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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은 왜 두 번이나 임표(林彪)를 끌어들이는데 실패했을까?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임표는 중국 근대 혁명의 풍운아로, 훈련과 지휘에 독특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서, 국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사실 임표는 홍군의 전장(红军的战将)이 되기 전 장개석의 눈 밖에 났었습니다.
황포 군관학교의 교장으로서, 장개석은 잠재력이 큰 이 학생을 반드시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어하였으나, 그는 두 번의 시도에서 모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으로 오해와 공교로움으로 가득찬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되었고, 이러한 점은 아마도 그가 해방군의 원수(元帅)가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장개석은 성부(城府)가 비교적 깊고, 일찍이 강호에서 오랫동안 싸워왔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모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이 부리는 인재들을 회유해야만 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황포 사관학교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교장을 빙자하여 황포 사관학교를 자신의 인재 선발학교로 만들려던 그는, 자신의 직계 부하도 황포 사관학교 출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황포 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23기 학생들 전체 중 1기와 4기가 가장 주목을 받았고, 재목이 될 만한 확률이 가장 높았습니다.
황포 1기생 중 공산당에 입당한 진갱, 좌권, 서상전(陈赓、左权、徐向前)을 제외하고, 송희렴, 호종남, 두율명(宋希濂,胡宗南,杜聿明) 등이 훗날 그의 아끼는 장군이 되었지요.
1기에서는 별을 빛냈고, 4기에서는 청출어람으로, 호련, 장령보, 유옥장(胡琏、张灵甫和刘玉章) 등 내로라 하는 장군이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나 4기생 중 장개석이 가장 잊지 못하고 후회하게 만든 학생은 임표였다고 합니다.
랴오시 선양 전투(辽沈战役) 때, 국민당이 군정 회의를 열자, 장개석은 약간 가슴아파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임표녀석, 내가 그를 칭찬해줘야 하는데, 그는 황포 시절 가장 우수한 장군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교장과 교관들을 모두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교장 자리를 잃어서, 황포에서 그에 대한 관심이 충분하지 않아, 그가 공산당에 투신하게 된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장개석의 이 말은 매우 무거워서, 국민당 군관들의 뺨을 때리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즉 그곳에 있는 군관들 아무도 임표에 비할 상대가 못 된다는 의미였지요. 분노와 원망이 뒤섞여 무시하는 태도가 당시 국민당 장교에 대한 장개석의 태도였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서 장개석도 한편으론 자신을 질책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요, 만약 그때 그가 임표를 끌어들였다면 어떻게 이런 낭패를 볼 수 있었을까 라는 것이겠지요.
사실, 장개석은 임표를 포섭한 적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황푸 시절, 임표에게 그는 두 차례나 포섭을 시도했지만, 그의 성격상의 결함이 드러나면서, 그는 이 유능한 장군을 놓치게 되었고, 오히려 자신에게 무덤을 파는 장수를 얻게 되었습니다.
첫번째 접견
1925년, 손중산이 세상을 떠난 뒤, 국민당 내부의 권력에는 알력 다툼이 생겨났는데요, 왕정위가 대다수의 지지를 얻자, 심란해진 장개석은 황포 군관학교로 자리를 옮겨 심기일전 하였습니다. 그곳은 그가 때를 기다리며 마음을 낫게 하던 곳이었기도 했지요.
장개석은 위사(卫士)들은 쉬게 하고, 자신은 학교를 돌아다녔는데, 당시 황포 4기 보과의 학생들이 전술 수업을 받고 있었고, 과제는 1925년 10월 14일 황포 동군이 혜주를 공격한 사례였습니다.
이 전투는 동정군(东征军)이 30시간이 걸려 "고약금탕(固若金汤, 철옹성)"이라 부르는 혜주성을 함락하는데 성공하였고, 그 총 지휘자가 바로 장개석이었습니다.
장개석은 수업을 중단하지 않고, 교실 뒷줄에 앉아 선생님과 학생들의 토론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이 싸움은 그가 지휘한 득의양양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전투 중의 세부 사항에 대해 익숙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틈을 타 발언하는 학생들이 군사 지휘에 얼마나 영민한지, 몇가지 좋은 재목들을 발견할 수 있을지를 살펴보고자 함이었습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무대에 오른 후, 단지 과장된 말뿐이었습니다. 장개석의 지휘가 적절했다고 칭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전술상의 실수를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말들에 대해 장개석은 웃기만 하고, 맞다 틀리다를 말하지 않고선 속으로만 감탄하였지요. 모두 탁상공론이었던 것입니다.
임표의 차례가 되자, 장개석은 별로 주의를 두지 않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임표의 외양은 별로 출중한 구석이 없었고,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니 장개석이 싫어하는 내향적인 사람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임표는 단상위에 올라가서 직접 혜주 전투의 득실을 지적하진 않고, 분필을 들고 칠판에 혜주 지형도를 그렸습니다. 칠판위에 그는 세밀하게 성벽과 하천, 지세 등을 그려놓고는, 그림에 근거하여 전투 진행 중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이를 본 장개석은 임표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분명 임표라는 이 학생은 혜주 전투의 과정을 자세히 복기하면서 전투의 양상을 파악하였고, 그가 말하는 것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가 아니라 정말 사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우수한 장군이 소홀히하지 않고 반드시 지녀야 할 자질이었습니다.
소리없이 사무실로 돌아온 장개석은 부하들에게 이렇게 분부하였습니다. "보과반(步科班) 수업이 끝나면 임표를 교장실로 오라고 하라."
임표는 교장실로 들어가면서도 여전히 조심스러운 기민함과 냉정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장개석은 주동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어디 출신인지, 고향에서 무슨 일을 했었는지, 어려움과 요구사항들이 있는지 등 많은 문제에 대해 속사포처럼 질문했습니다.
임표의 대답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세련되었지만, 분수를 알고 있으면서도 답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장개석은 자신보다 20살이나 어린 이 학생이 18세가 아닌 이미 48세로 이미 거센 풍랑을 헤쳐나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임표에 대한 이미지는 다루기 어렵고,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대화가 이어지자 두 사람은 경계를 풀고 마치 친구처럼 이야기하는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열정적으로 되었고, 더욱 익숙해졌으며, 돌멩이 같은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리 말해도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제간의 담화가 무르익던 때, 장개석의 비서 진입부(陈立夫)가 문을 두드리며, "왕당대표 정위도 황포에 왔으니, 장 교장께선 나와서 공무를 논의하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낭희필(娘希匹)" 이라며 장개석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욕을 했습니다.
요중개(廖仲恺)가 세상을 떠난 뒤, 왕정위는 황포 군관학교 당대표의 직무를 맡게 되었던 것입니다. 원래 그는 장개석과는 물과 불처럼 으르렁거리던 사이였는데, 현재 황포로 손을 뻗치는 것은 마치 장개석의 본거지를 파헤치려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장개석을 열받지 않게 할 수 있었을까요.
화가난 것은 화가 난 것이지만, 윙정위는 광동 국민 정부의 결정권자로서, 상대방의 체면을 깎을 수는 없었습니다.
장개석은 얼굴의 노기를 눌렀지만, 마음은 몹시 불편하여 문을 박차고 나가기에 이르렀고, 임표의 멍한 얼굴만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임표는 우수한 내면의 소유자로, 평소에는 태연한 낯을 하고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교장이 인사도 없이 떠나며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나가버리자, 임표는 자존심이 짓밟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장개석과 임표의 첫 만남은 그렇게 불쾌하게 끝났고, 임표는 그것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두번째 오해
몇 달 후, 장개석은 다시 학생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고, 임표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이번에는 장개석이 아무 이유없이 부른 것이 아니고, 임표에게 직접 큰 떡을 그려주며, "졸업 후 총사령부에서 일해라." 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임표는 단번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는 사관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교장으로부터 총사령부에 들어가 일하라는 승낙을 받았으니 이것으로도 상당한 것이었죠.
누구든지 이러한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흔들리겠지만, 임표는 이때 이미 공산당에 입당하여 필적한 뒤였습니다. 졸업 후 어디로 일하러 갈 지는 조직에게 맡겨야 했었는데, 당시에 조직에서는 그를 엽정독립단(叶挺独立团)으로 보내려 했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임표는 그냥 "교장의 신임과 교육에 감사한다."고만 말했습니다.
이 말은, 도대체 갈건지 안 갈건지 모르는 어물쩡한 대답이었습니다. 장개석은 임표가 말을 아끼는 것을 알게 되자 무언가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리하지 않으려고 하며, "그래, 내가 출정하기 전에, 나중에 네게 연락하마."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담화가 있은 후, 장개석과 임표의 인연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장개석은 군사를 이끌고 북벌 전투에서 호남, 호북, 강서로 전전한 후 눈깜짝할 사이에 1927년 가을이 되었고, 곧 황포 4기 학생들이 졸업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장개석은 진입부를 찾아와 4기생의 분배 상황을 물었습니다.
진입부는 당시 북벌군 총사령부 기요과장(机要科长)이자, 비서처장이었는데, 장개석이 임표에 대해 묻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조사한 바, 이 사람은 아마 공산당일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교장 옆에 두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입니다."
장개석은 황포가 공산당의 본거지가 다 되었다며 발끈했습니다. 이어 손을 흔들며, 그건 말할 것도 없고, 이당분자(异党分子)를 옆에 두는 것은 늑대를 끌어들인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후 당 조직을 재삼 고려하며, 사실 임표를 장개석의 총사령부로 보내는 것을 생각하였는데, 내부의 반응도 좋았고, 임표 본인도 기대를 하고 있었으나, 장개석 쪽에서 소식이 없자, 이 것은 다시 장개석의 머릿속에만 남게 되었습니다.
임표는 교장의 임명을 기다리다 못해 결국 엽정 독립단으로 가 혁명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교장과 학생 사이의 앙금도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버렸지만, 이는 결국 중국 역사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참고기사>
蒋介石两次拉拢林彪,为啥都没成功?
林彪是中国近代革命中的风云人物,练兵和指挥有一套独特的风格,以至于国共双方都对他评价极高。 实际上,在成为红军的战将之前,林彪早就被蒋介石盯上了。 作为黄埔军校的校长,蒋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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