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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의 4 자녀들은 아버지 사망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hanyuku 2020. 2. 24.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혁명이 아직 성공하지 못했으니, 동지들은 여전히 노력해야 한다(革命尚未成功,同志仍须努力)"

 

 

위의 말은 중국인들이라면 귀에 익은 말이지만, 누가 한 말인지를 묻는다면 모두가 반드시 아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중국의 이 명언은 20세기의 무수한 지식인들을 지도하고 신해혁명 이후에도 "중국을 봉건 전제통치에서 해방시켜라(将中国从封建专制统治中解放出来)"라는 말처럼 분투하고 당대의 이상이었던 대인물 손중산(孙中山, 쑨원) 선생의 말입니다.

 

 

 

 

손중산 선생은 중국 근대 역사에서 민주 혁명의 선구자로서 그의 위대함이 '국부(国父)'라는 말에서 충분히 드러납니다. 혁명 사업에 대한 손중산 선생의 열정은 중국인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로 인해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부 손중산이 58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그의 4 자녀들의 운명은 어땠을까요?

세 명의 아내를 두었던 손중산 선생의 부인들은 루무젼, 쑹칭링, 오츠키 가오루입니다. 루무젼은 손중산의 부모가 '지정'해준 아내로 어릴 때부터 부지런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현모양처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열여덟 살 때 양가 부모의 주선으로 스무 살 손중산과 결혼해 세 자녀를 낳았습니다.

 

 

 

 

쑹칭링(宋庆龄)은 손중산 선생이 혁명 사업 중 만난 아내로, 두 사람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로서 공동의 민족적 대의와 식견을 가지고 있었고, 손중산 선생은 이런 쑹칭링을 매우 사랑하여 첫째 부인인 루무젼에게 이혼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쑹칭링은 남편을 엄호하다가 유산을 해서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어 손중산 선생의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손중산 선생의 세 번째 아내인 오츠키 가오루(大月熏)는 손중산 선생이 일본 도피시절 사귀었던 사람인데, 두 사람의 만남은 한 번의 오해와 함께한 오랜 시간과 서로의 정을 나눈데서 비롯되었습니다. 1903년 두 사람은 연리지를 맺었고, 오츠키 가오루는 1906년 쑨원의 딸을 낳고 후미코(富美子)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1925년 58세의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손중산 선생은 쑹칭링 앞으로 유산을 남겼습니다. 관련 문헌에 따르면 손중산 선생은 국민당의 지도자로 오랫동안 민국의 수장을 지냈지만, 그의 유산은 옷가지와 책, 상하이의 개인 주택 한 채였다고 합니다. 한 지도자로서 사심없이 검소한 모습을 보였고, 아들 딸들은 이러한 아버지에 대해 원망없이 지지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전에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많은 물질적 부를 축적하지는 않았지만 자식들에게 소중한 정신적 부를 남겼고, 자식들은 아버지를 본받고 그 유지를 이어받아 중국에 힘을 보탰습니다.

 

 

 

 

손중산 선생의 아들 쑨커(孙科)는 신 중국이 성립되기 전까지 행정원장, 입법원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신중국 설립 이후 여러 가지 이유로 사임하고 외국에 나가 2남 4녀를 두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외국에 정착했지만 조국을 잊지 않고 국내 상황을 지켜보며 힘을 보태는 데 돈을 기부했고, 그들의 애국적 정서가 거주지에의해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손중산 선생의 큰딸인 쑨옌(孙娫)은 그가 끔찍이 아끼고 좋아하던 아이로, 나중에 외국으로 보내져 공부를 하느라 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이 적었지만, 아버지 손중산을 마음속으로 존경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신장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손중산 선생의 차녀 쑨완(孙婉)은 언니보다 훨씬 오래 살았지만 연애사에 굴곡이 많았습니다. 그녀는 일찍이 외지에서 살때, 유부남을 사랑하게 되어 친지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그녀의 두 번째 연인을 만나서 비로소 감정적으로도 좋고, 생활도 원만했으며, 손중산의 영향을 받도록 가르쳐서 그녀의 아이들은 기대에 부응하며 조국 건설에도 힘썼습니다.

 

 

 

 

막내딸 후미코가 태어나고 손중산이 귀국한 후, 그는 혁명사업으로 바삐 지내느라 다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후미코의 어머니 오쓰키 가오루는 손중산을 2년동안 기다린 후 생활이 곤궁에 빠지자, 어쩔 수 없어 딸을 일본의 미야가와 가로 보내 양녀로 받아들였고, 미야가와 후미코로 개명했습니다. 그녀가 자라면서 어머니는 그녀에게 생부 손중산의 상황을 알려주었는데, 두 모녀는 손씨 가문의 반발에 부닥칠 것을 우려해 본인의 신분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생부에 대한 존경심이 컸습니다.

 

 

 

 

손중산 선생의 후손들은 대부분 외국에 살고 있지만, 손중산 선생에 대한 그들의 인정과 중국에 대한 특수한 감정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손 선생의 후손 중에는 손중산의 유지를 이어받아 중국의 건설을 위해 꾸준히 분투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hare?context=%7B%22nid%22%3A%22news_10095831326848562583%22%2C%22ssid%22%3A%22%22%7D&pageType=1

 

孙中山去世时年仅58岁,留下4个子女,他们后来命运如何?

“革命尚未成功,同志仍须努力”,这句话,中国人耳熟能详,若问出处,大家未必知晓。这句名言,是人人知晓的大人物孙中山先生讲的,这段话不仅指导着二十世纪无数有识之士,在辛亥革命后继续为“将中国从封建专制统治中解放出来”而奋斗,还成为了当代无数为梦想、为事业而不懈努力的青年人的自勉之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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