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공세가 어려웠던 도시는?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이번 회전(창샤 보위전,长沙保卫战)은 전국의 장병들을 심리적으로 일변시킬 수 있다......탁월한 지도력, 필사의 각오만 있다면 역시 공세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번에 입증하였다." -<진중일보(阵中日报)> 사설
항일전쟁 당시, 팔로군은 선진 무기와 장비를 넉넉히 갖추지 못하였지만, 최대한 적을 살상하기 위해 적진의 전장을 누볐습니다. 정면 전장(正面战场)의 중일 전투에 비하여, 팔로군이 전개했던 전투는 규모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작았지만, 일본군을 견제하려는 팔로군의 노력이 없었다면 중국군이 정면 전장에서 맞닥뜨리게 된 항적(抗敌) 압력은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하면 중국군은 더 이상 반격할 힘이 없었을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항일전쟁때 일본이 중국의 도시들을 대대적으로 침공하도록 만들었죠.
그런데 항전시기에 중국에서 가장 공격하기 어려웠던 도시는 어디였을까요?
일본군은 당시 얼마나 많은 병력을 전장에 투입하였고, 전투의 마지막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소개한 기사가 있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공략하기 어려운 도시
사실 이 도시는 후난(湖南)성에 있는 한 도시라고 합니다. 바로 창샤(长沙)죠. 일본군은 1939년 9월부터 3년에 걸쳐 이 도시를 대상으로 단계적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창사는 당시 중국 제 9 작전구역(第九战区)의 지휘 중심이었고, 중국군 중 가장 정예부대가 대부분 주둔했던 곳이었는데요, 일본군이 창사에 손을 댄 것도 중국의 정예부대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중국이 제 9 작전구역을 잃으면 남은 무장세력에 항일 압박이 더욱 커지고, 중국이 일본군을 이기기 위해 더 큰 희생이 불가피해지기 때문이죠.
다만 일본 측에서는 창사라는 도시가 그렇게 공략하기 힘들줄은 몰랐습니다. 그들은 이 도시를 공략하기 위해 3년 동안 40만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의 회전 끝에, 일본군은 창사를 제대로 공략하지도 못한 채 11만 명의 전사자를 남겼다고 하는데요, 이 세 번의 대규모 회전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3차 창사 보위전(三次长沙保卫战)
1939년 9월, 나팔소리가 울리며 제 1차 창사 보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군대는 각각 쉐웨(薛岳) 장군과 오카무라 야스지(冈村宁次)가 이끌었는데, 당시 오카무라 야스지는 10여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켜 3개 항로로 나뉘어 창사를 공격하였습니다.
쉐웨 장군은 이 소식을 듣고 창사를 사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창사 주변 지역의 실정을 시찰한 후, 관련 정보를 결합하여 일련의 작전 계획을 세웠습니다.
쉐웨 부대는 적의 중장갑이 전선의 진지로 수송되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 민중의 지원을 받아 주변의 주요 도로들을 파괴하였고, 이로 인해 쉐웨 부대는 주변 도로들을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어쩔 수 없이 일단 정해진 작전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중장갑의 지원을 잃은 일본군 부대는 창사 지역의 지리를 잘 알지 못하였고, 쉐웨 부대의 포위망 속에 빠져들곤 하였습니다. 일본군은 결국 잠시 물러나 원군을 기다리며 파괴된 도로를 복구하는데 힘을 쏟아야 했습니다.
1941년 8월, 일본군은 후베이(湘北)에 병력을 집결하기 시작하였고, 비밀리에 몇몇 정예 부대를 차출하여 제 1차 창사 전쟁의 경험을 정리한 후 다시 후난성의 창사를 공격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일본군의 준비가 비교적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창사 주변의 일부 지역에서는 엎치락 뒤치락하며 쟁탈전이 반복되었고, 대운산(大云山) 진지가 그해 9월 8일에 일본군에게 점령되는 등 난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중국 수비군에 의해 탈환되었죠.
다른 창사 지역의 수비진에서도 중국 수비군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전투 도중 창사 수비군의 작전 정보가 유출되어 전사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고, 이것은 전사들에게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여러 진지 수비군에 피해가 커지자, 창사 측에서는 일단 철수를 택하였고, 창사를 지키기 위한 중국 수비군과 일본군의 줄다리기가 벌어졌습니다.
양측의 대치 과정에서 일본군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들은 전투에 앞서 작전을 빨리 끝내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중국군의 집요한 저항으로, 일본군은 전쟁터에서 병력과 탄약, 식량의 손실이 심각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후방에서의 보급을 보장하기가 어려웠고, 더 이상의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일단 작전을 끝내고 1941년 10월 1일에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일본군의 퇴각과 동시에 창사의 수비군은 지령을 받아 적군을 추격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원래의 진지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번 한 번의 실패로 일본군이 창사를 공격하는 것을 포기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두 달 정도 휴양을 한 후, 1941년 12월에 다시 창사로 진격하여 2주 정도 내에 창사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죠.
쉐웨는 앞선 두 차례의 회전 경험을 바탕으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주변 도로를 파괴하고, 지형에 따라 여러 개의 종심복격(纵深伏击) 지역을 설치하였습니다.
일본군의 공격이 본격화되자 창사의 수비군은 쉐웨가 배치한 작전 계획에 따라 적을 차근차근 매복지점으로 끌어들였고, 일본군은 몇 차례 매곡 공격을 받은 후, 작전의 리듬이 송두리째 흐트러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일본군은 갑자기 작전 계획을 변경해서 지치고 막막한 상태였는데요, 이로 인해 일본군의 사기는 더더욱 떨어졌고, 창사 수비군은 괴로워하고 있던 틈을 타서 일본군을 쳤습니다.
일본군의 공세를 물리치는 대신 기존의 진지를 고수하면서 일본군이 한 곳의 진지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결사적으로 대응하였습니다. 이번 세 차례의 창사 보위전에서 중국은 총 120만의 병력을 투입하였는데, 9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11만여 명의 일본군 시신을 남겼습니다.
창사는 왜 이렇게 난공불락이었나?
이후 사학자들은 창사를 연구하면서, 이곳을 점령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바로, 창사의 지형이 방어전에 적합하였기 때문이고, 창사를 지키는 지휘자의 경험이 풍부하였던데다, 창사 수비군과 후난성의 민중들이 모두 의기투합하여 창사를 지키기 위해 큰 희생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창사 회전에서 세 차례의 단계별 전투를 살펴보면, 창사 수비군은 인근의 특수한 지형지리를 이용하여 일본군을 막아왔습니다. 일본군이 창사를 빨리 공략하려면 어쩔 수 없이 미뤄강(汨罗江) 일선에서 전투를 벌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형지리 덕분에 일본군을 수비군의 포위망에 빠뜨리기 쉬웠던 데다, 후속 작전 과정에서 창사 수비군이 미뤄강 일선을 제외한 다수의 매복 지점을 개척하면서 일본군은 작전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사상자를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창사 수비군이 일본군을 매복 지역에서 무난히 섬멸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창사 보위전을 지휘했던 쉐웨 등이 전세를 잘 분석하였고,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여 적을 포위망에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쉐웨 등의 지휘가 없었다면, 창사 회전에서 일본군을 '패할 수 없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사용한 표적성을 띤 계책을 썼던 것도 있지만, 쉐웨 등 지휘부에서 유연하게 전술을 변경하는 태도로 일본군의 창사 공략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사는 당시 전 국민이 군인 신분이었고, 창사를 지키기 위해 후난성의 인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전하였으며, 군중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전쟁을 지원하였습니다. 당시 창사 수비군이 주변 도로의 대부분을 단시간에 파괴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후난성 군중들의 협조 덕분이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항일 전쟁을 언급할 때 늘 "천인(川人, 쓰촨 지역 사람들)은 나라를 저버리지 않는다"고 말하는데요, 천군 외에도 후난성에서는 당시 전국 항일 사업을 위해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당시 후난인 15명 중 1명은 전쟁터에 나갔다고 합니다. 8년간의 전면 항전 시기에 후난성 한 성에서만 징집한 병사만 해도 210만 명으로 무척 많았죠. 마오 주석은 <논지구전(论持久战)>의 "견아교착적전쟁(犬牙交错的战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장기적이고 광대한 항일전쟁은 군사, 정치, 경제, 문화 각 방면에 걸쳐 복잡하게 얽힌 전쟁이다. 이 전쟁은 역사상의 기이한 현상이며, 중화민족의 장거(壮举)이며, 천지를 뒤흔드는 위업이다."
아마도 항일전쟁에 대해 좀 더 세밀하게 알고 싶어하고, 중국의 항일사업에 큰 희생을 치른 선대들에게 끝까지 경의와 존경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 역사서들을 참고하여 항일전쟁의 실태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참고기사>
中国最难攻打的一座城市,日本接连打了3年,只留下11万日军尸骨 (baidu.com)
中国最难攻打的一座城市,日本接连打了3年,只留下11万日军尸骨
“此次会战(长沙保卫战),可使全国将士心理上为之一变……此次可以证明你只要有卓越之指导,必死的决心,一样地也是攻不动的。”——《阵中日报》社论 在抗日战争时期,八路军没有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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