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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의 영화 여정에서의 3명의 아버지와 2명의 원수 본문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급선봉(急先锋)>은 중국 국경일 영화 중 가장 감격스러웠던 작품이라고 합니다. 시간은 참 빠르게도 성룡(成龙)은 벌써 66세이고, 당계례(唐季礼)는 60세입니다.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춘 고전영화이며, 성룡이 글로벌 스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 영화 <홍번구(红番区)>가 벌써 25년 전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 기사를 쓴 기자가 더 궁금한 것은 예순의 노인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라고 합니다. 명예를 위한다? 따거(大哥)의 영향력은 이미 방송가를 훨씬 넘어 세계에서 지명도가 가장 높은 중국인입니다. 금전적 이익을 위해서이다? 그의 집안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그는 이미 막후로 물러나 누워서도 돈을 벌 수 있는 무수한 방법과 자금이 있습니다.
더욱 합리적인 설명은 아마도 성룡이 정말로 영화를 사랑하고, 그는 영화를 일종의 전승(传承)으로 보고있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70년대 말 무명의 졸개 천위안룽(陈元龙)부터, 바람 잘 날 없는 성룡까지, 이 여정에는 스승님과 아버지처럼 귀한 분도 계셨고, 창작 이념으로 반목하는 적들도 있었는데, 이것은 모두 영화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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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진지평(陈志平)은 진항생(陈港生, 성룡의 본명)의 아버지이고, 우점원(于占元)은 성룡의 아버지이다.
성룡이 7세 때, 부모에 의해 우점원이 홍콩에서 설립한 "중국 경극연구학원"에 보내졌습니다. 우점원은 유명한 엄격한 스승으로, 연극학원에서 성룡은 매일 악마적인 훈련을 겪으며, 체벌로 피눈물을 흘리는 것은 일상이었고, 매일 밤마다 잠들때 성룡과 후배들은 마음 속에서 묵묵히 스승을 저주했습니다.
스승을 제외한 몇몇 대사형들도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대사형 홍금보는 인터뷰에서 그는 항상 소사제 성룡에게 교육을 시켰다고 하였으며, 몇 차례나 성룡은 도망가려고 했지만 잡혀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아, 성룡과 견습생들은 분명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마침내 스승님의 고심(苦心)을 깨닫게 되었고, 10년의 견습생 생활을 통해 영화례를 넘나들 수 있는 훌륭한 몸,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액션 기술, 그리고 피 속에 스며들어있는 강인함, 담력, 기백과 규율을 만들어냈고, 이후 성룡은 현재의 위치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1997년 9월, 우점원이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성룡은 네덜란드에서 <나는 누구인가(我是谁)>를 찍고 있었는데, 성룡이 선후배들과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오자 그는 극 중 두 장면을 수정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성룡이 21층 높이의 로테르담 빌딩에서 뛰어내려 건물 전체 외사면을 따라 뛰어내려가 아래쪽 가장자리로 돌진할때 발이 멈추도록 한 뒤 가장자리에서 유리를 타고 건물 안으로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43세의 성룡은 "박명출위(搏命出位)"의 나이는 넘긴지 오래지만, <경찰 이야기(警察故事, 폴리스 스토리)>처럼 추락하는 것을 잡을 만큼 맨 몸에다 보호받지 못하는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제작자와 감독 진목성(陈木胜)은 완강히 반대했고, 또 대역에게 양보하라고 했지만, 성룡은 스승 우점원에게 이 점프를 바치겠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 동작은 한 번에 이뤄졌고, 기네스로부터 영화사적으로 가장 위험한 장면으로 꼽혔으며, 성룡은 이런 방식으로 사부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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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의 연기 여정은 인터넷에서 남자 주인공들이 탄탄대로를 걸어갔던 것과는 다른데요, 21세의 그는 당시 진원룡(陈元龙)으로 불리며 운 좋게도 <광동소로호(广东小老虎)>에서 남자 주인공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영화가 실패하며 개봉 기회조차 얻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이후 두 편의 영화도 연이어 실패했습니다. 1976년, 그는 영화계에서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고, 호주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아버지를 찾아가 요리사가 되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이때, 그의 인생에서 두 번째 귀인이 나타났습니다. 가화(嘉禾) 영화사와 사이가 틀어진 감독 라유(罗维)는 독립하여 스스로 영화사를 차리고, 제 2의 이소룡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매니저 진자강(陈自强)이 진원룡을 추천했는데, 라유 감독이 만난보니 이 청년이 얼굴은 못생겼지만, 몸놀림이 좋았고, 무엇보다도 말을 잘 듣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소룡과의 은원이 깊었기 때문에 라유 감독은 이 "충실(忠实)"이라는 단어에 대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정서가 높았던(情商极高) 진원룡은 곧 라유 감독을 의부(义父)로 인정하였고, 라유는 그에게 '성룡'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습니다.
두 사람의 합작은 결코 순탄치 않았는데요, 첫 작품은 <신정무문(新精武门)>으로 성룡과 묘가수(苗可秀)가 주연이었는데, 50만 홍콩달러에도 못 미치는 흥행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풍우쌍류성(风雨双流星)>, <비도권운산(飞渡卷云山)>까지 연이어 참패하자, 외부에서는 성룡을 두고 "성룡은 무슨 용이 되느냐, 성충이나 다름없다!(成什么龙啊!成虫还差不多!)", "코는 엄청 크고 눈은 작은데 무슨 인기를 얻겠냐, 돈 낭비다!(大鼻子小眼睛的,怎么会红啊,浪费钱!)" 등등 혹평 일색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라유는 성룡을 잘 알고, 자원도 많이 투자했지만, 영화 내용면에서 성룡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지 못했습니다. 당시 라유의 회사 형편이 어려워지자 성룡에 대한 신임을 잃은 라유는 그를 독립 제작자인 오사원(吴思远)과 원화평(袁和平)에게 빌려주었는데, 이제서야 영화를 찍으면서 진정한 백락(伯乐)을 만난 셈이 되었습니다.
이후 성룡이 주연을 맡은 <사형조수(蛇形刁手)>, <취권(醉拳)>, <소권괴초(笑拳怪招)>가 연이어 흥행에 성공하며 업계에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라유가 경제적으로 궁핍하여, 성룡에게 개런티로 몇 만 위안, 월 3000위안의 기본급밖에 주지 않은 것은 나중에 성룡이 떠나게 된 빌미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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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성룡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던 가화 영화사는 1980년대에 100만 홍콩달러의 천문학적 계약금을 제시하며 성룡에게 스카웃 제의를 했습니다. 당시 그는 라유의 수하에서 영화 편당 3000 홍콩달러를 받는데 그쳤었는데요, 의부를 배신하고 싶지 않아 거절했었으나, 가화에서 240만에서 480만까지로 올려서 불렀습니다.
라유가 성룡이 또 다른 계약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하는 것을 알게된 후, 두 사람은 계약 문제로 미움을 사 법정에 오르려 했으나, 매니저 진자강의 설득과 중재로 성룡은 가회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가화 창립자 중 한 사람인 하관창(何冠昌)이 성룡에게 건넨 첫 마디는 "우리가 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당연히 돈을 벌기 위해서지만, 만약 당신이 가회를 위해 영화를 만든다면 나는 당신에게 당신의 생각이 촬영과 제작에 완전하게 들어가도록 보장해주겠다. 나는 당신에게 강제적인 예산 심사나 제작 기한 부담을 주지 않을 것이다. 영화 촬영은 당신이 맡고, 돈과 관련한 일은 우리에게 맡겨라."
<용형호제(龙兄虎弟)> 촬영 중, 성룡은 생애 최악의 부상을 당해서 병원에서 죽을 뻔 했었습니다. 하관창은 가화와 성룡에게 두 가지 금지령을 내렸는데요, 하나는 어떤 역할이든 더이상 머리카락을 자르면 안 되고, 또 하나는 어떤 역할이든 성룡이 죽을 사람(영화에서 죽을 수 없다)을 연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룡은 1997년 하관창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두 가지 금지를 깨기 시작했고, 2003년 <신숙사건(新宿事件)>에서 성룡이 연기한 캐릭터가 처음으로 스크린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사부 우점원과 연기자로서의 인생으로 이끌어준 라유에 비해 하관창은 진짜로 사업상 성룡을 이해하고, 생활하면서 성룡을 사랑했던 연장자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하관창과 가화는 원대한 시야를 갖고 있었으며, 성룡의 독보적인 쿵푸 코미디 라벨을 만들어 유럽과 미국 영화계를포괄적으로 섭외하였고, 이들과 영화 합작이나 배급 협업을 통해 성룡 영화를 국제적으로 만들었으며, 글로벌 스타로 끌어올리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하관창이 없었다면, 그리고 만약 가화가 없었다면, 성룡은 용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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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화가 잘 나가고, 자신의 실력도 강한데다 정도 많아서 성룡은 1980년대부터 홍콩 영화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업계 내에서는 그에 불복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황지강(黄志强)과 왕정(王晶)일 것입니다.
황지강은 강력한 연출가로서, 촬영장에서 한 입으로 두 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1993년 황지강과 성룡은 <중안조(重案组)>에서 호흡을 맞췄는데, 두 사람은 제작 이념의 차이가 커서 촬영장에서 다툼이 잦았고, 가화는 성룡을 달래기 위해 후반에 감독을 전지화(陈志华)로 바꿨습니다. 황지강은 성룡이 배후에서 꿍꿍이를 부렸다고 주장하며 두 사람은 갈등을 빚게 되었습니다.
왕정은 성룡과 세 번 호흡을 맞추었는데, 처음 두 번은 그저 그랬지만, <시티 헌터(城市猎人)>에서는 성룡이 너무 많은 감독 일에 간섭을 한다고 생각하였고, 역시 절정기를 달리던 왕정은 이런 화를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영화가 개봉한 후에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두 사람은 결별했습니다.
성룡을 원망하는 두 감독은 1995년에 영화 <서단용위(鼠胆龙威)>를 함께 만들었습니다. 비록 왕정은 감독과 각본가로 거명했지만, 이후 홍콩 매체에 따르면 대부분의 영화를 황지강 감독이 연출했다고 합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의 무술지도가가 칠소복(七小福) 중 성룡과 가장 거리가 먼 이사형 원규(二师兄元奎)라는 점입니다.
장학우(张学友)가 연기하는 액션스타 용위(龙威)는 액션 영화스타입니다. 평소 소심하고 초라한 모습, 위험한 액션까지 모두 이연걸이 연기한 보디가드가 도와줍니다. 그런다 그는 매일 언론에 자신은 절대로 대역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완전히 노골적인 흑성룡(黑成龙, 성룡 안티)입니다.
황지강은 나중에 <서단용위>는 강한 개인적인 편견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성룡은 이에 대해 활달하게 표현하며 자신은 확실히 대역이 있다고 말하였으나, 대부분의 영화에는 직접 출연하였습니다. 이런 솔직함은 오히려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모든 은원(恩怨)은 강호의 전설로 남았습니다.
성룡, 주화건(周华健), 황요명(黄耀明), 이종성(李宗盛)이 합창한 <진심영웅(真心英雄)>에서 "아무도 쉽게 성공하지 못했다(没有人能随随便便成功)" 라는 한 인상적인 가사가 있습니다. 성룡은 중국어 영화의 명작 중 하나로 꼽히며,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단지 그와 그의 귀인, "원수"들이 함께 중국어 영화의 황금시대를 만들었다는 것 뿐입니다.
<참고기사>
成龙成为大哥路上的3个“父亲”和2个“仇人”
《急先锋》是国庆档电影中看完最让我感慨的一部。时间过得真快啊,成龙已经66岁,唐季礼60岁。两人合作的经典、确立成龙国际影星地位的《红番区》,也已经过去25年了。 让我更感叹甚至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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