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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원량 의사의 인생 스토리

hanyuku 2020. 2. 14. 08:00

 

안녕하세요 한어고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처음 감염되기 시작했을때 이를 세상에 알렸던 리원량 의사가 환자를 돌보다가 감염되어 최근 사망하였습니다.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가신 리원량 의사를 기리며 그의 인생 스토리를 공개합니다.

 

 


 

평범한 사람이었던 리원량: 헬스장 이용권 끊어놓고 한번 가고, 맛집 다니기를 좋아하고 게임을 좋아하던 평범한 보통 사람

 

 

리원량은 세상을 떠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우한시는 2월 7일 리원량에게 애도를 표하며 국감에서 파견된 수사팀에 전력을 다해 협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랴오닝 베이젼시의 실직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리원량은 어릴때 탁구를 좋아했고, 친구들은 그를 '뚱뚱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를 가르쳤던 한 중학교 교사는 그는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성적이 좋은 학생이었으며, 고3때 전교 50위 권으로 우한대 의대에 진학했다고 합니다.

 

대학에 들어간 후, 그는 살도 빠졌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던 그 시절, 리원량은 각종 단자(段子)를 돌렸었고, 식당에서 나오는 떡을 먹기 싫어했고, 희의장을 촬영하면서 "잠들것 같다"고 하던 사람이었고, 휴가때 친구들과 여행을 하며 어깨동무를 한 사진들을 남기는 등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졸업식에서, 우한대 잔디밭에서 학사복을 입고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졸업 후에는 남쪽에 있었는데, 먼저 샤먼(厦门)에 갔다가 우한성의 집으로 돌아와 첫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에게는 다섯살짜리 아들이 있는데, 현재 그의 아내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습니다. 리원량은 매주 우한시 중심의 병원 안과 진찰실로 출근했었습니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2019년 12월 30일 오후, 리원량은 한 환자의 진찰 보고를 보았습니다.

 

17시쯤에는 "화남 해물과일시장에서 7건의 사스 확진 판정이 났다"고 학우들에게 보냈습니다. 또 잠시 후 리원량은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확인돼 바이러스 분화가 진행 중이라는 최신 소식이 있다"며 "가족이나 친지가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고 외부로 전파하지 말라"고 덧붙였습니다.

 

왜 주위 사람들에게 이러한 주의를 주었을까요? 리원량은 나중에 인터뷰에서 "동학들이 대부분 임상의사이기 때문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리원량의 이러한 경고는 이후 인터넷을 통해 퍼져가며 가장 널리 퍼진 스크린샷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2020년 1월 3일, 리원량은 경찰의 통지를 받고 파출소에 가서 훈방서를 작성했습니다.

 

랴오닝성 베이젼에서 70대 중반의 베이젼시 고등학교 은퇴 교사인 리(李) 교사도 인터넷에서 이 캡쳐와 "리원량 우한 안과"라는 주석을 봤다고 합니다.

 

그는 이 이름에 대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베이젼시 고등학교는 랴오닝성 중점 중학교인데, 2004년 이 교사는 이곳에서 상무 부총장을 지냈으며, 당시 리원량은 고3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이 선생님은 리원량을 '한문자제(寒门子弟)'로 기억하는데, 리원량의 아버지는 기계 수리공장에 있었고 어머니는 베이젼 민족상가에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 리원량의 부모는 나란히 퇴직했고, "리원량 아버지가 퇴직한 뒤 안정된 직장이 없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모가 퇴직했을때가 리원량의 학창시절이었는데, 이 교사는 당시 리원량은 가계 소득이 많지 않았고, 아이가 학교에 다니는데 계속 돈을 쓰면서 학교를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가정 형편이 너무 일반적이고 궁핍하기까지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베이젼 고등학교는 전교생이 2000여 명 정도로 규모가 큽니다. 당시 이 교사는 학교 업무를 주관해 주로 선생님들을 상대했었고 학생들에 대한 이해는 많지 않았지만, 이 교사는 예외였던 셈입니다. 이 교사는 기자에게 고등학교때 리원량의 성적은 매우 훌륭했었고, 60명 정도의 반에서 리원량은 항상 반에서 3등 안에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는 말수가 적었고, 물리 화학을 잘했으며, 물리과 대표이기도 했습니다."

 

리 선생님의 기억 속에는 리원량은 연구에 능하고 차가운 널빤지 걸상에 앉아서도 공부할 수 있는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대학 입시에서 리원량은 609점을 받았습니다. 그해 랴오닝 이과 1티어 점수권보다 51점이 높은 점수였으며, 이는 베이젼시 고등학교에서 50위 안에 들 수 있는 성적이었습니다.

 

 

"리원량은 고3 현역이었는데 이 성적을 내기가 쉽지 않다"라며 이 교사는 리원량의 외삼촌, 외숙모와 고교 동창으로, 리원량이 대학 입시에 지원했을때 리원량의 외삼촌, 외숙모가 전화로 상담을 했었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리원량은 우한대 임상의학 7년제에 합격했습니다. "학부와 석사과정 연계과정으로 공부했었고, 매우 훌륭했습니다."라고 리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리원량의 부모는 언론 인터뷰에서 "그가 이것을 좋아한다"며 의대를 자처했다고 말했습니다.

 

 

맛집 탐방을 좋아하고, 게임을 좋아했던 평범한 사람

 

 

7년간 의학을 공부한 뒤 졸업 후 안과의사가 된 리원량은 2011년부터 샤먼대 부속 샤먼 안과센터에서 일했습니다.

 

우졔(가명)은 샤먼에서 일하던 동료이자 친구로, 샤먼대 부설 샤먼 안과센터의 푸저우 분원을 차례로 돌았습니다. 우졔는 "우리는 같은 주임에게 혼났고, 똑같이 환자를 정리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일하는 중에 리원량은 결코 모호하지 않습니다. 한 동료는인터뷰에서 "한 번은 리원량과 함께 석 달 동안 병원 선배를 따라 샤먼과 주변 마을을 돌며 공익봉사를 했었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 눈을 진찰해주었습니다. 그때 리원량은 매우 어려서 환자들이 좋아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많은 동료가 그의 인상이 근면하고 긍정적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의사 리원량의 생활은 바쁘지만 항상 재미를 잃지 않았었습니다. 우졔는 기자에게 그때 리원량은 친구들에게 맛있는 음식 사진을 잘 보냈었다고 말했습니다.

 

리원량의 웨이보에는 샤먼에 속한 3년 반 동안 1000건이 넘는 트윗을 보냈었는데, "음식, 디지털, 게임, 그는 내가 일하면서 접했던 가장 단순한 남자아이였습니다." 라고 우졔는 말했습니다.

 

우졔의 말에 의하면 "리원량은 웃을 때 수줍어하고, 화를 낼 때고 얼굴만 붉히고, 목소리가 약간 크고, 말할 때 눈이 비뚤어진다"라며 리원량을 "부드럽고, 착하고, 자상하고, 훌륭한-그는 드물게 이러한 몇 단어에 모두 해당되는 사람이다."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친구가 생각하는 의사 리원량은 평범한 보통 사람이다.

 

 

우졔의 회고에 의하면, 리원량은 음식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것을 좋아했고 특히 음식 사진을 잘 보냈습니다. 살이 쪄서 헬스를 하고 싶은데 3000여 위안을 주고 헬스장 카드를 발급받고 카드를 만들때 한번 간게 전부였습니다. 친구가 살이 쪘다고 말할때마다 같이 찍었던 사진을 꺼내 날신했던 시절을 이야기했었다고 합니다.

 

2014년 리원량은 우한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리원량의 부모는 언론 인터뷰에서 우한에 있는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리원량의 여자친구는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었는데, 우한 에어안과의 한 의사였습니다. 그들은 결혼했고 5년 전에 큰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우졔는 우한에 간 뒤 리원량의 친구들 단톡방에 아내와 아들의 사진이 많아진 것을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리원량은 음식을 좋아하며, 자신도 휼륭한 요리를 만든다고 합니다. 리원량이 우한으로 떠날 즈음에 샤먼의 동료들은 마지막으로 그의 집에서 회식을 하고, 크지 않은 유리 티테이블에 7,8개의 음식을 가득 차려놓았었습니다. 예전에 리원량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기회가 있으면 휴가내고 찾아가서 놀자고 말하고 했던 샤먼의 동료가 기억난다고 회상했습니다.

 

 

이제 다시 기회가 없게 되었습니다

 

 

리원량은 샤먼을 떠난 후 6년 동안은 일이 바빠 우졔와도 연락이 뜸했습니다. 마지막 만남은 2019년 쑤저우 안과 연례 총회때였습니다. 회의 후 리원량은 점심 식사를 같이 하자고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지난 1월, 우졔는 웨이보를 통해 리원량이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월 29일 20시 10분, 그녀는 리원량에게 보이스 메시지를 보내 그의 가족과의 빠른 쾌유를 기원했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고, 나중에는 밝은 길이 될 것"이라고 기원했습니다.

 

 

6분후 리원량의 답장: 고마워.

 

 

이것은 우졔와 리원량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습니다.

 

리원량이 동학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던 것을 회상하며, "리원량은 친구로서 이런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열심인 사람이니까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졔는 사태의 진전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2월 7일 새벽 우한시 중심병원은 의사 리원량씨가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리원량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 소식은 너무 애석한 일이었습니다. 이날 오전 6시가 넘어 70대 정년퇴직한 리 선생님이 휴대전화를 켜자 리원량씨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고, "훌륭한 아이인데, 너무 아쉽다."라고 기자에게 말하였습니다.

 

우졔도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웨이보를 볼 엄두도 못 내고, 위챗 속 모든 안과 전공군을 감히 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부드럽고 맛있는 음식을 사랑하는 착한 뚱보가 이제는 영원히 사라져버렸다니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그를 알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며 "리원량을 잊지 말아달라", "리원량의 가족들에게 애도를 표한다"고 하였습니다.

 

 

2월 7일 베이젼시 고등학교 공식 위챗 발송문과, 우한대에서 동문인 리원량씨의 명복을 빈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우한대에 의하면 리원량은 1985년 10월 12일에 태어났고, 2004년 우한대 임상의학(7년제) 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샤먼에서 3년간 잠시 근무한 뒤 2014년 우한으로 돌아와 우한시 중심병원에서 지금까지 일했습니다.

 

 

우한시 중심병원의 의사 소개에 따르면 리원량씨는 안과 임상에서 여러 해를 일하며 안저병, 백내장, 청광안의 치료에 능하며 안과의 흔한병들 뿐만 아니라 난치병 치료에 뛰어났습니다.

 

우한시 위건위, 후베이성 위건위, 우한시 정부 등 여러 부처는 이날 잇따라 공고를 내어 깊은 애도를 표하고 리원량 가족에게 위로의 뜻을 전했습니다. 또 국가감찰위원회는 조사팀을 후베이 우한으로 보내 리원량 의사와 관련된 대중에 반응에 대해 전면 조사를 벌였습니다.

 

 

2월 8일 국가감찰위원회 조사팀이 우한에 도착했다

 

 

같은 날, 우한시 인사부문에서 리원량씨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된 폐렴에 의료진으로 근무하던 중 감염돼 구조되지 않은 채 사망한 것을 산업재해로 인정했습니다. 산재보험 혜택은 일회성 공망급여 78만 502위안, 장례보조금 3만 6834위안으로 현재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리원량씨가 사망했을때 아내는 임신 6개월이었습니다. 그녀는 8일 16시 39분, 자신의 웨이보 계정에 글을 올려 최근 리원량 가족의 기부나 기부 접수와 관련한 인터넷 정보에 대해 입을 열었습니다. 그녀는 법에 따라 지급해야 할 돈을 제외한 어떤 형태의 개인이나 단체로부터의 기부를 거절했으며, 리원량의 도움과 기부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배포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기자는 리원량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내가 위챗 프로필사진을 리원량이 생전에 쓰던 이미지로 바꿨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의 한 장면입니다. 이미지 속의 네 가족은 강아지와 함께 있는데, 그들 가족처럼 아빠는 짱구를 안고, 엄마는 여동생을 안고 단란한 모습입니다.

 

 

<참고기사>

https://mbd.baidu.com/newspage/data/landingshare?context=%7B%22nid%22%3A%22news_9019623791779505403%22%2C%22ssid%22%3A%22%22%7D&pageTyp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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