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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은 한 노부인의 인생 스토리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인간이 인간인 까닭은, 동물보다 감정이 많기 때문인데요, 이런 감정들은 매우 많은 귀속처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고향에 대한 깊은 소속감도 이에 해당이 되겠지요.
중국의 산시성(陕西)에는 90세 된 노부인이 있는데, 생전에 줄곧 호적을 등록하지 않으려고 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고 하는데요, 그 할머니가 세상을 뜨기 직전에 사진 한 장을 내놓자 비로소 그 할머니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항일 전쟁 시기, 수많은 일본 아이들이 중국에 남았다
1937년, 중화인민공화국은 외래 침략자들에 저항하며 전쟁의 가장 힘든 시기에 들어가게 되었고, 중일관계가 나빠지자 중국에 머무르고 있는 수많은 일본인들이 전례없이 어려운 처지를 겪게 되었습니다.
만약 중국에 남아있으면, 중국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런 민감한 시기에 일본으로 돌아가는 선택도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절대 다수는 유랑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과정 중에서 수많은 일본 아이들이 중국에서 버려지거나, 일부는 전란 속에서 부모를 잃어버려 오갈 데 없는 고아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밖에도, 수많은 일본 병사들이 이미 중국 땅을 그들의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했고, 심지어는 중국에 가족을 거느리고 와서 참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최후는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패전 후 포로가 되거나 전사한 이러한 사람들은 다시는 자신의 가족들과 아이들을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본 병사들의 자녀들도 중국 땅에 남게 된 것이죠.
오늘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왕위란(王玉兰) 노인은, 다름아닌 바로 이러한 중국에 남게된 일본 아이들 중 한 명입니다. 반면 그녀의 인생은 바로 중국에 남게 된 수많은 일본인 아이들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이 과정에서 그녀가 갖게된 중국에 대한 감정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깊을 뿐이지요.
왕위란: 부모와 헤어져 중국인이 되다
왕위란의 본명은 미즈사키 히데코(水崎秀子)로, 어릴 적 사업을 하는 부모를 따라 중국에 와서 정착하게 되었고, 중화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항일 전쟁 기간 동안, 왕위란과 그녀의 부모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 서로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후 그녀의 부모의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중국어를 매우 유창하게 말했기 때문에 그녀가 나중에 떠돌며 정착하게 된 그 작은 마을에서, 모두들 그녀를 전쟁중에 부모가 모두 사망하게된 고아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비록 부모가 없었지만, 왕위란은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곱게 자라났습니다. 이 때문에 그녀가 10대 때 레이(雷) 라는 성씨의 장교에 눈에 띄게 되었고, 두 사람은 서로 사랑에 빠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마음먹었고, 현지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달콤한 날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왕위란은 남편을 따라 다른 도시로 이사가게 되면서 청천벽력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남편이 이미 부인과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인 것이었죠. 이것은 정말로 도덕적 한계에 부딪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요즘 사회 뉴스에 등장하는 코드처럼, 레이 군관이 만류와 각종 보증을 반복해도, 왕위란은 모두 마음에 와 닿지 않았고, 매우 확고부동한 결심을 가지고 그와 이혼하였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왕위란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결혼의 실패가 오히려 그녀의 일본인 신분의 가장 좋은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는 것입니다. 현지 사람들은 모두 왕위란을 레이 군관에게 속은 여자로 여기게 되었고, 그녀의 본적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왕위란도 계속 안심하고 이 마을에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의지할 데 없는 여자였고, 생계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생활을 더욱 나아지게 하고 싶다면 최선의 방법은 재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위란은 현지 여성 주임(妇女主任)을 찾아가 소개팅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그녀는 촌민위원회(村委会)의 주선으로 한 현지 농민을 만나게 되었고, 비록 불꽃같은 사랑은 아니었지만, 가늘고 길게 물 흐르듯 이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왕위란에게 있어서, 그녀가 한 농민과 결혼한 이후, 생활 수준은 레이 군관과 결혼했을 때에는 못미쳤지만, 그래도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 수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조직의 안배 하에 곧바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왕위란의 생활은 그녀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이어질 것 같았지만, 뜻밖에도 당시 많은 불치병을 앓았던 왕위란의 두 번째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불행하게도 병으로 인해 세상을 뜨게 되었고, 왕위란만 홀로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 작은 마을에 익숙해진 왕위란은 사투리까지 익히면서 이곳을 고향처럼 여기게 되었고, 중국에도 깊은 동질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1976년이 되자 왕위란은 한 남자 동지의 부드러움과 섬세함에 감동하여 다시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었고, 이번에는 별다른 변고가 없었습니다.
호구제도가 시행되었지만, 왕위란은 매우 꺼렸다
이렇게 촉박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어가던 그녀의 조용하던 삶은 신중국에서 호구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하면서 다시 파란만장해졌습니다.
당시 호구제도는 법률의 보장을 받은 것으로, 신중국이 성립된 이후 중국 땅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호적에 등록해야 합법적인 중국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당시엔 관련 부서를 거쳐 호적이 등록되면, 각종 혜택을 볼 수 있었고,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 혜택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거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왕위란은 현지 호적에 등록되기 싫다고 거부했고, 사람들이 이유를 물어도 우물쭈물 하기만 하여 사람들은 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현지 정부 부처와 할머니의 아이들과 친구들이 끊임없이 달래자, 결국 노부인은 사실을 말했습니다. 왕위란이 보기에, 비록 자신이 이미 중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중국을 매우 좋아하고 있더라도, 자신의 원래 고향은 일본이니 고향에 대한 일정한 소속감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만약 자신이 중국 호적에 편입이 되어버린다면, 자신의 일본 가족들과는 영원히 알아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비로소 귀가 번쩍 뜨이게 되었고, 왕위란의 처지를 잘 이해하며, 그녀의 뿌리찾기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차차 조사를 거듭하여 그녀의 일본 친정을 발견했지만, 뜻밖에도 미즈사키 히데코(水崎秀子)라는 그녀의 신분을 대체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사람들을 매우 놀라게 했습니다.
중국에 남기로 결정, 장례식에 친정 사람들이 방문
양측이 팽팽한 접전을 벌이던 중, 왕위란의 DNA를 대조하여 누가 진짜 미즈사키 히데코인지 알아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기관의 도움을 받아 DNA 검사를 하게 되었고, 이 노인의 일본 친정도 결국 누가 진짜 미즈사키 히데코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노부인의 "뿌리를 찾는 꿈"은 결국 이렇게 원만한 마침표를 찍게 되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왕위란의 선택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는데요, 그녀는 일본으로 돌아가 생활해야 할까요, 아니면 중국에 남아 생활해야할까요?
당시 왕위란의 고령으로 인해, 중국 현지 관계 기관들은 그녀가 호적에 오르지 않고도 계속 중국에 남아 살 수 있도록 예외적으로 허용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노부인은 자연스럽게 중국 땅에 대한 깊은 정감을 갖게 되었고, 필경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2018년이 되자, 노부인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장례식에서 그녀는 일본의 전통 의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장례식에 사용했는데, 그제야 현지 장례식 참석자들에게 그녀의 정체를 알리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친정에서도 그녀를 위해 멀리서 찾아와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주었습니다.
마무리
어린시절, 왕위란은 부모를 여의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혼자 있으면서 그 감정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행복했었고, 비록 세 번의 결혼을 거치긴 하였지만, 인생 전체적으로는 순조로워서 큰 우여곡절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장 지적할 만한 가치있는 점은 바로 그녀가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설령 중국에서 수 십년간 생활 해왔고, 마음속 깊이 중국 땅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뿌리는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잠시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꺼내진 않았었지만,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는 이러한 점은 확실히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요.
<참고기사>
陕西90岁老奶奶,生前拒绝上户口,临死前交出一张照片,揭露身份
锦城虽乐,比如回故乡;乐园虽好,非久留之地。——华罗庚 人之所以为人,就是因为我们比动物多了情感,这些情感有很多归处,比如朋友和爱人,当然还有对家乡的深切归属感。 在我国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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