汉)들처럼 여덟 사람은 도원삼결의(桃园三结义)와 와강일주향(瓦岗一炷香)을 배워 머리를 땅에 부딪혀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리우구이즈가 가장 어렸고, 리우구이탕은 7번째였는데, 까무잡잡한 피부 때문에 모두들 그를 헤이치(黑七)라고 불렀고, 이때부터 산둥성 핑이현에 리우헤이치라는 토비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리우헤이치와 그의 의형제들은 의로운 도적떼들처럼 구호가 내걸린 깃발을 들지 못하였는데요, 그 이유는 그들이 모여 있는 이유가 순전히 다른 사람들을 때리고, 집을 약탈하고, 길을 막고 강탈하며 자기들끼리만 먹고 노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죠.

 

 

리우헤이치는 성정이 매우 모질고 악랄했습니다. 강도 과정에서 반항하는 행동이 있으면 칼을 들고 베었고, 총을 들고 때렸습니다. 몇 년 동안 핑이현에 인접한 몇몇 현들은 리우헤이치라는 이름을 듣고 벌벌 떨었습니다. 그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피하고, 미처 피하지 못했다면 돈을 주고 목숨을 부지하였는데, 자칫 잘못하면 멸문지화였습니다.

 

 

몇 년 간의 발전을 거쳐, 리우헤이치의 토비 소굴은 이미 수백 명까지 발전하여 큰 무리를 이루었고, 백성들의 원망이 들끓었습니다. 하지만, 강가를 다니는데 물에 젖지 않은 신발이 없겠느냐는 말처럼, 리우헤이치가 한참 우쭐거리던 시기에 한 사람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당시 옌저우 진수사(兖州镇守使)였던 허펑위(何锋钰)였습니다. 허펑위의 아버지의 이름은 허쭝롄(何宗莲)이었고, 행오(行伍) 출신으로, 청나라 말기 조정에서 마지막 차하르도통(察哈尔都统)으로 관지정이품(官至正二品)에 해당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신해혁명 이후, 위안스카이에게 시종관(侍从官)을 지내기도 하였죠.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난세에 도를 닦고,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있도록 실업을 발전시키면서 가난한 대중을 구제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허펑위는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아 큰 뜻을 품고 위난에 빠진 백성들을 도와 국가에 보탬이 된 셈이었죠.

 

 

허펑위는 리우헤이치 등의 무리가 악한 행동을 많이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그를 제거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리우헤이치의 토비 소굴에는 모두 깡패들로 구성된 오합지졸들 뿐이었고, 허펑위는 정규군을 데려와 한차례 교전을 벌였습니다. 정규군에 맞설 상대는 안되었던 리우헤이치 무리는 곧 무너지게 되었고, 그는 자신의 형제들을 이끌고 다시 산둥 지방의 최대 토비였던 쑨메이야오(孙美瑶)에게 몸을 의탁하였습니다.

 

 

 

1923년 당시 산둥성 당국이 비적떼를 토벌하던 상황에서, 리우헤이치의 부하들은 연합하여 "린청 차량 강탈사건(“临城劫车案)"을 일으켰고, 당국은 쑨메이야오를 투항시킨 후 그를 처형하였습니다.

 

 

리우헤이치는 스스로도 자신의 죄가 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곧 장헤이롄(张黑脸) 등과 함께 또 다시 수천 명의 해산된 토비들을 불러모아 뭉쳐서 죽이고 약탈하는 짓을 벌였습니다.

 

 

우두머리가 교체된 지역에서 리우헤이치는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현지 인민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고, 그에게 반항하는 사람들은 더욱 잔인무도하게 살해했습니다.

 

 

관련 사료에 따르면 1928년 3월 29일 심야에, 리우헤이치와 수천 명이 넘는 토비들은 페이현 따쓰옌촌(费县大泗彦村)에 난입하여 광란적인 학살을 시작하였는데, 마을 전체 92가구에서 그가 죽인 사람들은 총 48가구, 637명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리우헤이치가 떠날 때 살아남은 건 78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마을에서도 리우헤이치에 의해 947명이 학살당하여 하룻밤 사이에 목숨을 잃어버렸습니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 3년여 동안, 이멍산(沂蒙山区)구 1000여개 마을 중 단 한 곳도 리우헤이치의 약탈을 당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재물 손실을 입은 가구는 20여만 채에 달했으며, 그의 칼에 참혹하게 죽은 사람들이 1만여 명, 학살당한 마을이 네 군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살아남은 78명 중 15명은 마을에서 다행히도 목숨을 건졌고, 28년 가을이 되자, 원래 600여 명에 이르던 따쓰옌촌의 인구는 42명만 남게 되었다고 <페이현 현지(费县县志)>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리우헤이치라는 사람이 인간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부모에 대한 최소한의 효심은 있었을 것입니다.

 

 

리우헤이치는 도적질을 하다가 처음으로 돈을 빼앗아 왔을 때, 맛있는 것들을 많이 사서 부모님 앞에 놓았습니다. 아버지 리우상윈은 이렇게 좋은 술과 요리를 많이 본 적이 없었고, 한 끼를 게걸스럽게 먹고 배가 불러 죽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리우헤이치는 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했고, 어머니의 말은 무엇이든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리우헤이치는 무릎을 꿇고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머니 생신을 위해 가까운 마을에서 가축 2000여 마리와 각종 과자, 떡 3만여 근을 구해와서 자신들이 도사리고 있는 산에서 열흘 동안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중원대전(中原大战)에 즈음하여, 리우헤이치 수하 비적들은 이미 3만여 명에 달하였는데, 장개석은 산둥성에 도사리고 있던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리우헤이치에게 돈을 주고 식량을 주는가 하면, 국민당의 신사군(新四军) 사단장 자리까지 주었습니다. 처음에 리우헤이치는 장개석을 도와 장쭝창, 펑위샹(张宗昌、冯玉祥) 등을 물리쳤는데요, "서북왕(西北王)" 옌시산(阎锡山)과도 끝까지 대항하였습니다.

 

 

장개석은 자신의 직계 부대 외에는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장개석은 겉으로는 리우헤이치의 대의명료, 사리가 밝은 것에 칭찬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를 항상 방어하고, 물자와 군량미는 가능하면 질질 끌며 주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 미루었으며, 허울뿐인 명예만 주었습니다. 그러자 리우헤이치도 장개석에 대한 불만이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이를 본 옌시산은 때가 됐다며 리우헤이치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장개석이 주는 돈보다 많이 주고, 지위도 장개석이 주는 것보다 큰 것을 주었습니다. 리우헤이치는 본래가 토비 출신인데다 줏대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주는 사람이라면 누구와도 함께 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동북이 바뀌고, 918이 터지자, 장쉐량(张学良)은 장개석의 명령을 받아 관내로 후퇴하였고, 옌시산도 산시(山西)성으로 후퇴하였습니다. 리우헤이치는 "동북왕" 소장 장쉐량이 옌시산보다 훨씬 믿음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장쉐량의 부하가 되기 위해 향했습니다.

 

 

하지만, 장개석과 장쉐량이 의형제임을 리우헤이치가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사사로운 원한으로 벼르고 있던 장개석은 기회를 노려 장쉐량에게 비적을 토벌하라고 명령하였고, 천여 명의 패잔병이 산둥 지방으로 도망가 이멍산구로 피신하였습니다.

 

 

이때 당시 장개석의 머릿속은 반공(反共)으로 가득하였었으며, 당시 산둥성 주석이었던 한푸취(韩复渠)는 리우헤이치를 초벌 대응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리우헤이치는 한푸취, 쑹저웬(宋哲元) 등에게 복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신의가 없었던 리우헤이치는 반복해서 국민정부로부터 환심을 사도록 노력하는 한편, 산둥, 허베이, 허난(山东、河北、河南) 등지를 돌아다니며 약탈하여 금품을 빼앗았습니다.

 

 

한푸취는 리우헤이치를 참다 못해 다시 토벌에 나섰고, 리우헤이치는 또 다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때 일본군은 이미 텐진을 점령하였었는데, 리우헤이치는 일본군과 비밀리에 내통하여 일본인의 도움으로 다시 3천여 명 규모로 성장하여 다시 산둥성으로 돌아갔습니다.

 

 

일본군이 산둥성에 도착한 후, 한푸취는 총 한 방 쏘지도 못하고 도망갔습니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를 보이자, 리우헤이치는 다시 일본인의 휘하에 들어가 공개적으로 매국노의 앞잡이가 되어 중국인들을 잔혹하게 살해하였습니다.

 

 

일본군의 도움으로 리우헤이치는 점점 더 성장하였고, 약간은 우쭐한 마음도 가졌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그의 과거도 속속들이 알고 있었으며, 호랑이를 키우지 않기 위해 점차 리우헤이치의 토비 세력을 약화시키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리우헤이치도 일본인의 의중을 알고 있었고, 일본군이 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기회를 빌려 그는 또 다시 대오를 이끌고 페이현으로 돌아왔는데요, 이번에 리우헤이치는 영리하게도 항일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면서 일본군과 끝까지 혈투를 벌여 나라를 지키겠다고 공언하였죠.

 

 

그러나, 리우헤이치는 국민당과 함께 일하면서 일본군과 은밀히 왕래하며 이멍산의 공산당원들을 대량으로 학살하였습니다. 국민당과 일본군의 인정을 받기 위해 그는 남부 60여 개 마을을 학살하였고, 근거지에 있던 공산당원 700여 명을 무참하게 살해하였습니다.

 

 

1943년에는 참다못한 산둥 군구 사량원이 리우헤이치 작전 명령을 내리자, 군인들과 현지 주민들이 똘똘 뭉쳐 리우헤이치가 있는 지역을 맹공격하였습니다.

 

 

공산당 군대의 적수가 못되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던 리우헤이치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또 다시 거짓으로 "가짜 어머니"를 북양군에 인질로 보내며 거짓 수작을 벌였고, 자신과 생김새, 몸집이 비슷한 8명을 자신의 대역으로 삼았습니다.

 

 

 

 

 

그해 11월 중순, 리우헤이치의 마지막 대역이 생포되었고, 리우헤이치의 마지막 은신처를 실토하였습니다. 추격 작전 전체 과정을 담당하고 있던 왕루슈이(王麓水)가 최후의 일격을 가해, 전사들을 이끌고 리우헤이치를 토벌하러 갔습니다. 그가 어둠을 틈타 황급히 달아나는 사이, 왕루슈이는 리우헤이치를 향해 총을 두 발 쏘았고, 드높은 악명을 떨치던 리우헤이치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습니다.

 

 

옛 말에 인과응보가 있다고 하죠. 리우헤이치의 죗값은 이렇게 목숨으로 치러지게 되었습니다.

 

 

20여 년 동안 산둥성에 틀어박혀 72명의 아내를 얻기까지 한 리우헤이치는 결국 인과응보를 받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의 손에 희생된 수많은 백성들의 한을 풀기에는 너무나도 모자랐습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uper?context=%7B%22nid%22%3A%22news_9613737199072743368%22%7D&n_type=-1&p_from=-1

 

土匪刘黑七流窜7省,娶72位老婆,为保命,送“假母亲”当人质!

民国是一个特殊的时代,各路豪杰并起,让人惊艳,但这也是一个民不聊生的乱世,各地匪患层出不穷,穷凶极恶者数不胜数,不过在众多匪首之中,刘黑七绝对首屈一指,是极为特殊的一个。

mbd.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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