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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걸이 걸어온 인생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중국에선 최근 몇 년 새, 이연걸의 현재 근황에 대한 이야기가 부쩍 늘었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찍힌 몇 장의 사진들에서 굉장히 노쇠해진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가 갑상선 기능 항진증에 걸려 아픈거라는 추측이 돌고 있다네요.
매번 이런 소문이 나올 때마다 큰 파장을 일으키는데, 사진 몇 장으로 파생된 추측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진짜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연걸은 현재 57세로, 환갑이 다 되어가는데요, 한 때 쿵푸황제로 무술도 뛰어나고 건강한 매력이 늘 넘치는 배우였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이런 건강이상설이 나오는 것일까요? 환갑이 가까워져 오는 이연걸은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사라진 이연걸은 어디로 갔을까요?
01. 톱스타는 떡잎부터 다르다.
1963년, 이연걸은 북경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났는데요, 위로 두 명의 형과 두 명의 누나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 시절에 아이 다섯을 기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연걸이 두 살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어머니는 매표원으로 일했기 때문에 가정 살림은 매우 빡빡하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연걸의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저버리지 않고 다섯 아이를 홀로 키워내며, 심지어 두 명의 연로한 노부모까지도 함께 맡았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가 일찍 철이 든다고들 하지요. 이연걸도 어려서부터 철이 들어서 잘 울지 않고, 떠들지도 않고, 새 옷이나 가방을 사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옷은 모두 형과 누나에게 물려받은 것들을 입었지요.
이런 환경에서 성장하면서, 그는 고생이 무엇인지, 돈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나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71년, 이연걸은 8세 때 학교 행사에 참석해서 무대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는데, 때마침 오빈(吴彬) 코치의 눈에 들었고,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오 코치는 마치 보물을 줍듯이 이연걸을 무술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무술이라는 개념에 대해 잘 몰랐지만, 어머니의 가르침을 어렸을때부터 받았던 덕분인지 그는 어려서부터 낮선 도전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무술을 연마할 때도 군더더기 없이 시원시원하고 깔끔하게 하였는데, 그의 몸에는 수많은 노력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이연걸은 나중에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내가 8살 때 하루에 8시간씩 연습했는데, 발이 아프면 사부님께서 손을 단련하라 하셨고, 손을 다쳐도 나보고 계속 이어서 연습하라고 하셨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한번은 무술을 연습하다가 넘어져서 다쳤는데, 어머니가 매우 걱정하여 무술을 포기하고 돌아오라고 했지만, 오빈 코치가 말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연걸은 재능있는 무술 꿈나무였기 때문에 떠나보내기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이연걸도 오빈을 실망시키지 않고, 다치면 다시 일어났고, 다쳐도 계속 연습할 만큼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피곤해서 땅에 주저앉아도, 잠시 쉬고난 후에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와 같은 정신력과 끈기는 그가 쿵후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는 토대이자 예봉을 점차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02. 첫 번째 자취를 감춘 사건
1972년, 이연걸은 "범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탁구 선수권대회" 개막식에서 무술 공연을 했고, 공연이 끝난 후 주(周) 총리와의 접견도 가졌습니다.
11세 때, 이연걸은 소년부 전국 무술대회에 참가하여, 39도의 고열에도 불구하고 3관왕에 올랐습니다.
이러한 성적은 좌중을 놀라게 하는 것이었으나, 그는 결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12세 때에는 성인부 대회에 참가하여 종합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79년, 그는 제 4회 전국체전에서 양 무릎 정강이뼈가 튀어나와 뒤쪽 인대가 꼬였지만, 경기를 계속하여 6개 종목에서 5개의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이러한 이연걸의 노력 덕분에 당시 그는 적지않은 돈을 벌었고, 가계의 부담을 덜어줄 수도 있었습니다. 우승도 많이 했고, 이후 무술인으로 승승장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챔피언의 자리는 지속적인 도전을 받기 때문에 이를 한 사람이 유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인 만큼, 그도 일인자의 자리를 지켜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
이연걸은 그 다음의 길을 어떻게 가야할지 생각하던 중, 홍콩의 장흠염(张鑫焱) 감독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장흠염은 당시 <소림사(少林寺)> 촬영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주인공 각원(觉远) 역으로 무예가 뛰어난 사람을 찾던 중 이연걸에게 반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촬영한 후, 한 장에 0.1위안짜리 영화 티켓으로 1억여 위안의 수입을 벌어들였습니다. 이 영화는 영화계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며 이소룡에 이어 두 번째로 글로벌 무술 열풍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극중 주인공인 이연걸도 이 영화로 중국 전역을 들썩였고, 심지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영향력있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소림사>가 큰 성공을 거둔 이후, 영화사에선 계속해서 <소림소자(少林小子)>를 찍어냈는데, <소림소자>의 수익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나중에 <남북소림(南北少林)>을 계속 촬영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리 유명해도 출연료가 1위안(지금의 1위안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대중의 예상보다 당시에도 낮은 출연금액)이였는데 어떤 때에는 이연걸이 감독이 오기를 몇 시간동안이나 기다리고 있는데 지각한 감독이 와서는 당일 촬영을 취소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각종 갈등이 빚어졌고, <남북소림>은 결국 실패했습니다.
1986년, 이연걸은 <중화영웅(中华英雄)>을 연출하고 싶었지만, 그는 감독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결과도 좋지 않았고, 흥행실적도 참담했습니다.
이 때의 패배로 이연걸은 충격을 받아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 후, 이연걸은 한동안 사라졌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첫번째로 영화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일이었습니다.
03. 두 번째 은둔
이후 2년 동안 이연걸은 어떠한 촬영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의 아내 황추연(黄秋燕)도 임신을 해서 그들은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동안 집을 사고, 무술관을 열었고, 딸을 낳았습니다.
1989년, 라유(罗维) 감독은 <용재천애(龙在天涯)> 각본을 들고 이연걸의 복귀를 요청했고, 라유는 아들 라대위(罗大卫)을 시켜 이연걸과 인연을 맺고 <용재천애>를 촬영하게 했습니다.
또한 이연걸은 꽃다운 미모의 리지(利智) 알게되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 후 이연걸은 리지에게 "10년 후에도 감정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 결혼하자."며 다음 10년을 약속했습니다.
감독 서극(徐克)은 이연걸이 미국에서 영화 제작을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방문하여 홍콩으로 돌아와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1991년, 이연걸은 홍콩으로 돌아와 <황비홍(黄飞鸿)> 시리즈를 찍으며 다시 한번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연걸은 당시 다시 고난의 단련을 통해 무술 실력을 키워 더욱 침착한 황비홍으로 변모해갔습니다.
04. 다시 산에서 나가니, 이미 일대종사(一代宗师)가 되다
그해, 이연걸은 아내 황추연과 이혼했습니다.
<황비홍>을 찍고 나서, 이연걸과 제작자 라대위 사이에 불화가 생기는데요, 라대위가 자신과의 관계를 내세워 가화(嘉禾)와 계약을 맺게 했지만, 계약 기간이 끝날 무렵 보수를 체불했기 때문입니다.
이연걸과 회사 사이에서 라대위는 오직 회사의 편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연걸이 나중에 <황비홍>에서 하차하게 된 원인이 되었지요. 그리고 가화와의 관계도 틀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연걸 같은 인재는 영화사에서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고, 가화와의 계약 해지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로 또 다른 제작자 채자명(蔡子明)은 이연걸이라는 스타와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불행히도 이연걸과 계약 체결을 한 바로 다음날 총격 살해당했습니다.
이 일은 큰 파문을 일으켰고, 각종 추측도 있지만, 진실을 구별해내기는 어려웠습니다.
이 때, 이연걸도 위험에 처했고, 경호원들이 수시로 따라다녔습니다.
당시 이연걸은 "<중남해보표(中南海保镖)>를 촬영할 때, 영화 속에서 나는 무소불능(无所不能)의 경호원이었는데, 영화 밖에서는 오히려 몇 명의 경호원들이 나를 보호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연걸은 나중에 정동영화사(正东电影公司)를 설립했는데, 비록 작품은 많지 않지만, 한 편 한 편이 모두 주옥같은 명작으로 <방세옥(方世玉)>, <태극장삼풍(太极张三丰)>이 모두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연걸이 직접 세운 정동영화사는 몇 편의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사가 자리를 잡지 못하자 이연걸은 온갖 압력에 시달리며 정동을 떠났고 최보주(崔宝珠)라는 사람에게 회사를 맡기게 되었습니다.
1999년, 이연걸은 10년의 사랑이 변치않으면 결혼하자는 이지와의 약속을 지켜서 둘은 결혼했습니다.
2005년, 이연걸은 정동으로 돌아와 <곽원갑(霍元甲)>을 찍었는데, 이 영화를 찍고 난 후, 이연걸은 두 번째로 영화계에서 종적을 감췄습니다.
사람들은 이연걸이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하기 시작했는데요,
비록 더 이상 젊지 않지만, 반 백년 동안 '쿵후 황제'였던 그의 열정은 조금도 줄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연걸은 영화계에서만 멀어졌을 뿐이지,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공익에 힘쓰며 기금을 모아 공익조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바로 중화전통무술을 홍보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도 찍고 있지만, 사람들에게 요 몇 년 동안 이연걸은 돈을 벌기 위해 조잡한 영화들을 찍었다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백사전설(白蛇传说)>, <불이신탐(不二神探)>, <봉신전기(封神传奇)> 와 같은 작품들은 평점이 매우 낮습니다.
사실 이연걸은 이런 영화에 출연할 필요는 없지만, 그가 이러한 영화에 출연한 것은 모두 인정 혹은 옛정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연걸의 인생 후기 작품들은 많은 흥행을 거두진 못했지만 그가 남긴 이전 영화들은 모두 명작이죠.
지금도 가끔 영화를 찍는 이유는 공익을 위해서든, 인정에 의한 것이나 혹은 의리를 위해 찍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연걸은 여러 해 동안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만큼 더 많은 일을 겪었기에 공명과 관록을 추구하지는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도 영화인으로 더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겨주길 바랍니다^^
<참고기사>
“消失”的李连杰去哪儿了?
近几年,关于李连杰的现状话题不断,就因为几张看上去很衰老的照片,以及他患上的甲亢,就会衍生出各种话题。 他是不是已经苍老衰朽了?是不是得什么病了? 几乎每次出现这样的话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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